오늘은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명동성당엘 다녀왔습니다. 지인의 결혼식엘 참석하려 나섰던 길입니다. 그냥 남들 입는 거처럼 가벼운 복장이어도 되었을 텐데 느닷없는 한복에 마음을 빼앗겨서 한 달 전에 인사동에 나가서 한복을 맞췄었거든요. 마침 그 한복이 지인의 결혼식 일주일 전에 나와서 신이 나서 차려입고 집을 나섰습니다. 버선 챙겨 신고 옷고름 동여매는 한복은 아니고요. 옷고름, 동정 모두 없애고 한복의 기본미만 유지한 채로 소매는 퍼프소매이고 치마도 원피스의 기장을 유지한 맞춤형 생활한복보다는 좀 더 업그레이드된 저만의 <갱년기 1주년> 기념 한복입니다.
참, 유난도 스럽다...할 사람도 있겠지만 이젠 진짜 내 나이에 5자를 붙일 그날이 며칠 남지 않았더니 그 지점 한 가지는 명확히 내 땅에 선 그어놓듯 마음을 지킬 수가 있는 경계선이 생겼는데 누가 뭐래도 ‘내가 하고 싶고 내가 행복한 건‘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용기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짙은 물빛의 고운 치맛자락이 가을바람에 휘날릴 때마다 명절에 고운 설빔 얻어 입은 다섯 살 계집아이처럼 그렇게 마냥 신이 나서 마음이 설렜습니다. 설렌 마음이 둥실 하늘로 올라가지 않게 부여잡고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명동을 가던 길에 잠시 일 년 전의 이맘때를 회상해 봤습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센 갱년기의 입김에 쉽게 잠들지 못하는 불면의 밤은 계속 이어지고 감정 호르몬이 날뛰고 스트레스가 쌓여서 어느 날은 김치 수업 후 집에서 혼자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그대로 화장실 바닥에 쓰러졌던 일도 있었습니다.
미주 신경성 실신? 뭐 그런 거였어요. 갑자기 식은땀이 좌악 흐르며 온몸을 흐르던 피가 초록색으로 바뀐 듯 차가운 게 느껴지고 헛구역질이 나더니 머릿속이 아득해지고 몸이 바닥으로 풀썩 내려앉더라고요. 하하
다행히 뭐 별일 없이 삼십 분 후 깨어나 거실로 기어 나올 수 있었지만 그 후로도 수업 후 한 번 더 쓰러지길래 그냥 수업을 쉬어버렸습니다. 갱년기란 감정을 내가 경험하기 전엔 굉장히 하찮게 여겼습니다. 나이 들어 생기는 노화쯤으로 치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말겠지 하고 무시하기 일쑤였던 거 같아요. 그렇게 홀대했더니 여느 사람보다 호되게 갱년기가 들이닥쳐서 작년 이맘때의 나는 너무도 벅차게 충분히 힘들어했던 거 같습니다.
우울증이 심하게 왔나 싶어 신경정신과를 가려다가 하필이면 집 근처 신경정신과의 예약이 서너 달 후에나 가능하다고 해서 낙심했더니 딸이 저에게 그러는 거예요. 엄마는 우울증이 아니라 갱년기가 온 거 같으니 산부인과를 가보라고요. 그 덕분에 알게 된 후론 차차 모든 게 조금씩... 시나브로.... 점점... 괜찮아지기 시작하더군요.
그까짓 호르몬의 수치가 좀 낮아졌다고 이십 년의 묵은 상처가 도드라져 다시 아프고 세상천지에 나 혼자 남았다며 산중턱에 앉아 설움에 복받쳐 꺼이꺼이 울어대고 밤엔 잠을 안 자고.... 아니 못 자고... 아주 가벼운 외부의 텐션에도 정신이 까무러질 일인가 싶었습니다.
일 년이 지난 지금은 내가 너무 하찮게 생각하였던 직경 2mm의 호르몬제 한 알 덕분으로 그리고 남편과 딸의 도움과 지지 덕분으로 또는 새롭게 시작한 유튜브 채널로 공개 일기장을 쓰는 소일거리로 마음이 다시 조용히 나의 갈길로 흐르고 있는 중이랍니다.
딸과 함께 내가 좋아하는 케이크를 사 와서 지난달에 생일 초를 불었는데 식구들은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었으나 저는 속으로 가족 모르게 갱년기축하 노래를 불렀습니다.
’ 갱년기 축하합니다. 갱년기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정은이의 갱년기 축하합니다. 짝짝짝... 1주년을 잘 겪어낸 너를 칭찬해... 짝짝짝‘
식장에서 만났던 인생의 선배인 나의 지인은 그런 말을 하더군요.
”내가 어릴 때는 일찍 나이를 먹고 싶었거든, 빨리 늙고 싶어서 남들 다 애달파하는 스물아홉도 서른아홉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말이야... 내 나이 앞에 5자를 붙이는 게 그렇게 미치게 싫더라고. 이젠 진짜 인생의 시계가 거꾸로 흐르는 지점이구나 싶어서 말이야 “
그 말을 듣고 심하게, 격하게 공감했습니다. 나도 그랬거든요. 이 놈의 세상, 난 맨날 너무 격하게 열심히 살아야 버텨낼 수 있는 내 인생아, 제발 빨리 남들보다 빠른 시간으로 늙어가 주렴하고 바랬었는데 나 역시도 마흔아홉의 문턱에서는 심하게 요동칩니다.
이젠 진짜 늙어갈 시간의 문턱을 넘어야 하는 거였구나 싶어서 말입니다. 앞으로 잘 늙어가자고 , 잘 죽을 죽비를 하자는 그런 얘길 하며 헤어졌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핸드폰으로 브런치에 작년 이맘때의 글을 다시 찾아 읽었습니다. 불면증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가슴에 보랏빛 짙은 슬픈 멍이 들은 채로 이십 년 묵은 설움에 목이 메어서 한라산을 올랐던 작년 이맘때의 글을 읽어봤습니다.
나의 갱년기를 고백하여 놓은 일이 참 잘했다 싶었던 순간입니다. 벽에 그어놓은 키재기 흔적만큼이나 나의 마음의 변화가 확연이 느껴져서 다행이었습니다. 자동차도 십 년쯤 타면 브레이크 패드가 닳아서 교체를 해주어야 하는데 하물며 사람의 감정벨트를 오십 년 사용했는데 이제는 좀 아껴주며 쉬어주라는 의미로 여자에게 갱년기를 선물로 주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나의 갱년기 1주년을 축하합니다. 앞으로 잘 늙어가기를 바랍니다. 묵은 설움, 무거운 과거를 내려놓았더니 등짐이 많이 가벼워짐을 느낍니다.
나와 같이 갱년기의 힘듦을 경험했을, 또는 경험하는 중년의 여인들을 응원합니다.
축하해, 정은아.. 너의 갱년기 1주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