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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꽃 Apr 12. 2020

아빠도 종종 그랬던 기억이 난다.

느지막이 잠자리에 들었는데 잠이 오질 않았다. 잠이 올 거 같지가 않아 조용히 이불 들추고 거실로 나왔다. 아빠도 종종 이랬던 기억이 난다. 식구들 다 잠이 들어 고요한 새벽녘에 혼자 잠이 들지 못하고 마당 한구석에 위치한 아빠의 작업실로 들어가 연장들을 정리하곤 하셨었다.

나의 작업실, 부엌으로 나오니 가지런히 씻어 엎어놓은 명이나물이 통에 한가득 싱싱하게 부풀어 누워있다. 간장을 끓이기 시작했다. 식초와 설탕과 물을 비율대로 섞어 한번 끓으면 다시마 몇 조각을 던져놓고 간장이 식기를 기다려본다.


잠결에 인기척이 들려 실눈을 뜨고 방문을 열어보면 연장들을 가지런히 정리하며 간간히 나직한 음성으로 한탄스러운 한숨을 내쉬는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원래의 갈 곳을 잃어버린 아빠의 연장들은 임시로 만들어진 마당 한쪽의 선반들 위에 기름칠이 다시 칠해져 칸칸이 놓이고 있었다. 십수 년을 일궈온 공업사를 잃어버린 아빠는 한스러워했다. 가슴에 쌓인 한을 내보내려 무거운 연장들을 선반에 놓으며 긴 숨을 쉬곤 했었다. “후..... 썩을 놈의 새끼들...”

가슴에서 밀어낸 깊은숨을 쉬고 또다시 선반을 정리하는 일을 다시 하셨다. 아빠는 그 연장들을 귀히 여기셨다. 아빠의 연장 가방에 놓인 물건들 중 에서 제일 신기했던 게 수평을 맞춰주는 수평자와 먹줄이었던 걸로 기억이 난다.

먹줄을 이용해 나무의 수평을 맞추고 재단을 하던 신중하고 집중된 직업인의 얼굴. 그 얼굴을 공업사가 없어진 그 이후론 다시는 보질 못했다.


아빠가 술을 드시기 시작했다. 동네 상도 아버지랑 죽이 맞는 술친구였는데 할머니 심부름으로 점방에 가서 아빠를 불러오는 일이 제일 싫었었다.

얼굴이 불콰하게 술에 익어 지나가는 행인들까지 호탕한 웃음으로 허허실실 거리며 잡아당겨 술을 사주는 아빠는 더 이상 먹줄을 잡고 나무를 재단하고 탈곡기를 만들던 그런 아빠가 아니었다.


어느 날은 저녁 늦게까지 술을 드시고는 집에 들어와 자고 있는 동생들과 나를 모두 깨워 마루에 쪼르르 앉혀놓고는 책가방 검사를 하신 적이 있다. 숙제는 했는지 공부는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점검하시더니 나에게 물어보셨다.

“네가 한번 말해봐라, 그려. 니가 질루 큰 놈잉께. 니가 질로 똑똑혀야헌께. 자, 앞으로 엄마 없는 집을 어뜩히 꾸려가야 헐 것인가 의논을 한번 해봐야쓰겄다.”

졸려서 눈을 비비며 아빠가 물어보는 말에 그래도 성의 있게 대답을 하려 애를 썼던 거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른들은 종종 내가 9살밖에 안 먹은 어린아이란 걸 잊어버리곤 하셨던 거 같다. 제일 큰 놈이니까 니가 똑똑해야 우리 집이 너의 동생들이 잘 헤쳐나갈 거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간장이 식었다. 다시마를 건져내고 매실액을 두 컵 부어준다. 장아찌용 간장을 끓일 때 매실액은 같이 끓이면 안 된다. 매실 안의 좋은 효소가 뜨거움에 놀라 다 사라지니 간장이 다 식기를 기다렸다가 부어줘야 맛이 좋다.

부풀어 오른 명이를 왼손으로 누르고 그 위에 살살 간장을 부어줬다. 옛날 사람들은 누름돌로 눌러줬겠지만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장아찌용 밀폐용기가 아주 유용하게 쓰인다.

밀폐용기 뚜껑을 아래로 누질러 명이나물의 공기를 빼 주고 새벽 공기가 가득한 베란다에 내어 놓았다.


새벽에 명이 장아찌를 만들어 놓으며 그 새벽에 깨어 연장들을 손질하고 작업장을 비질하던 아빠의 모습이 선연히 떠오른다. 낮에 동생에게 전화를 넣어볼까 싶었다가 하지 않았다. 중환자실에 계시는 아빠의 안부가 궁금하지만 큰일이 나지 않았으니 전화가 없는 것일 게다. 부모가 아플 때 제일 힘든 자식은 제일 가깝게 사는 자식이다.


명이나물 사이사이로 간장이 심심하게 배어들기 시작하는지 숨이 죽기 시작한다. 반나절이 더 지나면 숨이 모두 죽어 홀쭉해질 것이다. 이대로 일주일이면 먹기 좋은 명이나물 장아찌가 완성이 된다. 2주 후면 아빠도 중환자실에서 나와 일반병실로 옮기실지 모른다 했다. 시간이 지나길 기다려본다.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 것이다. 고르게 숨을 쉬며 자고 있는 남편 옆에 누워 잠을 청해 봐야겠다. 아빠는 그 새벽, 자신을 붙들어줄 한 사람이 없었다. 외롭고 한스러운 시간을 이겨보려 새벽에 잠 못 들고 나와 연장들을 만지던 그 모습이 생각이 나서 잠이 오질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실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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