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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꽃 Dec 26. 2023

01. 구근 심던 날,...

3일의 간격을 일부러 띄워 60킬로씩, 120킬로의 겨울김장을 마무리 지었던 날이었으니 피곤할 법도 했는데 전혀 몸이 지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지치지 않아서 몸도 지쳐 쓰러지지 않았던 날, 마음이 더 선명해지고 몸에 기운이 남아 있길래 그 기운도 모조리 뽑아내서 소진해버리고 싶었습니다. 너무 피곤할 때는 오히려 몸을 더 겹경사로 피곤하게 해주는 가학적인 취미가 또 발동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몸에 매질을 하며 수행을 하던 고대의 수도자 같은 마음이 들 던 날이었습니다.


베란다 한편의 창고에 넣어뒀던 튤립구근을 꺼냈습니다. 꽤 무거운 구근 전용토도 끙끙거리며 끄집어내었습니다. 흙이 20킬로가 넘에 들어가 있어서 꽤 무거웠으나 김장을 하며 절임배추 박스를 번쩍 들던 거보단 덜 무거워서 할 만했습니다.


빈 화분에 전용토를 깔고 작은 양파모종 같은 튤립의 구근을 적당한 간격으로 놓고 그 위에 살살 흙을 덮어주면 끝입니다.


겨우내 추위에 시달려야 하는 구근을 매년 김장이 끝나고 심는 일이 벌써 3년째가 되었더군요. 첫 해, 구근 심기를 하던 3년 전의 나는 억지로 겨울땅에 밀어 넣어지는 구근과 닮아있었습니다.

딸아이의 수능 한 달 전에 막내여동생과 친족들이 합세해서 나를 검찰에 형사고소를 했었거든요. 마땅히 장녀가 보관하고 관리하여야 할 아빠의 교통사고 합의금, 그 피 같은 돈을 내놓으라며 아빠의 이름으로 고소가 되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의 참혹한 형국은 알겠으나 내가 손을 쓸 수 있는 방도가 없었습니다. 시골에 혼자 살던 할머니도 막내여동생이 모시고 가서 전화조차도 연결이 되지 않았고 친족들과 남동생과 막내여동생은 내가 가지고 있는 형사합의금을 달라며 이번엔 민사로 나를 고소했습니다.


그 와중에 나는 무슨 정신으로 그 해의 겨울 김장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장을 했었습니다. 김장을 마무리하고 며칠 후 영혼이 반은 나간 거죽만 남은 육신이 맨발로 차가운 베란다 바닥 위에 망연자실, 창 밖을 보며 서 있다가 겨울눈이 내리길래 나도 모르는 마음으로 튤립구근을 심었었습니다.


인간에게 다친 마음을 돌려서 유일하게 식물에게 마음을 주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검찰의 무혐의를 통보받던 날에 화원으로 갔더니 눈발이 흩날리는 식물원의 구석에 처음 보는 구근더미가 있었습니다.

그때 처음 알았어요. 구근은 추운 날에 심어줘야 하고 추운 땅에서 견뎌야 하며 겨울이 추울수록 봄에 더 활짝 핀다는 사실을요.


그게 무척이나 맘에 들었나 봅니다. 그때는 그걸 인지하지 못하였는데 (구근이 나와 닮았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나를 닮은 구근을 사들고 집에 돌아왔던 일이 꽤 위안이 되었습니다. 흙을 뿌려 구근을 심은 직후엔 물을 흠뻑 주어 흙에 물의 기운을 맛보게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화분을 낑낑거리며 화장실로 안고 와서 물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놓고 겨우내 추운 동토에 시달리게 하면 튤립 구근이 알아서 굳건히 성장을 하더라고요.


물이 빠진 토분을 다시 차디찬 베란다에 내려놓고는 좀 실망했습니다. 이제는 좀 지쳐서 잠이라도 한숨 자주면 좋으련만 이맘때의 나는 그 해 겨울의 '기운'을 꼭 기억해 내고 한참씩 마음이 아득해지곤 합니다.

절망의 쓴맛은 많이 빠지고 탈색되었고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의 마음이 더 큽니다만, 그 들을 추억해 내고 그 시간을 복기합니다. 하나마나한 생각입니다.


아빠는... 할머니는... 어찌하고 계시는가의 질문, 하지만 이젠 묻지 않기로 하였고 물을 수 없는 질문. 나와 내동생들이 어찌하여 이런 참극을 마주해야했는가의 질문들.


답 없는 생각을 그분들과의 한때의 좋았던 추억으로 덮어보기도 합니다. 동생들과 합심하여 두 분을 모시고 일본을 여행하였던 일, 할머니의 집에서 김장을 하던 날의 풍경, 나에게 생강 할 톨이라도 더 싸 보내려 애쓰던 늙은 할머니의 굽은 허리.


그런 생각들이 두서없이 내 머릿속에 들락날락하며 종일 노동에 충분히 지쳤음에도 육신이 잠들지 못하게 하던 날이었습니다. 잠들지 못해 할 수 없이 대바늘을 꺼내 머플러를 짜기 시작했습니다. 실과 바늘의 움직이는 손끝을 보면 생각을 멈출 수가 있거든요. 그때... 연락을 안 하던 (아니.. 못하던) 남동생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잠시 불길한 예감이 스쳤으나 닥친일이니 받았습니다.


"누나... 할머니... 돌아가셨어..."


그 말을 들은 나는 꽤 많이 침착하고 담담했습니다. 20년 장기복역수가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은 기분으로 담담했습니다.


"고통 없이 편안히 가셨니...?"


그것만 궁금했습니다. 할머니의 너무도 고생스러웠던 마지막 3년의 시간이 나 만큼이나 그분에게도 절망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나를 보고 싶어 하셨을 텐데 부르지 않은 그 들에게 화가 날 법도 하였으나 내 맘엔 이미 그런 분노도 시커멓게 연소되어 재도 남아있지 않았는지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것만 오로지 궁금했고 남동생의 말에 안심했습니다. 고통 없이 돌아가시는 건 할머니의 오랜 기도제목이었으니까요. 그 소원을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꼭 들어주셨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나는... 누나는... 그냥 있어..."


남동생의 말에 알았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게 남동생이 나를 위한 마지막 배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냥 있어... 그냥 있어...


구근을 심는 날은 늘 이런 식입니다. 슬픔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구근을 차가운 땅에 파 묻었던 날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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