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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꽃 Jul 06. 2020

합의 1

마이너스 통장 한도 좀 늘려놔.

새벽에 또 잠이 깨버렸습니다. 왼쪽 종아리가 뭉쳐서 쥐가 나려고 하는 걸 제 무의식이 몸을 일으켜 깨우더라고요. 얼른 몸을 일으켜 뻣뻣하게 굳으려는 종아리의 근육을 잡아 늘리며 주물러줬습니다. 한참 그러고 났더니 이번엔 오른쪽 어깨가 찌릿찌릿 거리며 대바늘로 쿡쿡 쑤시듯 통증이 시작이 됩니다.

냉장고 옆에 자석으로 눌러놓은 지퍼백에 넣어진 약을 하나 꺼내 먹고는 안방으로 다시 자러 들어가지 않고 노트북을 켜서 대본을 수정하기 시작했습니다.

4월 초에 좀 괜찮아진 어깨의 오십견이 다시 말썽이라 어깨가 아플 땐 누워봐야 잠이 다시 들 리가 없거든요.

이럴 땐 그냥 노트북 열고 대본 수정하고 연수반에 제출할 숙제 하는 게 최고의 시간 활용입니다.


날이 밝아 출근하려는 남편에게 아침부터 미안한 소리였지만 마이너스 통장 한도를 좀 늘려달라 했습니다. 종아리는 자꾸 뭉치고 어깨는 뜨거운 염증이 괴롭히고 있어서 한 일주일 저에게 시간을 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이렇게 어깨 좀 쑤시고 종아리 좀 뭉치는 거 가지고 엄살 부릴 때가 아니라고 제가 저를 채근하기도 했습니다. 아빠는 몸의 절반이 침묵에 잠겨 자물쇠가 채워져 버렸는데 성한 반쪽으로 움직이지 않는 반쪽을 일으키려 매일 절망적인 신음을 내고 있는데...네가 지금 이런 걸로 아파서 쉬고 싶어 할 때냐 싶기도 했습니다.


교통사고 가해자 측과 형사합의가 오늘 끝이 났습니다. 돈을 받아 들고 합의서에 도장을 찍어주고 온 동생이 전화를 했습니다.


“ 언니야, 할아버지 입성이 하도 그래서 내가 할머니는 계시죠? 하고 물어봤잖아. 그랬더니 할머니도 낼모레 돌아가시게 생겼다고 그러더라니까.

아들 하나 있는 건 몇 년 전에 사업한다고 사고를 쳐서 없는 살림 더 박살내고 이번 합의금도 여기저기 다 빌려온 모양이야.

밭 한 뙈기 있는 거 푸성귀나 심어먹으려던 그 손바닥 만한 거도 헐값에 판 모양이더라. 이 정도로 합의 봐준 게 우리한테도 나은 거야.”


2주 전에 처음 합의를 보러 갔을 때 가해자 측이라고 나온 운전자 할아버지의 아들이 저에게 그랬었습니다. 첫인사로는 그게 참, 저에겐 너무 기가 막힌 인사였습니다.

“내 아들도 2년 전에 교통사고가 났었는데 2년 동안 가해자 측이 한 번도 합의 보러 온 적도 없습디다. “


그 말에 제가 너무 화가 나서 울분을 토했었습니다.


“저희 아빠는 멀쩡하시던 분이 이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왼쪽 몸이 마비가 되셨다고요. 이게 합의금 들이민다고 될 일이 아니라고요!”


서로의 말과 생각이 엇갈려 사나워졌던 시간 뒤로 밤마다 종아리 근육은 뒤틀리고 목울대에 울음이 가득 찬 채로 지내야 했습니다.

매월 들어가는 간병비 3백은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도 큰 고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급한 불 끄자고 가해자 측이 제시한 터무니없는  금액으로 합의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남편은 매일 유투버를 뒤져 제비처럼 카톡방에 정보를 퍼 나르고 아빠 옆에서 제일 고생하는 여동생은 가해자 측의 사정을 저에게 설명하며 3천도 잘 받는 거라고 저를 설득했습니다. 여동생과 남편이 의견 대립을 하면 여동생의 기분도 풀어주고 남편의 기분도 풀어줘야 했습니다.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게 내가 지금 아빠의 불구된 몸을 가지고 돈을 흥정하는 기분이 너무 고약해서 죽을 맛이었습니다.


가능하면 할 수만 있다면 아빠가 한약을 맞추러 갔던 그날의 사고 시점으로 되돌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자주 했습니다.


형사 합의가 안 되면 이걸 민사로 가져가야 하나 싶어 고민이 깊어가던 차에 아빠보다 더 나이가 많은 가해자 할아버지 운전자가 손해사정인에게 아침 일찍 전화를 주셨다고 합니다.


“내가 아무리 구해봐도 이거 밖에는 안되겠는디 어찌 얘기 좀 해주쇼”


그 한마디에 참았던 눈물이 터졌습니다. 그리고 가해자 할아버지도 용서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그제야 들었습니다.

동생이 받아온 수표의 뒷면을 보고 마음이 안 좋았다고 얘기해줬습니다. 여기저기서 꿔 온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남의돈을 끌어모아서 저희에게 합의금으로 주려고 가지고 온 할아버지가 안쓰러워 저랑 동생은 전화를 하며 또 울었습니다.


이게 서로 무슨 못할 짓이냐 싶어서 상황이 한탄스럽기도 했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칠순이 넘는 고령에도 공공근로를 나가야 하는 아직도 살아있는 목구멍에 음식을 넣어주고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가장이었습니다.

그날은 집에 있는 깨를 팔려고 시장에 나왔던 길이었다고 합니다. 지팡이가 없으면 고관절 수술 후유증으로 절룩이는 다리를 지탱할 수가 없어서 방앗간에 놓고 온 지팡이를 다시 가지러 가다가 사고를 내셨습니다.


동생이 안쓰러운 마음을 추스르며 할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그래도 행복하신 거예요. 저희 아빠는 이젠 걷지 못하세요. 조심히 가세요....”


아빠도 불쌍하고 가해자 할아버지도 불쌍했습니다. 자꾸 몸이 눕고만 싶어서 이번 주는 음식 만드는 일을 쉬겠다고 했습니다.  이번 주는 무계획으로 그냥 쉴 겁니다. 내가 당장 쉬면 들어가야 할 비용들이 고스란히 마이너스로 남겠지만 그래도 쉴 겁니다. 마음이 핑퐁 치는 탁구공처럼 가해자 할아버지의 처지와 아빠의 상황을 오가느라 제가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성실한 짠돌이 남편에게는 미안하지만 아침인사가 참 거시기했지만 그 말을 꼭 해야만 했습니다. 잠깐 ‘타임’을 외쳐봅니다. 하루라도 쉬면 내일 당장 굶어 죽을 사람처럼 일 했던 강박도 좀 내려놓고 싶었습니다.


“마이너스 통장 한도 좀 늘려놔 줘”


남편이 그러마 하고 출근을 합니다.


마이너스 통장 한도를 늘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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