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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꽃 May 14. 2020

그놈의 파김치

연례행사였다. 춘삼월 꽃샘추위에 쪽파 뿌리가 영글어 갈 무렵이면 할머니는 어김없이 그놈의 파김치를 담아 전국 팔도에 흩어진 자식들에게 보내셨다.

아흔일곱의 나이를 굳이 두 살 어리게 속여 말하는 거짓말을 잘 못하는 할머니는 아직도 자신의 육신이 리어카에 실은 쪽파 더미에도 지치지 않으실 거라 생각하셨나 보다. 나에게도 파김치가 도착을 했다. 그런데 작년과는 다르게 양념 따로, 다듬은 쪽파 따로, 찹쌀풀 따로인 채로 파김치 셀프 박스였다.


아마도 나와의 실랑이 속에서 할머니가 내린 타협이었을 것이다.


“정은이냐? 옆집이서 밭에 심은 쪽파를 나 먹으라고 실어가라고 혀서 니 아빠랑 실코 왔더니 허리가 뽀사질라고 헌다. 근디 파가 맵지도 않고 맛나다잉.  용관이 삼춘이야, 막둥이 삼촌 꺼도 창우랑 정하 꺼도 보냈다이. 지연이는 가져가라고 혔더니 알았다고 허고는 오지도 않는다. 니꺼 담을라고 혔더니 고모가 하도 어깨가 시리다고 지랄을 혀서 내가 니꺼 까지는 못 버무리고 그냥 다듬은 걸로 보냈응께 니가 솜씨 좋으니께 잘 버무려 먹어라잉?”


핸드폰 단축키에 저장된 3번이 나라는 걸 아시면서도 전화를 받으면 늘 정은이냐고 되물으셨다. 아마도 할머니의 극성스러운 성화에 못 이겨 어깨가 일 년 내내 시리고 아픈 고모가 또 같이 고생을 한 모양이었다.

쪽파를 보내줄까 보다는 할머니의 전화에 냉큼 무 자르듯 거절을 했더니 할머니는 그 서운함을 무릅쓰고 쪽파 한 상자를 일일이 다듬어 기어코 택배로 보내는 일을 거행하셨다. 택배를 받고 나서 아연실색했다. 이렇게 많을 거라곤 상상을 못 했는데 많아도 너무 많았다. 꾹꾹 눌러 담은 쪽파들이 상자를 열자 꾸역꾸역 상자 밖으로 비어져 나왔다.

하룻밤 택배로 보내지는 사이, 고목나무 껍질 같은 엄지손톱으로 벗겨내었을 쪽파의 끝이 다 시들어 거뭇거뭇했다. 남이 보태주지 않아도 늘 일이 많은 나에게 쪽파 한 상자는 재앙이었고 일의 쓰나미였다.

짜증이 목 끝까지 차서 이걸 당장 음식물 쓰레기 더미에 버리려 씩씩거리며 소쿠리에 담고 있는데 쪽파 더미 밑에 비닐로 두 겹 싸인 양념 더미와 찹쌀풀 더미를 발견하고서 잠시 멍해져 분주하던 손길을 멈춰야 했다.

김치 잘 담아먹는 나에게까지 굳이 보내느라 눈치를 받으며 양념과 찹쌀풀을 고모 몰래 쪽파 더미 밑에 숨겨 놓았을 할머니의 얼굴이 칼라의 색채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쪽파를 버리면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내가 살아있을 동안에도 봄만 되면 내가 버린 쪽파들의 혼령이 나를 괴롭힐 거 같았다.

얼마나 또 후회를 하며 가슴을 치며 울어댈 것인가. 할머니 내가 그때 그 쪽파를 다 버렸다니까... 하면서 말이다.


종일 고객에게 보낼 음식을 만들어 그야말로 파김치가 되어 있던 육신에 힘이 뽀작뽀작 들어가기 시작했다. 절대로 버리지 말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귀찮음은 이미 멀리 날려 보내고 상한 쪽파를 한 줄 한 줄 다시 다듬기 시작했다.

김장할 때가 아니면 꺼내지 않는 큰 함지박을 두 개나 꺼내서 다듬은 쪽파를 나누어 담고 할머니가 고모의 눈을 피해 몰래 숨겨 보낸 양념을 꺼내 버무리기 시작했다.

양념 봉지를 뜯자마자 귀찮음을 참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흉내 낼 수 없는 양념의 조합이었다. 적당히 단 듯하면서도 매콤했고 젓갈의 풍미가 비리지 않게 살아있었다. 찹쌀풀 봉지를 뜯어 양념을 섞으면서 할머니의 지혜에도 감탄했다. 찹쌀풀과 양념을 섞어 보내면 발효가 되기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부엌 바닥에 신문지를 넉넉히 깔고 시작한 파김치 담그는 작업이 두 시간 만에 끝이 났다. 일을 다 끝내고 허리를 펴니 허리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방문을 열고 딸아이가 나와 파김치 하나를 맨손으로 집어 먹었다.


“와! 엄마! 이거 대박! 울면서 파김치 담길 잘했다 싶은데?”


파김치를 김치냉장고에 두통 가득 담아 집어넣으며 김치를 나눠먹을 사람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주고 싶은 사람들, 먹이고 싶은 사람들이 나에게도 있다.

나는 피가 썩이지 않는 남에게도 파김치를 나누지 못해 안달이었다. 자신의 거미줄에서 태어나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아가느라 애쓰는 자식들에게 먹이고 싶은 할머니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싶었다.


파김치가 맛있게 익어가던 일주일 후,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남동생은 화가 났다.


“그놈의 파김치 뭣허러 담어가지고 또 아프신 거야?”


머리가 하얗게 파뿌리처럼 쇠어버린 할머니가 쪽파가 한수레 가득 실린 리어카 뒤에서 마지막 있는 힘까지 용을 써가며 수레를 미는 모습이 본 듯이 떠오른다.

너무 가난해서 먹일 게 없었다고 자주 한탄하시는 할머니는 잘못 알고 계신 게 있다. 돈이 없어 사 먹이지 못한 고기보다 더 귀한 할머니의 온몸에서 뿜어내는 사랑을 우리는 넘치게 받아먹고 컸다는 걸.


내년 봄엔 이제는 진짜로 할머니가 담아주는 초봄의 쪽파김치는 맛보지 못할 것이다. 파김치는 11월 가을보다 초봄의 쪽파가 더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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