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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꽃 Jan 18. 2024

04. 한겨울에 움튼 파란 싹을 보며 버티던 시기

민사재판의 마지막 조정기일이 다가올수록 초조했습니다. 죄지은게 없으나 송사로 생각지도 않은 법원을 갈 일이 긴장이 되지 않을 강심장은 아니었거든요. 초조할 때마다 마음이 아득히 내려앉을 때마다 추운 베란다에 나와 튤립싹이 돋는 걸 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추위를 잘도 견뎌내고 통통한 푸른 싹을 움트는 녀석들. 마음을 단단히 웅크려 모아보려 애를 썼습니다. 변호사는 선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변론서를 작성할 때는 내가 작성한  초안을 남편의 절친인 친구변호사님에게 검토를 부탁드렸고 법원의 언어로 잘 바꿔 주셔서 감사했어요. 너무도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싸우지 않기로 하였고 나의 모든 권리, 그러니까 아빠의 장녀로 태어나 이제까지 져왔던 장녀의 멍에를 건네주고 내가 잠시 보관하던 형사합의금도 주고 오면 끝이었으나 법원 가는 길은 결코 쉽지가 않았어요.


마른침을 삼키며 조정법원에 들어갔고 막냇동생과 막내삼촌이 선임한 변호사가 두 명이나 앉아있는 걸 확인하고 그냥 쓴웃음만 나왔던 거 같아요. 나를 엄청 대단하게 생각하고 나와 잘 싸우려 대비를 열심히 했던 모양새였으니까요. 담당 판사님도 놀랄 정도로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돈을 돌려줄 기일을 정하면서 제가 마지막 부탁을 했습니다.


“판사님, 형제를 고소하고 부모의 이름으로 자녀를 고소하는 일은 혈연의 관계를 끊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서 가슴이 매우 아프나 마지막으로 아빠의 현재모습을 멀리 서라도 마지막으로 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그 부분에서 의견이 팽팽해지고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진짜 아빠가 의식이 있어서 나를 고소한 것인지의 여부는 이번 재판에 꽤 중요한 변수였거든요. 의식이 없는 채로 재판을 시작한 거였으면 저들에게 불리한 조건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그걸 가리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난 그들과 싸움을 원점으로 돌리고 싶어 한 부탁이 아니었고 진심으로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어서였거든요.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판사님이 그리 조정문에 내용을 수정하여 넣었습니다.


“장녀의 가슴에 한이 남지 않도록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시되, 그 부탁이 이행된 후 돈이 입금되는 걸로 하겠습니다. 장기적인 면접교섭권을 바라는 게 아니고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다잖아요”


상대측의 난감한 표정들... 그러나 거기에 제가 말을 붙였습니다.


“싸움을 연장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정말로 이젠 장례식도 갈 수 없는 관계의 단절이니 먼발치에서라도 그냥 한 번만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봄은 시작되고 있었으나 겨울의 냉기가 남아있던 어느 날에 상대측 변호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나의 존재가 뭐가 그리 고심이 되었는지 나의 진의가 얼마나 파악이 안 되었던 건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아빠를 볼 수는 있으나 상대측의 변호사사무실에서만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그 소리를 듣는데 내 안에 남아있던 마지막 한계점이 걷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게 무슨 소용일까, 나는 그냥 나의 아버지를 보고 싶은 거뿐이었는데 그것마저도 변호사 사무실에서 굳이 변호사를 앞에 대동시키고 해야 하는 행위였던가 싶었습니다.


잠시 생각해 보겠다 하고 대답해 두고 평소엔 한 번도 오르지 않았던 뒷산엘 올랐습니다. 송사가 시작된 고난 이후로 이 얘기를 사람과 나누는 게 얼마나 부질없었는지를 알아버렸습니다. 다들 대게가 비슷한 답변들이었습니다. 자신들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엿보이는 위선적인 위로들. 동생들에게 얼마나 인심을 잃었기에 그런 흉사가 생기냐는 한심한 눈초리. 기가 막힌 심정을  하소연하는 걸 멈췄고  너무도 우연히 뒷산에 발걸음이 향했던 건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한 내 본능이 시켰던 일 같습니다.


그날, 산길에서 헤매면서 억울한 통곡을 푹푹 울고 나서 돈을 전부 이체해 주고 전화를 했습니다.


“입금해 드렸습니다. 아빠... 그냥 안 보려고요. 이걸로 됐습니다.”


난 아빠와 마지막 인사도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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