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종이꽃 May 08. 2020

막둥이 삼촌, 종로, 패왕별희의 추억

<잠깐 영화 보고 갈래>



겨울이었고 종로에 위치한 극장이었습니다. 막둥이 삼촌과 패왕별희를 봤었습니다. 내가 스무 살이었고 막둥이 삼촌은 서른이었습니다. 할머니가 마흔이 넘어 낳은 늦둥이 었고 할머니의 자식들 중에서 제일 인물도 좋고 머리도 좋았습니다. 늘 맘을 아프게 하는 자식이라 할머니가 막내 삼촌을 부르는 호칭은 ‘ 우리 막둥이’였습니다. 스무 살의 그때의 나는 초한지도 읽어보지 않았었고 유방과 황우의 싸움도 몰랐고 황우와 우희의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에 대한 지식도 없었습니다.

장국영의 애절한 음색만 가득했던 너무 낯선 경극으로 인식이 되었고 두지와 시투의 사연을 쫒아가느라 분주해서 그들의 감정에도 깊숙이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그 둘의 사연보다 그때 당시엔 막내 삼촌의 가슴 아픈 결혼 생활에 더 신경이 쓰였습니다. 어디에 내놔도 귀공자 같이 준수했던 삼촌은 내가 그때 한참 읽고 있던 삼국지의 유비를 닮았을 거 같았습니다. 인자한 미소를 잃지 않고 참을성도 많았으며 공부도 잘했고 착했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고등학교도 못 들어갈뻔한 삼촌을 구제해준 건 중학교 3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셨습니다.

할머니가 학교의 호출을 받고 평소엔 잘 신지 않던 하얀 고무신을 꺼내 신고 비에 젖어 질척이던 신작로를 걸어 선생님을 만나 뵙고 와서는 한참을 낙담해하셨습니다.
때아닌 한복까지 꺼내 입고 읍내를 나갔다 온 할머니의 사정이 궁금해서 옆집 순동리댁 할머니가 놀러 오시고 나서야 나는 할머니의 사정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 막둥이가 공부를 잘혀서 전주에 있는 고등학교엘 합격을 혔다는고만요. 보청기를 끼고도 귀가 잘 안 들렸을 판인디 공부를 잘한다고 선상이 그렇게 칭찬을 험서 꼭 좀 학교 좀 보내라고 허는디...”

장에 나가서 나물 팔 재주도 없으신 걸 한탄하시던 할머니는 그 후 어찌어찌 돈을 꾸고 들일을 해서 품삯을 받아 전주로 유학을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검산리 부락에서는 처음 있는 전주 유학생이었던지라 동네의 자랑이었습니다. 3년을 어렵게 가르켰으나 대학은 정말 보낼 형편이 안되자 삼촌은 큰삼촌이 일하는 서울의 신발공장에 취직을 하러 상경을 했습니다. 삼촌이 가던 날, 삼촌이 떠나는 게 슬펐던 저는 뒤뜰에 세워 놓은 리어카 속에 숨어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그렇게 공장으로 떠나보내기엔 너무 아까운 삼촌이었고 이별하는 게 싫었나 봅니다. 숨어있던 나를 찾아내서 삼촌이 만원 한 장을 건네줬습니다.

“ 꼭 참고서 사서 공부해라”

고개를 푹 수그리고 발 끝으로 애꿎은 땅을 후비며 그 돈을 마지못해 받았습니다. 할머니가 그 돈을 어떻게 마련했는지 알았거든요. 그렇게 여비도 넉넉하지 못하게 유비를 닮았던 귀골의 삼촌이 떠나던 날, 할머니는 떠나는 기차 꼬리가 사라질 때까지 다리에 서 계셨습니다. 신발공장에서도 공부를 놓지 않았던 삼촌은 그 이후 보일러 관련 자격증을  여러 개 취득해서 불광동 어딘가의 목욕탕에 기관장으로 취직을 합니다. 그것이 밑천이 일원도 없었던 삼촌이 서울생활 십 년 만에 이뤄낼 수 있었던 최고의 신분 상승이었습니다. 시골을 떠난 뒤 매달 할머니에게 생활비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던 성실한 삼촌이 드디어 서른 즈음에 결혼을 했습니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자신의 결점에 걸맞은 처녀라며 자신과 똑같은 처지의 귀머거리 처녀를 데려오자 할머니는 며칠을 우셨습니다. 제발 그 결혼만은 말리려고 노력하였던 할머니의 소원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했던 삼촌이 식을 올린 지 한 달 만에 작은 엄마가 뇌종양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자 할머니는 또 며칠을 서럽게 우셨습니다. 그렇게 이쁘고 공부 잘하고 아까운 내 자식의 인생이 그리 잘 풀리지 않는 탓이 모두 자신의 탓인 양 눈물이 마르지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병원에 입원한 각시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그해의 겨울, 종로에서 저와 함께 본 패왕별희를 보고 삼촌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그때는 헤아리지 못했는데 오늘 <패왕별희 더 오리지널>을 보면서 그 생각이 났습니다.

어릴 때 육손이었던 두지(장국영)를 홍등가의 여인이던 엄마가 경극을 배우는 연극단에 맡기러 가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됩니다. 육손이는 경극배우가 될 수 없다는 반대에 두지의 엄마는 절규합니다.

“더 이상은 남자아이를 홍등가에서 키울 수가 없단 말이에요!”

그 길로 아이를 안고 대문 밖을 나섰던 엄마가 길목에 놓여있던 식칼로 아들의 손가락 하나를 비정하게 자릅니다. 피가 뚝뚝 흐르는 아들에게 자신의 외투를 마지막으로 벗어 준 후 사라져 버립니다. 그런 두지를 시투가 보호해줍니다. 시투도 부모에게 버림받아 연극단으로 흘러왔을까요? 서로의 처지를 이해해주고 보호해주며 성장을 하게 되고 성인이 된 두 사람은 유명한 경극 배우가 되는데 성공을 합니다.

유방에게 밀려 마지막 결전을 치르기 전 날 황우의 앞 날에 방해가 되는 게 싫어 황우의 애첩 우희가 마지막 술잔을 올리고 자결을 하는 경극의 애절함도 스무 살엔 이해를 하지 못했는데 오늘은 어찌나 가슴이 절절하게 에이던지 예전의 감상과는 확연히 다르게 느껴지더군요.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 여겨 할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했던 삼촌의 러브스토리는 다행히도 슬프지는 않습니다. 삼촌의 애절한 사랑이 통했던지 암세포를 이겨내고 작은 엄마의 투병은 성공했고 아들 둘을
건강히 낳아 지금은 그 두 아들이 모두 대학생이랍니다. 지금도 여전히 하루를 살아내기가 팍팍하지만 우희와 황우처럼 두지와 시투처럼 슬픈 엔딩이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마지막 장면, 문화혁명의 대 혼란으로 서로에게 극심한 상처를 준 두지와 시투의 슬픈 엔딩이 끝나고 가슴이 에려와 자리에서 쉽게 일어나질 못했습니다. 작약같이 이쁘던 젊은 시절의 공리를 다시 보게 된 것도 반가웠습니다. 늘 거친 일을 하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던 막내 삼촌에게 패왕별희의 재상영을 알려줄까요? 삼촌이 여름휴가 때마다 들고 와서 읽었던 책들의 제목들을 다 기억합니다.

짜라투스투는 이렇게 말했다,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화두... 그  어려운 책들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삼촌의 청년기를  다시 상기시켜 주었던 <패왕별희- 더 오리지널>을 너무 재밌게 감상하고 왔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권하고 싶습니다. 두 사람의 슬픈 사랑이야기에 취해 숨겨진 사연들이, 사랑의 역사가 다시 되새김질하게 될 영화입니다.


ps. 글을 성급하게 올리느라 두지(장국영), 시투(장풍의)의 이름을 데이와 샬루라고 적었다가 뒤늦게 수정했습니다.

      데이(장국영), 샬로(장풍의)는 성인이 된 후의 이름입니다.

      어릴 때의 이름과 성인이 된 후의 이름이 다르게 불려지는 이유는 아직 제가 알지 못했습니다.

그 점을 알게 되면 내용을 기술해두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아... 들기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