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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꽃 Mar 22. 2021

작별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지난 금요일, 민사소송에 대한 답변서를 우편으로 보내 놓고 돌아오는데 그렇게 가슴이 미어집디다. 더 이상은 눈물도 안 나올 줄 알았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통곡이 터졌습니다.


40억 도 아니고 4억 도 아니고 아버지의 형사합의금 4천에 대한 막냇동생의 징그러운 욕심은 그치질 않고 <부당이익의 청구의 건>으로 저에게 민사를 제기했습니다. 변호사를 고용해서 말입니다. 집안 친척 그 누구도 아빠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도 못하는데 어떤 형상으로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제 주머니에 들어있는 그 돈을 빼앗아가려고 하는 그 이기가 서슬 퍼런 강도의 칼보다 더 섬뜩하고 가슴이 아렸습니다.


이 심정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 칼에 찔린 건 나이니 피를 흘리고 있는 건 나니까 그 아픔 나만 압니다. 이미 다 끝난 가족관계에 더 이상의 미련을 두면 안 되는데 저 혼자 그렇게 울고 불고 그랬습니다.

돈을 돌려주겠다는 반론 제기 문을 작성해서 법원에 보냈습니다. 아빠의 돈이니 그들이 보낸 서류엔 아빠가 의식이 있다 하니 아빠가 달라하는데 당연히 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빠의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도 이젠 궁금해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의식이 있는 채로 큰 자식을 고소했어도 처참하고 의식이 없는 채로 이런 일이 벌어진 거라고 해도 처참합니다. 어제저녁에도 혼자 울고 있었더니 남편이 냉정하게 다그치며 그런 말을 해줬습니다.


“그만해! 정은아, 그냥 인정해. 너 그 사람들한테 버림받았어. 버림받은 거야. 돈 가지고 도망간 사람 된 건 너잖아. 네가 왜 울어? 그 사람들이 잘못한 건데 왜 네가 울고 있어. 가족이라 생각하고 형제라 생각하고 자식이라 생각했으면 이런 일이 벌어져? 앞으로 이 일로 누구에게도 위로받으려고 하지 마. 의연히 버텨. 지금은 그거 말고 할 게 없어. “


너무 맞는 말입니다. 그 말 듣고 그래도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 생겨서 구차하게 내 처지를 설명하고 내 편들어달라고 하는 거 같아서 전화를 절대로 하지 않았던 고모의 딸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할머니와 연락이 되는 막내 삼촌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남동생도 받지 않고 막내의 연락처는 모르니 그 들과 연결이 되는 고모의 둘째 딸이 유일한 접선책입니다.

돈을 돌려준다고 법원에 그리 써서 제출했고 이제 그 누구와도 연락을 하지 않을 생각이니 마지막으로 할머니에게 인사는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작년 이맘때 써두었던 <그놈의 파김치>를 쓰게 해 줬던 내 글의 페르소나... 그리운 할머니에게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라고 인사드리고 편안히 잘 계시라고 마지막으로 목소리 한번 듣고 싶었습니다.

부탁을 해두며 이런 말도 전했습니다.


“마지막 인사라고 전하고 그 전화도 받기 싫거든 그것도 괜찮다고 얘기해드려. “


흙 신작로를 걸으며 시커먼 검은 물 한잔 먹고 싶어도 개아침에 들어있는 돈이 아까워 커피 한잔도 아끼셨던 할머니도 내가 사랑한 할머니이고 막내의 이간질에 속아서 저에게 전화를 해서 ‘내 아들 돈 내놓으라고 ‘ 소리를 치던 할머니도 내가 사랑한 할머니입니다.

인간에겐 여러 다양한 모습이 존재하니까요. 나이가 들어 현명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셨어도 그분을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할머니에 대한 글을 많이 써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분이 그립고 이제는 수몰되어 찾을 수 없는 친정이 그리우면 그 글을 하나씩 꺼내보며 스스로 자위해볼 수 있으니까요. 나에게도 한때는 이런 친정이 있었다고...


가난했지만 파김치 한 줄이라도 자식들에게 골고루 먹이고 싶어서 꼬부라지다 못해 기역자로 꺾인 허리로 파김치를 담아 보냈던 나의 친정이 있었다고 말입니다.


친정집은 팔려서 그 돈은 작은 삼촌이 가져가서 평택의 어디에 땅을 샀다고 합니다. 아빠의 사고로 인해 보험사에서 나온 보험금은 어디에 쓰였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제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돈이 만들어낸 파국이 처참합니다. 저는 다만 할머니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저장하고 싶을 뿐입니다.


할머니에 대한 마지막 인사가 이 모든 일에 대한 마침표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인사는 울면서 하지 않기를 바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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