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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꽃 Nov 19. 2020

관계마다 거리가 필요합니다. 난로 쬐듯...

저의 글쓰기의 시작은 카스토리였습니다. 주문받은 음식을 만들어 인증숏을 올리고 거기에 잠깐의 감상을 적어 올리기 시작한 게 시초였어요. 재밌더라고요. 혼자 쓰는 일기장이 아닌 그날의 일상의 감상을 올렸을 때 어느 날은 저의 단골 고객님이 댓글로 그런 글을 적어주셨습니다.


‘정은 씨! 수필집 내면 내가 열 권 사줄게요!” 그분의 칭찬이 정말 오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별다른 기교 없이 쓴 저의 감상글을 하루의 흔적을 보고 그리 공감해주신 게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그래서 쓰다 보니 저의 가정사가 하나씩 노출이 자연스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글을 쓰면서 제가 많이 위로받았습니다.


쓰면서 위로받는 행위가 큰 축복이라 느껴졌습니다. 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저의 고뇌와 외로움이 슬픔이 또는 즐거움과 행복이 여러 사람들의 공감을 받는 기쁨이 꽤 큽니다. 그리고 자주 카톡으로 개인적인 인사도 받았습니다.

커피 쿠폰을 주시기도 하시고 케이크 쿠폰을 보내기도 하시고 제가 글로 써낸 딸아이에 대한 애정도 듬뿍 담아 응원을 보내주시는 여러 고객님들 덕분에 계속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고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글을 읽는데 그치지 않고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저에게 카톡으로 질문을 해주시는 분들이 생기신 거죠.

이걸 기분 나빠해야 할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분명히 고민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주문한 음식을 보내 놓고 내일 도착한다는 저의 안내 메시지에 뜬금없이 이런 질문이 뜨면 저는 솔직한 심정으로는 마음이 상했습니다.


“아빠는 괜찮으시고?” 물론 저는 모든 고객님들과 친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만 주문하시고 끝나는 게 아니고 저는 여러 고객님들과 수년간 단골로 관계를 맺어왔으니까요. 그래서 저를 친분 있다 생각해주셔서 저의 안부를 물어주시는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빠의 병세와 아빠로 인한 여러 고초에 대한 감상을 음식을 주문하신 단골분들과 애환을 나누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너무 큰 슬픔은 하소연도 못하게 아픈 법입니다.


혼자의 눈물 항아리가 찰랑거리며 넘실대는데 돌멩이 하나가 텅소리를 내며 빠지며 주변에 물보라를 만들었습니다. 참으려 했던 감정들이 돌출되어 나와서 마음이 아렸습니다.


엊그제는 거의 8년여간 제가 올리는 카스 글부터 좋아해 주시던 고객님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엊그제 올린 글에서 어떤 에피소드를 만들어낸 주인공이 누군지를 궁금해하시더라고요.

이런 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서 딸과 의논했습니다.  딸이 그러더군요.


“엄마 공지영 같은 작가는 아무리 그 사람 글이 좋아도 연락처를 모르니까 물어볼 수가 없잖아. 그런데 엄마는 연락처를 아니까 엄마를 작가로 생각하는 팬분들이 궁금해할 수도 있는 거지. 좋게 생각하면 되는 거 아닐까?”


그 말이 맞기도 하였지만 뭔가 가슴에 계속 의문이 남았습니다. 공지영 작가는 세 번 결혼과 이혼을 했죠. 제가 그 사람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 하더라도 그분에게 이렇게 질문을 하는 건 실례일 겁니다.


“그래서 두 번째 남편 이름은 뭐예요? 뭐하는 사람이에요?”


이렇게 설명을 해드리면 저의 기분이 조금 이해가 가실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교육원의 연수반에 들어갔을 때 첫 과제가 <내 인생의 명장면>이란 수필을 써내는 거였습니다. 이제껏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김밥과 관계된 정말 너무 슬픈 장면이 저에겐 있습니다.

이건 제 여동생도 모르는 남편도 모르는... 딸도 모르는 너무 슬픈 날의 추억입니다. 그런데 그 장면을 수필로 그려내면서 이 글은 브런치에는 또는 카스에는 절대로 발표를 하지 못하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를 불쌍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구나. 아, 내 음식을 만들어주는 이 여자에게 이런 사연이 있었어? 아휴 불쌍해... 뭐 이런 감정으로 저를 대할까 봐 두렵더라고요.

그래서 여태껏 브런치에 올려놓은 글보다 훨씬 잘 써놓은 글임에도 발행을 망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교육원 수업엔 발표가 가능했냐면 그들은 그 작품을 보고 저를 다르게 평가하지 않을 거 같았거든요. 따로 묻지 않을 거 같았고 저를 자기들만의 생각에 가둬놓지 않을 거란 객관적인 시선이 가능할 거란 자신도 있었습니다.


저의 글을 좋아해 주시는 건 너무 고맙습니다. 그런데 저의 연락처를 알고 계셔도 따로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해주시는 걸 조심해주셨으면 합니다. 방금도 밤 9시 50분이 된 시간에 음식 주문은 아닌데 뭘 좀 물어봐도 되냐고 묻는 고객의 질문에 가슴이 철렁하고 반갑지가 않더라고요.

그래서 이 글을 씁니다.


작가의 사생활을 자유롭게 공유하며 거짓말로 사연을 만들어내지 않고 솔직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글로 제가 다르게 평가를 받거나 사회적인 잣대로 어떤 기준이 만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고객님들의 칭찬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주문이 들어오지 않는 가을의 저녁에 아랫목에서 삭히는 청국장처럼 이불을 둘러쓰고 있다가 몇 줄 써낸 감상을 읽으시고 감탄해주신 고객님의 댓글에 신이 나서 또 다음 글을 쓸 자신이 생겼던 겁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따로 저의 글에 실린 궁금증들을 물어보시는 건 절대로 사양합니다. 글은 글로만 읽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렸을 때 그러니까 스무 살 남짓에 저는 엄마가 없다는 얘기를 스스럼없이 타인에게 밝히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선들 있잖아요.

‘어머 엄마가 없이 컸어? 에고 짠해라...’ 하는 그런 시선들 말입니다.

제가 올린 글에 질문을 받게 되면 그런 시선들을 다시 받아내는 느낌이 들어 불편했습니다.


관계마다 거리가 꼭 필요합니다. 독자와 작가의 거리, 주문하신 분과 음식을 만들어내는 사람의 거리. 그 거리를 지켜야 건강한 관계를 오래 가져갈 수가 있다고 지난 세월에서 배웠습니다.

이 글을 읽고 상처 받지 않으시길 당부드립니다. 제가 솔직한 글을 계속 써나가기 위해서도 독자와의 적당한 거리가 꼭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제 글을 좋아해 주시는 그 관심에 깊은 감사와 고마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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