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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꽃 Jan 05. 2024

03. 버려진 게 아니고 제외되었습니다.

서울에 13년 만에 폭설이 내려진 지난 토요일, 남편과 외출을 하려고 나섰다가 그만 눈길에 넘어졌습니다. 세상의 어떤 불행이나 불운도 나와 상관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골절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제발 골절만 아니길 바랐으나 응급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차가운 수술 배드에 올라 겨드랑이에 마취 제가 퍼 질 때, 너무나도 당연하게 할머니가 생각났습니다.


할머니는 양쪽 팔이 모두 한 번씩 골절이 된 경험이 있습니다. 할머니가 우리 사형제를 떠맡게 된 나이가 환갑이었습니다. 시골읍네에서 작은 공업사를 하던 큰 아들을 늘 믿음직스럽게 생각하였는데 그 공업사를 밑천으로 빚을 내어 인근도시에 백화점 안에 점포를 내었던 일이 실패를 하였거든요. 부도가 났고 공업사는 망했고 며느리는 실종되었고 그 며느리를 찾겠다고 아들은  손주들을 늙은 어미에게 맡기도 집을 나갔습니다.


다들 우리 사 남매를 고아원에 맡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동네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빈한한 농가였고 자기 소유의 논도 밭도  없는 가난한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루 품앗이로 할 수 있는 들일이나  논 일이었는데 하루 일을 쉬면 손주들을 굶겨야  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하루도 쉬지 못하고 매일 다른 집으로 일을 나가셨습니다.


할머니가 집을 비우면 아홉 살이었던 제가 어린 동생들의 밥을 챙기고 조막만 한 손으로 청소를 했습니다. 어린애가 보기에도 할머니가 너무 위태로워 보였습니다. 저분이 쓰러지시면 우리는 진짜로 고아원에 가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내기를 하다가 논두렁에서 미끄러지셔서 할머니 오른손이 골절되었습니다. 읍내 병원에서 깁스를 하고 집에 오셨던 할머니 얼굴은 풍선처럼 퉁퉁 불어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할머니는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우리들을 먹이기 위해 아프지 않은 다른 손으로 밥을 하였습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 위해 불소 시게를 넣는 할머니 옆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어떤 위로도 건네지 못한 채 할머니 옆을 지켜 드렸던 게 기억이 납니다.

겨드랑이에 마취제가 풀리는 서늘한 공포를 느끼며 그때 할머니도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워셨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조금 울었습니다. 수면 마스크가 씌워지고 잠시 의식이 없었는데 일어나 보니 수술침대 위에 저는 여전히 수술복을 입은 채로 있었고 손목 골절 외상 수술이 끝나 있었습니다.


질경이 보다도 더 억센 할머니의 성실함으로 키워진 우리 사 남매의 우애는 나쁘지 않았답니다. 나는 아직도 왜 막내가 아빠를 책임지겠다는 명목으로 아빠가 입원해 계셨던 병원에서 아빠의 신체를 탈취해서 다른 병원에 입원시킨 후에 내 앞에서 영 영 아빠를 숨겨 버렸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짐작도 할 수가 없습니다. 형편이 좋지 않았나, 나에게 큰 원한이 있었나, 어떤 상황이 막냇동생으로 하여금 그런 결정을 하게 하였는지 오래도록 고민하였으나 당사자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영 없어져버렸으므로 나는 계속 앞으로도 알지 못할 예정입니다.


겨우 고작 의류 매장 하나 실패 하였다고 사 남매를 버린 엄마에게서 받은 ‘버려졌다는’ 유기불안의 유산은 내가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도 늘 마음 깊은 곳에 깔려 있는 불온한 감정이었습니다. 나와 정서적인 유대관계를 가진 사람에게 버려지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더 잘하려 했고 그 사람의 기분을 거스르는 것을 무서워했던 것 같습니다. 나의 그런 문제를 깨닫게 해 준 게 막내 동생이 나를 검찰에 고소한 일입니다.


딸아이의 수능 한 달 앞두고  전화가 한통 걸려 왔습니다. 아빠가 입원해 계신다는 병원을 수소문에서 찾아갔다가  병원 정문에서 면회가 거부되어 아빠를 보지 못하고 돌아왔던 날 이후로 일주일 만이었습니다. 전화를 받았더니 수화기 건너편에서 저에게 그러더군요.


“ 김ㅇㅇ씨가 김정은 님을 고소하였습니다. 상세한 내용은 등기 발부가 되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나는 두고두고 그날의 통화의 멍함을 잊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무릎이 꺾인다는 표현은 약하고 뭐랄까요... 내가 걸어온 뒤편의 길이 모두 지진으로 푹 꺼져버린 느낌, 나의 과거는 소실되었고 나의 태생의 흔적도 영영 사라졌습니다.  형사 고소와 민사 소송을 거치면서 나는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생각을 수정했습니다.  나는 버려진 게 아니고 내가 모르는 어떤 이유로 인해서 그게 돈이든 개인적인 감정이든 알 수 없지만 그들의 무리해서 제외된 것일 뿐이라고요. 이익이나 같은 목적을 가진 무리에서 다른 생각과 이념을 가진 자는 자연스럽게 제외가 되는 게 조직사회의 사는 이치잖아요. 생존의 이치.


가족은 어떤 상황에서도 구성원을 버리지 않지만 나는 그들에게 가족이 아니고 어떤 이익이나 목적을 위해 존재했어야 할 구성원이었나 싶기도 합니다. 원래 인간은 고독하다는 단순하고 근원적인 명제를 비로소 받아들인 순간입니다. 그랬더니 참 아이러니하게도 많이 가벼워졌습니다.


버려졌다와 제외되었다의 뜻도 많이 달랐지만 어감도 달라서 그렇게 생각한 이후로 마음이 꽤 냉정해질 수 있었어요. 그때야 비로소 나를 오래 괴롭혔던 유기 불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혼자여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지금 살뜰히 살피는 남편과 딸도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오늘을 여한 없이 즐기며 살기로 했습니다.


너무 많이 애쓰고 살지 말자.... 싶더군요. 내가 어떻게 노력해도 내가 알 수 없는 사정과 상황으로 나는 어떤 그룹에서든 제외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내 할 도리와 노력의 범위와 애씀의 정도가 조절이 됩니다.


지난 토요일에 골절수술을 하였으니 오늘은 6일이 지난날이군요. 다행히도 손가락은 쥐었다 펼 수가 있고 혼자 왼손으로 세수도 할 수 있고 한 손으로 바지도 입고 옷도 갈아입습니다. 방학을 맞은 딸은 외출하였고 남편은 휴가를 끝내고 출근을 하였습니다. 혼자서 병뚜껑을 열수없는 불편 말고는 꽤 나쁘지않게 손목이 나아지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오늘은 처음으로 손깍지를 껴봤습니다. 왼손이 아픈 오른손을 위로해주는거같은 형상으로 왼손은 꽉 껴안고 오른손의 자세는 엉거주춤합니다. 이것만으로도 사고 6일만의 상황이 나쁘지않다고 안위해봅니다.


나는 고작 오른손이 잠시 (회복가능한) 불편으로 이렇게 마음이 잠시 아득하였는데 아빠는 어쩌고계시나 싶은 생각을 오늘 오랜만에 해봤습니다. 제외된이후로 그리고 마지막 조정법원에서 그들이 나에게 아빠를 마지막으로 보여주는거조차도 거부한 이후로는 아빠의 생각을 하지 않았었습니다. 생각이나도 잘 모시겠다고 하고 모셔갔으니 ...하며 그들의 조치만 믿을뿐입니다.


13년만의 폭설이 내린, 지난 토요일 같이 눈이 내렸던 3년 전의 이맘때에 나의 시골집이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제 그 시골집은 내 손목에 남을 수술자국 처럼 심장에 흉터로만 확인이 가능합니다. 김장할때 심어둔 베란다의 튤립화분에서 양파싹같은 파란싹이 돋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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