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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꽃 Jul 20. 2020

합의 2.

안의 내홍이 밖의 내홍보다 더 힘든 법이다.  모르는 타인과의 불협화음보다 가족이라 생각했던 이들과의 불협이 더 당혹스럽고 가슴 아프다. 이론으로 알고 있을 때보다 현실로 다가올 때의 슬픔은 상상보다 더 냉혹하다.


아빠의 교통사고가 난 지 70일이 지났다. 그동안의 사투의 70프로는 가까이 사는 둘째 여동생의 몫이었다. 아빠에게 제일 구박을 받으며 컸던, 불량감자로 취급받았던 여동생이 생계를 이어가는 옷가게를 수시로 여닫으며 아빠를 돌봐야 했다.

나는 고3 엄마라는 이유로 그리고 남편이 근무하는 대형병원이 코로나 지정병원으로 되어있어서 일반 입원이 불가했던 이유로 여동생이 짊어질 짐을 나눠갖지 않았다. 마음으로만 미안해했다.

남동생은 하루 벌어 하루 살기가 막막했던 이유로 아빠의 사고에서 열외 되었다. 그래도 가끔 병원에 면회를 가서 제일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주니 그것도 고마운 일이었다. 간병인 선생님이 힘들어하시는 아빠의 극도의 흥분상태를 정신과와 상담하여 약을 처방받아준 것이다.

나도 여동생도 정신과 약까지는 생각을 못했었는데 그래도 아들이라고 아빠의 심리상태를 짐작해주니 그게 참 고마웠다.


아빠의 평생 아픈 손가락이고 제일 예뻐했던 막냇동생은 당연히 열외였다. 용인에 살고 있는 동생이 자주 올 수도 없었을뿐더러 시골에 혼자 계신 할머니를 모셔갔기 때문이었다.


각자의 사정과 형편으로 그 모든 어려움의 선봉에 서서 첫째 여동생이 맡아하던 70여 일의 대학병원 생활을 마감 짓고 요양병원으로 옮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사고 발생인과의 합의가 끝난 게 큰 산을 넘은 기분이었는데 요양원을 알아보는 일은 작은 일이라 생각했다. 여동생이 자주 드나들 수 있는 김제의 요양병원으로 옮기려고 의논이 끝나 있었는데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제동이 걸렸다.


할머니였다. 아흔여덟의 어미는 반신불수가 된 아들을 살리고 싶어 했다. 재활이 당장 가능한 좋은 대학병원으로 옮기고 싶어 했지만 아빠는 지금 MRSA라는 병원균에 감염이 된 상태였다. 인근 소도시의 할머니가 맘에 들만한 요양병원에서는 아빠를 받아줄 개인 격리병실이 없었다.

김제에 낙후된 요양병원에 넣기를 극구 반대하시며 그 병원에 넣으면 당장 아빠가 죽을 것처럼 벌벌 떠셨다. 그게 아니라고, 당장 아빠를 버리는 게 아니라고 설명을 해 드려도 말이 들어가지가 않았다. 옆에서 막내 여동생이 한술 더 떠서 수원의 대형병원에서 지은 요양병원을 알아본 게 큰 사달의 원인이 되어줬다.


당장 그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우기는 할머니와 막내 여동생이 온 친척에게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고모와 고모부가 싸움에 끼어들었고 큰 삼촌과 작은 삼촌이 거들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보험비를 챙겨간(?) 나는 큰일을 자신들에게 상의하지 않았다며 뒷말이 들려왔다. 나의 아빠에게 일어난 사고를 누구에게 상의를 해야 한단건지, 그럼 아빠의 간병비와 수발을 그들도 같이 동참해준다는 말이었던가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김제 요양병원에 모시려던 첫째 여동생과 내가 한편이 되고 나머지 모든 식구가 다른 편이 되어 싸우게 됐다.


그동안의 수고는 떠밀려가는 파도 위의 쓰레기 더미처럼 취급되고 나와 첫째 여동생은 아빠를 아무 요양원에나 버리려는 천하의 불효자가 되어버렸다.

막내 여동생이 오늘 아빠의 퇴원을 강행하겠다고 한다. 그러라고 했다.

아무 소리 내지 않고 일단은 지켜봐야겠다. 밖의 합의보다 안의 합의가 더 나에게 상처가 됨은 말해봐야 입이 아프다.


아침에 출근길의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울고 있을까 봐 걱정이 된다고 했다.

우냐고 묻길래 울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큰 삼촌이 내가 가지고 있는 아빠의 합의금을 내가 다 써버릴까봐 걱정하고 있어도 불쾌하지가 않다. 고모부와 고모가 자신의 자식들에게 내가 어른들과 상의도 하지 않고 가해자와 합의를 해버렸다고 혀를 끌끌 차도 이상하게 마음이 덤덤하다.


울어야 하는 일인가 곰곰이 되씹고 있는데 내 눈물샘은 인두로 지진 듯 말라버리고 하늘이 종일 울었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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