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교육원에서 연수반의 쫑파티 수업이 있었습니다. 간단한 다과와 함께 그동안의 소회를 다들 편히 털어놓는 시간이었습니다. 작년의 이맘때의 기분이 떠올라 저도 참 새삼스럽게 마음에 소요가 생기더군요.
작년의 10월엔 제가 입버릇처럼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었거든요.
‘내일 눈을 안 떠도 여한이 없을 거 같아. 너무 열심히 살았거든. 딸도 실컷 사랑하며 키웠고 나는 오빠도 너무너무 많이 사랑했으니까 후회가 없어. 내일 죽어도 미련이 1도 없다니까.”
이런 얘기를 남편에게 오늘 저녁은 뭘 먹을 건지를 묻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얘길 하곤 했습니다. 한번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잘 때마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내가 얼른 죽어야 늘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또 했습니다.
찬바람이 진득하게 폐에 달라붙어 그랬는지 내뱉는 한숨에 서리가 맺힐지도 모르겠다 싶게 가슴이 추웠는데 하필이면 이맘때 즈음 어머님의 생신이 겹쳐 있었습니다.
환갑에는 9백만 원짜리 모피를 사달라 했던 어머님이 칠순 생일엔 또 뭘 해달라 할까 기대하던 마음이 있었는데 역시나 작년 칠순의 생일엔 4백만 원 가까이하는 의료기 침대를 사달라고 하셨습니다.
종일 일하느라 온 몸이 쑤시고 나이 마흔 중반에 벌써 어깨의 관절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던 나는 마사지 한번 받을 생각을 못하고 동동거리며 사는데 4백만 원이나 하는 의료기 침대를 사달라 하시는 어머님의 주문이 싫더라고요.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정도 들었고 아침에 눈뜨면 또 건전지 새로 갈아 끼운 로봇처럼 부엌에 서서 주문받은 음식을 종일 만들고 아이를 픽업하러 다니고 남편의 밥상을 살뜰하게 챙기다가 저녁이 되면 또 그런 맘이 드는 겁니다.
‘나 너무 열심히 살았어. 내일 눈 안 떴으면 정말 좋겠다. 그래야 이 열심히 사는 젠장맞을 버릇을 놓을 거 아냐.’
그렇게 죽게 힘이 들면 일을 안하면 되는데 하루도 맘 편히 쉬질 못했습니다. 누가 시킨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남편이 돈을 안버는 것도 아니고 직장이 허술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혼자 내가 나를 닦아세웠습니다. 쉬면 안돼. 그러면 큰일나. 돈 못벌면 어떡하지? 남편의 한숨소리가 들리는거 같고 카드값을 메꾸지 못할거 같고 아이의 교육비를 대주지 못할거 같은 불안감에 수시로 시달렸습니다.
그런 맘으로 어느 날 티브이 리모컨을 돌리는데 날 닮은 여자가 열심히 사는 드라마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동백이에 맘이 꽂혀서 울며 웃으며 가슴 설레 하며 더 이상은 내 꿈을 미루고만 있지 말자는 맘이 들었습니다.
경쟁률도 엄청나다는데 내가 거기 붙을 수나 있겠어? 하는 반신반의의 심정으로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일상을 꾸역꾸역 살던 여자가 여의도 교육원엘 가게 된 거랍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났습니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삶에 대한 강박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일을 쉬고 있거나 주문이 덜 들어오거나 손이 심심해지면 불안감이 칡덩굴처럼 온몸을 기어오르긴 하거든요.
그렇긴 한데 강박의 에너지를 글로 옮길 수가 있어서 그게 너무 행복합니다. 오늘을 열심히 살지 않으면 내일 당장 내 발밑이 무너져 내릴 거 같은 그런 불안감도 글을 쓰면서 조금 줄어들기도 한 거 같습니다.
일 년 동안 내가 써낸 글들은 청승맞은 여주인공이 나옵니다. 제대로 된 플롯도 갈등의 전개도 아직은 너무 많이 미약한 글들을 생산해내면서 저의 묵은 청승을 실컷 풀어냈더니 이젠 그런 생각들이 더 이상 들지 않습니다.
내가 경험했던 삶의 넋두리는 그만하고 재밌고 감동적인 얘기를 써보고 싶은 건강한 희망을 가슴에 한껏 품을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드디어 연수반의 수료증을 받아 들고 집에 들어오면서 작년의 나와 오늘의 내가 참 많이 달라졌구나 싶어 순간 좀 뭉클하더군요.
기초반은 왜 기초반인지 알게 되고 연수반은 왜 연수반인지 가슴으로 알게 된 일 년 된 망생이는 또 다음의 도약을 꿈꿔봅니다.
전문반으로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기대를 조심스레 품어봅니다.
이제는 그런 생각을 안 합니다. 내일 눈을 안떴으면 좋겠다니? 말도 안돼! 내일도 모레도 계속 가슴속에 새로운 주인공들을 만들어내고 갈등의 기승전결이 뚜렷한 멋진 이야기를 꿈꾸며 살고 싶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