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채를 정말 많이 좋아하셨어요.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뵈었던 날은 아빠의 형사합의금이 내 통장에 입금된 날이었습니다. 아빠의 심각한 교통사고만큼이나 합의절차가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정말 고통스럽고 또 고통스러웠습니다. 너무 피하고 싶었어요. 어디로 숨어버리고 싶었습니다. 왜냐면... 사고를 내신 분이 우리 아빠의 나이보다 더 연로하셨고 오래된 트럭을 몰고 계셨고 처음 만난 행색이 너무 남루하였으며 그분의 사정과 형편이 너무나도 훤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사고 피의자는 근로장려일을 하러 나오셨다가 오랜만에 장날에 큰맘 먹고 한약을 맞추러 나갔던 아빠를 트럭으로 치게 되었던 사고였습니다. 왜 하필이면 근로장려일을 하셔야 하는 노쇠한 그것도 형편도 어려운 노인과 내가 이 합의를 해야 하는지...
아빠는 왼쪽뇌가 함몰되어 반신불구가 확실한 상황이었고 의식은 어느 정도의 연령으로 회복이 될지 재활은 가능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 아빠의 장기적인 병간호를 위해서는 형사합의금을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했습니다.
차라리 그분들이 뻔뻔하였다면 내 마음이 좀 더 가벼워졌을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들의 형편을 헤아리지 않아도 되니 그 편이 차라리 낫겠다 싶기도 하였으나 고개를 주억거리며 힘아리 없이 앉아있는 노인을 상대로 아빠의 병간호를 해야 하니 수천만 원대의 합의금을 달라하는 게 얼마나 어려웠을지... 그런 상황은 아무도 헤아려주지 않았어요. 장녀인 내가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분에게 그 어려운 돈을 받아 들고 돌아서면서 세상에.. 왜... 이런 일이 생겨서 형편 어려운 노인에게서 이런 거금을 받아내야 하는지 미치겠더라고요. 그날 그분은 근로장려일을 하러 나오면서 다른 길로 가셨다면... 아빠는 장날에 한약을 맞추러 나가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만 수십, 수백 번을 하며 서울집으로 돌아왔었습니다.
4,300만 원. 그 돈이 그분이 최선으로 만들 수 있는 금액이었고 저는 형제들에게 그 금액으로 합의를 해야 했다고 알리고 형제들을 우리 집으로 불러모았습니다. 그날은 할머니도 같이 왔습니다. 돌아보면 그날, 할머니를 볼 수 있었고 하필이면 그날 할머니에게 잡채를 드실 수 있게 해 드린 게 너무 다행스러웠다고 생각합니다.
그 음식이 내가 살아생전 할머니에게 해 준 마지막 잡채였고 마지막 음식이 될 줄은 그때는 몰랐습니다. 정말 몰랐어요. 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할머니를 볼 수 있을 거란 생각, 그건 당연한 거였기에 그런 생각조차 안 해보고 살았었더라고요. (저는 이 사건 이후로 매일 보는 가족과의 하루를 매우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 돈을 나눠주지 말았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 네 명의 형제들은 아빠에게 평생 뭔가의 양육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아빠의 남은 여생을 넷이서 앞으로 헤쳐나갈 일이 아득하였으나 그래도 동생이 셋이나 있으니 그게 의지가 되더라고요. 남동생도 셋째 여동생도 아빠에게 설움이 많았으나 착한 형제들이라 아빠를 원망할 줄도 몰랐습니다.
막내인 넷째만이 유일하게 아빠의 양육과 보살핌으로 대학원까지 졸업하였답니다. 그때 나는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50만 원씩을 동생들의 통장에 입금해 주며 우리 집에서 밥을 해 먹이며 앞으로의 다짐을 그 들에게 정확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아빠가 얼마나 저런 상태로 누워 계셔야 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아빠가 돌아가실 때까지 아빠의 복지를 위해선 이 돈을 정말 피 같이 아껴 써야 해. 그런데 우리가 평생 아빠에게 뭘 받아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내가 아빠 합의금에서 너네들에게 50만 원씩을 주는 이유는 아빠가 주는 돈이라고 생각해 줘. 아빠가 주는 응원금이라고 생각하고 우리 남은 돈으로 아빠를 위해서 잘 사용해 보자. 앞으로의 일이 너무 힘들 텐데 그전에 아빠가 주는 응원금 받고 힘내보자."
옆에서 잡채를 드시던 할머니가 박수를 쳐주며 그런 말을 해줬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다행스러움과 안도가 느껴졌습니다.
"우리 큰 손지, 똑똑허다! 내가 인자 안심이 되는고만. 나도 돈을 보탤라니까 걱정들 말고 잉?"
그런 말씀을 하시는 할머니는 평생 자신의 속만 썩인 큰아들이어도 그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어미의 모습이었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위해 손주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앞으로의 각오를 다짐하는 자리가 그녀에겐 얼마나 다행스러운 모습이었을까요...
그렇게 헤어지고 다시는 할머니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가시는 길에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잡채를 담뿍 싸드린 것도 두고두고 잘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가시던 할머니의 표정은 밝았습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할머니의 모습입니다.
왼쪽 뇌가 뭉개지고 반신불수가 되어버린 아들을 걱정하는 어미의 모습으로 찾아왔다가 겨우 안도하며 떠나던 할머니의 모습, 그 미소. 또 보자고 가시던 할머니를 다시는 볼 수가 없을 줄 그때는 몰랐습니다.
하고많은 음식 중에 잡채를 제일 좋아하시던 할머니에게 나는 잡채 만드는 법을 배웠었습니다. 철사처럼 뻐싯거리는 잡채면을 찬물에 오래 담가서 부드럽게 한 연후에 고집이 풀어져서 부드러워진 당면을 찬물에서부터 데쳐내면 잡채를 무쳐놓은 연후에도 오래도록 불지 않고 탱글거렸거든요. 어디에서 요리를 배우신 분도 아닌 옛날분이 신식 잡채면을 동네의 젊은 새댁들보다도 잘 만지셨던 게 저는 자랑스러웠습니다. 음식에 솜씨가 좋으셨고 음식재료를 잘 다루셨고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그 솜씨로 손주들을 먹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직도 할머니의 방법으로 잡채면을 삶고 잡채를 무쳐냅니다. 그리고 잡채를 만들 때마다 할머니가 생각납니다. 할머니의 손에 잡채를 듬뿍 싸드린 일이... 오래도록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형제가 형제를 검찰에 고소를 할 줄은 몰랐고 그 일이 내게 일어날줄도 몰랐으나 그런 횡액이 나에게 일어난 연휴에도 나는 진심으로 할머니를 한 번도 원망한적이 없습니다. 할머니는 가슴아파하셨을거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저장된 할머니의 미소만 저장해두었습니다.
내가 해드린 마지막 잡채를 드시며 좋아하시던 모습만이 남아있습니다. 할머니는 잡채를 정말 많이 좋아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