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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꽃 Mar 19. 2021

아직은 덜 익은 땡감 주제에.

역시, 병은 소문내야 낫습니다. 할머니에게 들은 지혜입니다.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는 할머니는 그러고 보니 저에게 수많은 에피소드와 이야기를 유물로 남겨주셨는데 자신의 백내장을 공짜로 치료한 무용담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어느 날부터 눈앞이 뜬 물이 낀 거맹키로 뿌여싸서 살수가 있가니? 내가 버스를 타고 오는디 차 안에서 그 이야기를 앞에 앉은 아줌니한테 헌게로 그 얘길 듣고는 기사양반이 김제00병원으로 가믄은 눈을 공짜로 고쳐준다 안허냐? 그리서 내가 지팡이를 짚고는 가봤드니 눈에 뭣이 꼈다고 수술을 해주더란 말이다. “


칠십 중반이셨을때였던지 언제였는지 정확한 시점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아직은 그래도 기운이 정정하실 때 혼자서 모든 걸 다 관리하실 수 있을 체력에 백내장이 생기셨던 모양입니다. 장터에 갔다 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 일장 수다를 한바탕 판소리처럼 풀어놓으셨을 겁니다.

입담이 좋으셨거든요. 그 얘길 들은 버스 안의 어느 승객이었던지 기사님이셨던지 아무튼 그 어느 분이 시내에서 백내장을 공짜로 수술해주는 의료봉사를 해주는 병원을 소개해주셨나 봐요.

자식들에게 백내장쯤은 전화 한 통화 안 걸고 혼자 해결하셨던 할머니가 늘 입에 달고 사셨던 말입니다.


백내장 에피소드를 수십 번 해주시면서 늘 그렇게 말씀해주셨죠.


“병은 소문내야 낫는 것이다”


그 덕분인지 저도 저의 감정상태를 타인에게 자주 의탁하는 편입니다. 주변인들이 지금은 다 사라져 버려서 겨울에 눈 녹듯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말입니다. 브런치에 이렇게 중얼거려 놓거나 카스토리에 방백처럼 써 놓거나 둘 중의 하나거든요.

어제는 작가교육원 전문반의 단톡 방에 수다 좀 풀어놓을까 하다가 말았었는데 아침에 침대에서 우울감을 얼굴에 비비적거리며 침대에 누워있는데 동기님 한분이 톡으로 연락을 주셨습니다.


“어제의 고민은 해결이 잘 되셨나요?”


그 소리에 봇물이 터지듯 요즘의 저의 볼멘 상태를 낱낱이 고해바쳤죠. 창작반에 지원을 하려 하니 실력 한참 못 미친 대본 4개를 손에 쥐고서 어느 걸 그래도 좀 고쳐볼까 되작거리며 만지는 중이라고...

그리고 요즘 재능도 없는 주제에 열심히도 하지 않아서 수업도 맘 편히 들을 수가 없다고 하소연을 했었습니다.


제가 좀 성에 안 차는 상황이 생기면 자기 비하를 굉장히 심하게 하는 편이랍니다. 누가 그 굴에서 저를 꺼내 줘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거든요.


다행히 오늘은 제가 병을 소문낸 덕분으로 동기님의 자상하면서도 꽤 냉정한 조언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충격이었고 저에게 찬물 한 양동이를 뒤집어쓴 거처럼 저를 소름 돋게 했던 건 그분의 대본에 대한 노력의 단면을 엿본 후였는데...


두 번째 작품으로 내었던 동기들에게 선생님에게 모두 골고루 호평을 받았던 너무 훌륭했던 대본이 글쎄 3년 동안 수없이 매만지고 수정에 수정을 거쳤던 작품이란 걸 알았습니다. 저는 많이 고쳐야 3고까지 해봤거든요.

작품 하나가 탄생하려면 수십 번 고쳐져야 한다는 말을 듣기만 했지 눈앞에서 확인을 해보긴 처음이었어요.


그리고 또 놀라웠던 건 같은 전문반의 1/3 정도가 전문반, 연수반을 두 번씩은 재수를 하셨던 분들이더라고요. 저는 그야말로 그런 동기님들 앞에서는 글이 안 써지네 어쩌네 했던 건 수탉 앞에서 꼬꼬댁 흉내를 내던 병아리 같은 모양새였던겁니다.


글의 근육을 키우기 위해선 다시 아래의 반으로 내려가는 것도 적극 추천하신다는 동기님의 조언 앞에서 묵묵히 그게 맞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어요.


어제 우울감 어쩌고 저쩌고 했던 거요? 단박에 나았습니다.


글을 너무  쓰는 동기님들에 대한 시기심보다는 벌써  번째나 수정 고를 제출해서 선생님에게 첨삭을 받는 동기에게 질투가 났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저는 정작 아무것도  하고 있었거든요. 나는 열심히 안하고 있는데 다른 모든 사람이 열심히 달리고 있는거 같아 보기가 괴로웠습니다.


욕심만 앞서서 남들이 열심히 하는 것에 대한 질투로 인해 떫은맛을 잔뜩 품고 있는 덜 익은 땡감같이 제 입맛을 떫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겨우 감꽃을 떨구고 봉긋하게 감 비슷한 모양의 땡감일 뿐인 제가 감히 잘 익은 감을 흉내 내었다니 스스로 너무 부끄러웠던 오후였습니다.


자신의 실패 경험을 낱낱이 알려주었던 동기님에게 어떤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보다 네 살이 많으신 동기님은 지난 시간의 12번의 실패가 결코 후회가 되지 않는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이제 겨우 다섯 편의 습작을 마쳤을 뿐인데 그분은 12편을 실패하고 13번째의 작품이 모든 사람의 공감을 끌어낸 것이었거든요.


지금도 쓸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진 게 그저 마냥 행복하시다는 동기님의 고백에 겨우 이제 땡감인 저는 깊이 반성했습니다.

창작반 지원은 한번 쉬어가고 전문반, 연수반 재수강을 신청해볼 생각입니다. 딸에게는 재수를 권하면서 정작 저는 글공부의 재수를 마뜩지 않아 괴로워했네요.

실력이 한참 모자란 것을 스스로 알면서도 말입니다.


병을 소문내서 다행이었습니다. 모른 척하지 않고 자신의 실패의 경험을 쓱 내밀어준 동기님에게 무한 감사를 드립니다.

쓸데없는 열패감에 휘둘려서 저의 재능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그 조언을 절대로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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