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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꽃 Jul 12. 2020

죽은 자의 존엄, 산자를 위한 존엄이다.

작년 조국 전 장관의 사태 이후 저는 어쭙잖게나마 카스토리에 올리던 정치적인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는 나설 수 있지만, 그게 개인의 이익에 위배될 때 인간이 신념을 어떻게 손바닥 뒤집듯 할 수 있는지  제가 직접 체험을 해보게 된 이후입니다.


‘조국 수호 검찰 개혁’을 외치며 서초동에서 심장을 발갛게 달구던 제가 조국 사태로 인해 외고가 대입 입시에 매우 불리해지자 제 입에서 단박에 그런 얘기가 나왔습니다. “ 아니, 왜 정경심 교수는 왜 그런 일을 벌인 거야!” 제가 내뱉은 정확한 딕션이 맞을 겁니다.

조국 사태가 한참 시끄러울 때 추석의 밥상에서의 풍경도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조국 전 장관을 옹호하는 저와 반대로 시아버지는 그런 저를 매우 꾸짖었었고 저의 의견에 반발이라도 하듯이 밥을 먹다 말고 ‘조국 반대, 검찰 승리’ 라며 만세를 부르던 시누이 남편과의 대립도 웃지 못할 일화입니다.

시누이 남편은 은행원입니다. 현정권이 들어서자 은행에 규제가 많이 들어오고 개인의 업무가 복잡해지고 힘들어지자 불만이 쌓인 거라고 시누이가 말해주더군요.


저는 제가 민주당을 지지하는 줄 알았으나 치솟는 아파트 가격에 분개하며 정부의 핀셋 규제를 원망하던 때였습니다. 누구 눈치를 보느라 종부세를 안 올리는 거야? 투기꾼들 배만 불려주는 정부의 부동산 규제에 화가 나서 현 정부를 한참 미워할 때에 그분의 사망 소식을 듣고 허탈감이 심하게 몰려오더라고요.

며칠 저녁 뉴스를 보질 않았습니다.


내가 내 개인의 이익에 따라 이쪽저쪽 왔다 갔다 하며 줏대가 없어져 있을 때 40년 평생을 사회에 헌신하던 그분의 죽음이 저는 왜 이리 허망하던지요.

그분을 고소했다는 고소인의 입장에 서서 조문을 가지 않겠다는 정의당의 행동에도 분개하는 마음이 솟았습니다.


사람의 한 평생의 업적이 어느 한순간의 오점이나 잘못으로 다 뒤집어져버려야 하나 싶기도 했습니다.  아는 게 짧고 신념도 이리저리 흔들리지만 그거 하나는 알 거 같습니다. 죽은 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는 가로세로연구소의 행태에 몸서리가 쳐지고 무서운 마음이 듭니다.  한 목숨이 삶을 등지고 가버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뇌와 힘듦이 있었을지 누가 짐작이나 하겠습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는데 어제 페이스북에 어느 교수님이 그런 글 귀를 올리셨습니다.

“죽은 자의 존엄을 지키는 것은 살아있는 자의 존엄을 지키는 것이다’


초상집 옆에서 검은 상복을 차려입고 유튜브 방송을 하는 자들의 행태에 분노가 솟습니다. 박원순 시장님은 공인이기도 하였으나 한 가정의 가장이었고 자식들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남편을 잃은 아내가 치르는 장례식을 한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며 같이 슬퍼해줄 수는 없는 걸까요...

저녁을 먹고 버릇처럼 뉴스를 틀었다가 화들짝 놀라 리모컨의 전원을 꺼버렸습니다.


저는 별로 그렇게 정의롭거나 신념이 굳세거나 올곧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개인의 이익 앞에 쉽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던 정치색을 버릴 수도 있는 어찌 보면 형편없는 신념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으나 그거 하나는 압니다.

장례식장 옆에서 꽹과리를 쳐대며 저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 관심을 가지는 게 얼마나 무섭고 서늘한 건지 말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분의 평생이 모두 다 왜곡되고 찢기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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