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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꽃 Apr 07. 2020

할머니의 언니

할머니에게도 언니가 있습니다. 남양주에 사시는 언니를 보고 싶어 하셔서 갔던 날이었습니다. 컴컴하게 불도 켜지 않은 방에 티브이도 틀어놓지 않고 백발의 노인이 침대에 숨만 쉬고 누워 있었습니다. 그날의 정경을... 두 노인의 대화를 기록해 두었던 내용을 드라마 대본의 한 장면으로 구성해 봤습니다.


S# 1.  남양주의 아파트 (낮)


넓은 실내의 복도 끝에 위치한 방문을 열고 들어서면 침대에 노인이 누워 있다. 티브이도 켜지 않은 채 어느 곳을 바라보는지 초점이 희미하다. 인기척이 들려도 돌아보지 않는 노인을 향해 할머니가 다가가서 손을 덥석 잡는다.

언니   (깜짝 놀라며, 울 듯한 목소리) 아이고

          동상 올 줄 맘에도 안먹었는디! 이게 무슨 일

          이여?


동생    (언니 손을 꽉 잡은 채로) 나야 손지들이 데리

           고 다닝께 이렇게 한 번씩 오지  나 혼자 오것

           어? 옆집이 순 동리 덕도 아직 건강혀서 마실

           도하고 다니는 고만, 언니는 맨날 방에만 있

           는가.

언니 엄마야, 순 동리 덕이 살았어?

동생 언니보다 한살이 더 적어. 아직도 청소랑도

              하고 살고 건강 혀. 언니는 검은 머리가 더

              생겼네.


언니 아고 동상은 그려도 쩡쩡 허네...

동생 내가 쩡쩡해야 자식들이 안 귀찮어

언니      세상에 동상 올지 누가 알았어. (흐느낀다)

동생 언니가 내년에 백 한살이여! 그건 알어 ? 언

             니가 핸드폰이라도 있으문 내가 언니 안 심

             심허게 전화라도 헐틴디. 정자가 핸드폰 안      

             만들어줄란가 ?핸드폰 요금 내가 내줄 판인

             디. 그것 좀 만들어주면 좋겄고만.

언니 나는 이제 먹고 싶은 것도 없네.

동생 언니가 그려서 오래 사는가 보네, 암 것이나

              막 먹고살아야 빨리 죽지. 이거는 돈 조금밖

              에 안됭게 넣어놨다가 정자 한티 고기도 사

              달라 그러고 헐 때 돈 주면서 사달라고 혀.

언니 나는 먹고 싶은 것도 없네. 이런 사람 누가

              어딜 데꼬 다니길 허겠나 뭘허겄나.

동생 내가 명년에나 살아있으믄 한번 더 올게, 이

              렇게 보고만 가도 괜찮여! 이렇게 봤은께!

언니 나는 안 본 것만 못 허네...(눈물짓고) 너무

              서운허네, 자고 가믄 안되고?

동생 야네들 귀찮여, 나 데리고 또 오가고 혀야잖

              여... 아이고 눈물이 자꾸 나서 죽겄네.

언니 (동생 몸을 자꾸 쓰다듬으며) 이쟈는 못 볼

              줄 알았는디 봐서 좋고만.

동생      언니, 석골 덕은 치매가 왔어... 맨날 헛소리

              허네. 언니는 치매 오면 안되여. 자식들이

              바로 요양원 보내버릴거여. 그니까 치매 줄

              은 잘 잡고 있으소.나는 이제 가야 겄네, 방

              이 손시라 죽겄네. 우리가 천덕꾸러기라 이

              렇게 오래 사네. 언니, 내가 명년에 언니  살

              아있으믄 또 보러올랑게 서운해 마소. 살아

              있어도 보러 오고 죽어도 보러올랑께. 죽었

            으믄 이제 눈치 그만보고 살아도 됭께 그것

            도좋은 일이니께 내가 울어주러 올 것이여,

            잘  있으소.


동생을 다시 볼 줄 몰랐다며 갈퀴 같은 손으로 할머니 몸을 자꾸 쓰다듬으시는 이모할머니를 뒤로하고 모시고 갔던 길을 되밟아 돌아왔었습니다.
두 노인이 호호백발이 되어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만날 수도 없는 상황을 원망도 하지 않은 채 헤어지는 모습이 옆에서 보고 있기만 해도 눈물이 절로 났었습니다.

할머니의 마지막 말이 너무 슬펐습니다.  살아있어도 보러 오고 죽어도 보러 오련다는 할머니는 올해도 백 한 살의 언니의 안부가 늘 궁금합니다.

할머니에게도 언니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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