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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ng Jun 05. 2024

나는 편견에서 자유로운가

'정상적이지 않은 아이'가 나의 아이와 만나는 것에 대하여 

최근 겪었던 일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고민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글을 쓴다. 


태오를 집에 둔 채 루나만 데리고 아파트 단지 놀이터로 놀러 나갔을 때의 일이다. 루나는 상대적으로 활달한 성격이라 텅 빈 놀이터를 혼자 점령(?)하는 것보다는 언니, 오빠들로 북적거리는 분위기를 더 좋아한다. 모르는 이웃과의 우연한 만남에 크게 위축되지 않는 편이다. 적극적으로 다가가 말을 걸진 않지만, 루나를 귀여워하는 언니들이 놀아주려 할 때 큰 기쁨을 느낀다. 


우리가 나갔을 때에는 놀이터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루나는 아빠와 혼자 놀기 시작했다. 그때 덩치가 꽤 큰 오빠 한 명이 자전거를 타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같이 놀래?"라고 물으며 다가오는 해맑은 접근방식 자체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첫 만남 후 단 몇 초만에 그 친구와 일반적인 대화방식으로는 의사소통을 진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체격은 초등학교 고학년 수준이었지만 사용하는 단어의 구사력이나 문장의 완성도는 만 네 살인 태오보다도 떨어졌다. 더 큰 문제는 개인 간 암묵적으로 존중되는 개인 거리 (personal space, 혹은 human bubble)에 대한 인식이 크게 떨어져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 덩치 큰 오빠는 루나의 동선에 갑자기 끼어들어 진행을 방해한다던지, 루나가 깜짝 놀랄 정도의 소음을 발생시키며 코 앞에 나타난다던지 하는 방식으로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했다. 처음에 호기심을 보이던 루나도 금세 두려움을 느끼며 내 뒤로 숨었다. 결국 루나의 놀이는 중단되었고, 우리는 다른 놀이터로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덩치 큰 오빠 친구는 그 후에도 자전거를 타고 우리 주위를 맴돌며 따라오는 행동을 한동안 멈추지 않다가, 자신과 같은 남자아이를 만나자 관심을 그에게로 바꾼 후에야 우리 곁을 떠났다.  


그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이란 루나가 혹시 모를 돌발상황으로 인해 다치는 일을 막기 위해 내 몸 가까이에 붙이는 일 정도였다. 처음에는 그 친구와 대화를 시도하기 위해 노력해 보았지만 ("우리 친구는 어떤 것을 좋아해? 이름은 뭐야? 작은 친구와 어떻게 놀아줄 건데?") 대답을 얻지 못했다. 미숙한 발음으로 인해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를 지속적으로 되풀이할 뿐이었으므로, 대화를 통해 루나와 그 친구 사이의 놀이를 진행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위험해 보이는 접근을 할 때 "그러면 안 되지" 정도로 만류하였지만, 이 역시 통하지 않았다. 결국 수동적으로 루나를 그 친구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 내가 최종적으로 택한 판단이었고, 나는 아직도 나의 판단이 옳았는지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는다.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에 대한 이야기는 전부터 많이 들어왔고, 나의 아이들이 태어난 이후 '혹시 우리 아이도?'라는 불안한 생각에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발달장애아에 대한 나의 기본적인 스탠스 역시 일반인과 다르지 않았다. 편견을 가지고 대해서는 안되며, 더 많은 사회적인 관심과 도움이 필요할 뿐 아니라, 장애를 갖지 않은 일반적인 아이들과 분리하여 성장시키는 것도 (일정 부분) 문제가 있다는 것. 상식 수준에서 충분히 도출 가능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나의 아이'가 실제로 이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을 때 평소 견지한 입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나는 제대로 답변하지 못한 셈이다. 그 상황을 회피하는 쪽을 택했다는 것은 내 아이를 위해 '분리'를 택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일을 어제 다시 경험했다. 아내가 요즘 매일 야근을 하고 있어 피곤해하던 차에, 단 하루만이라도 가족의 저녁식사 준비 의무에서 해방시켜 주고자 어린이집 하원 후 혼자 태오와 루나를 데리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아이스크림까지 야무지게 먹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백화점 옥상에 있는 놀이터에서 놀던 중 발생했다. 태오와 루나는 아직 덩치가 크지 않은 편이어서 난도가 높은 놀이기구는 알아서 피하는 편이다. 우리가 택한 것은 낮은 높이의 미끄럼틀이었다. 차례를 지켜 미끄럼틀로 올라가고, 갖가지 자세로 내려온 후 신속하게 비켜주어야 다음 차례의 아이가 내려올 수 있는 그 미끄럼틀의 아래 부분에서, 꽤 고도 비만으로 보이는 한 아이가 비켜주지 않고 버티고 누워 깔깔 거리며 웃고 있었다. 이번에도 단 몇 초만에 정상적인 상황이 아님을 직감했다. 일반적으로 "미안하지만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좀 비켜주지 않을래?" 등의 짧은 대화를 통해 교통정리를 할 수 있지만, 이 아이와는 대화 자체가 불가능했다. 미끄럼틀 위로 올라간 태오와 루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그 아이의 엄마가 다가와 아이를 물리적으로 끌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나의 아이들을 진정시키며 위에서 기다리게 했다. 하지만 결국, 간단한 단어조차 말하지 못하던 그 아이는 소리를 지르며 비키지 않고 계속 미끄럼틀의 아래 부분에 누워 있었고, 나는 아이들을 안아 내려 다른 곳에서 놀자고 유도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아이의 부모가 느끼는 심리적 압박이 어떤 것인지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머니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곧 태오와 루나는 다시 그 놀이터로 돌아왔고, 같은 문제가 다시 발생했다. 그래서 나는 활동성이 높은 루나에게 아예 다른 구역으로 가서 놀 것을 제안했다. 루나와 태오는 빠른 걸음으로 그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지만, 미끄럼틀 놀이의 진행을 막던 그 아이도 그 모습이 재미있어 보였는지 따라오기 시작했다. 결국 그 아이는 태오와 루나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해 넘어졌고, 큰 소리로 우는 아이를 엄마가 달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이번에도 나는 피하는 쪽을 택했다. 그 아이가 태오와 루나에게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지는 않았지만, 그 아이와 우리 아이들 간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같은 공간에서 불편함을 지속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놀이터 등 아이들 간의 우연한 만남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아이가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주체가 될 가능성을 억제하기 위한 부모의 역할은 생각보다 고단하다. 미끄럼틀을 점령한 채 소리를 지르던 그 아이는, 태오와 루나와 같은 이웃 아이들이 없었다면, 아마도 즐겁게 그곳을 점유할 수 있었을 것이고, 옆에서 그 아이의 엄마가 안절부절못하며 아이를 달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자리를 피해 주는 것이 그 가족에게 배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판단이 옳았는가?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정상적인' 내 아이들이 그렇지 못한 익명의 또래 어린이와 함께 어울릴 수 없다고 무의식적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유튜버 주호민의 발달장애 아들 사건에서 돌이켜볼 수 있듯, 암묵적으로 형성된 사회적 규범에 익숙하지 못한 발달장애아를 정상인의 규범 테두리 안에서 함께 성장시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피해자를 존재하게끔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리는 옳지 못하다고 주장하기에는, '만약 그 피해자가 내 아이라면?'이라는 질문에 떳떳하게 답하지 못하는 나의 현실이 너무 크게 다가온다. 내 아이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친구와 친하게 지내렴"이라고 교육한다면, 그로 인한 피해도 감당할 수 있을까. 혹은 "저 친구와는 어울리면 안 돼. 최대한 멀리 지내"라고 말하는 것이 맞는가. 이 것을 아이들의 판단에 오롯이 맡겨버리는 것도 무책임해 보인다. 왜냐하면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선은 굉장히 사회적이며, "쟤는 우리와 달라"라는 분리의 기준은 몹시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내 아이도 분리될 수 있는 것이다. 쉽지 않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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