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때'에 할 일을 끝내는 것의 가치
십 년도 더 전에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박사과정을 위해 도착한 곳은 인구가 10만 명가량 되는 작은 대학도시(college town)였다. 큰 규모의 주립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만 3만 명이 넘었으니, 대학과 관련된 이들이 사실상 거주민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아주 전형적인 대학도시. 그 작은 도시에 큰 규모의 한국인 커뮤니티가 존재할리 만무했다. 내가 그곳에 머물던 6년 동안 한국 음식을 파는 식당은 딱 한 곳이 있었고, 그 식당을 운영하던 한국인 사장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 도시에 사는 한국인은 총 200여 명 정도였다. 그 작은 도시에서 내가 속한 학과의 한국인 선배들은 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적었고, 한국인 학생들끼리 서로 이삿짐을 날라주고 서로의 집에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는 과정에서 각자의 속사정을 조금씩이나마 골고루 알게 된 것은 당연한 흐름이었다.
그중 다른 사람들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아 보이는 한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는 내가 학교에 도착하여 첫 번째 학기를 시작할 때 이미 박사과정을 수료한 상태였다. 즉, 학위 논문만 제출하면 모든 과정을 마치고 바로 학위를 수여받을 정도로 그곳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는 의미다. 내가 그 도시에 정착을 시작할 무렵 한국인 선배들이 앞다투어 인사를 시켰던 사람도 그 선배였다. 그 선배의 집에 가면 항상 맛있는 음식이 나왔고, 내가 궁금해하던 자질구레한 생활의 요령들이 그 선배의 입에서 술술 풀어져 나왔다. 선배는 처음 보는 나에게 취미가 있는지 물었다. 골프는 치나? 테니스는 좋아하나? 왜 우리의 전공인 경제학에 대해 묻지 않고 취미에 대해 먼저 묻는지 궁금했으나, 어리바리한 어린 후배의 빠른 적응을 도우려는 호의로 받아들였다. 골프는 어디에서 배우는 것이 저렴하고, 주변 좋은 테니스장은 어디에 있는지 친절하게 알려주는 선배의 모습에 고마움을 느끼는 한편, 어떻게 하면 저런 정보들을 꿰고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대학원 교과목 수강과 과제, 조교 활동 등으로 빠르게 학교생활에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그 선배와의 연락은 자연스럽게 뜸해졌다. 선배가 학교에 거의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지도교수와의 미팅을 위해 학교에 온 선배에게 근황을 물었더니, 한국의 프로야구 시즌에는 야구 중계시간에 맞춰 깨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미국 시간으로 아침이나 낮에는 주로 잠을 잔다고 했다. 매일 한 갑 이상의 담배를 피우는 그에게 미국의 비싼 담배 값은 어떻게 충당하시는지 묻고 싶었지만 나와의 연차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한 선배에게 생활의 자질구레한 것들을 함부로 물을 수는 없었다.
몇 년 후, 내가 모든 교육과정을 마치고 박사학위 논문 만을 남겨 두었을 때도 그 선배는 졸업하지 않은 상태, 즉 학교에는 잘 오지 않지만 그 도시의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상태로 존재했다. 그와 어울리던 한국인 대부분이 학교를 떠났기 때문에 선배의 소식을 듣는 것이 쉽지 않았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면, 학교의 구성원 그 누구도 더 이상 그 선배의 안부를 궁금해하지 않게 되었다. 그 선배는 최초 입학 후 적어도 10년 이상 학교 주변에 머물렀다. 그 선배와 내가 적을 두었던 경제학과의 박사과정이 5년 과정으로 설계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학과에서 제시한 기간보다 두 배 이상 긴 기간을 학교 주변에서, 학위 논문을 완성하지 않은 채 배회했던 셈이다. 5년 차 이후에는 장학금 혜택도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데 무엇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을까? 실력이 부족했던 탓일까? 그 선배를 알던 한국인 대학원생 모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대학원에서는 2년 차 대학원생 중 가장 우수한 학생에게 1년 차 신입생들을 지도하는 역할을 맡겼는데, 선배는 그 보직도 담당했다고 하니 실제로 꽤나 능력 있는 학생이었을 것이다.
놀랍게도 이 한국인 선배와 비슷한 사례가 적지 않다. 1년 차 때 연구실을 공유했던 벨라루스 출신 선배가 있었다. 내가 학교에 도착했을 때 그는 40살은 넉넉하게 채웠을 정도로 충분히 나이가 든, 푸근한 인상의 아저씨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13년 차" 박사과정생이라고 했다. 학과에서 주최하는 세미나에서 주니어 교수들에게 어려운 질문을 던져 그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거나 시니어 교수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토론하는 모습을 보며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앞서 이야기한 한국인 선배처럼 졸업으로 나아가는 마지막 한 발자국을 내딛지 않았다. 도시의 한 술집에서 경비요원(security guard)으로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이어간다는 이야기, 이곳에서 딸을 낳았는데 어느새 사춘기가 되었다는 이야기 등, 확인되지 않았지만 능히 있을 법한 소문들이 그 선배의 주변을 떠돌았을 뿐이다. 내가 박사과정 3년 차에 올라가던 즈음, 학과에서는 그 선배에게 연구실을 비워달라는 '최후통첩'을 보냈고, 학과를 떠난 그를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벨라루스 선배 외에도 학문의 길에서 한 고비를 넘기지 못해 무너져 내린 사람이 주변에 꽤 있는 편이다. 우수한 성적으로 1, 2학년을 통과했지만 논문을 결국 쓰지 못해 모국으로 돌아간 중국인 동기, 1학년 때부터 벤츠를 끌고 다니며 주변 관광지를 돌아다녔지만 1년 차 후 자격시험(qualifying exam)을 통과하지 못해 다른 학교로 전학한 한국인 형님 등...
초보 대학원생이었던 나의 눈에는 하나같이 뛰어나보였던 그들이 대체 왜 학문의 길에 들어선 후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어떤 지점에 한없이 머물러 있었던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완벽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까? 혹은, 학문적으로 큰 족적을 남기고 싶은 야망이 있었을까? 단순히 운이 없었던 것일까? 그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후, 지도교수의 입장에서 이들과 비슷한 행동을 취하는 대학원생을 마주하게 되면서 비로소 약간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학문의 길에 들어선 사람 중 누군가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쪽을 택하는 경우도 있다. 학위를 찾아가는 긴 여정의 어느 한 지점에서 눌러앉아 더 이상 전진하지 않으려는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학 초기에 가졌던 기대와는 달리 현실에 벽에서 주춤거리는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해 외면을 거듭한 끝에 도달한 곳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유학 연옥' 속에서의 안주였다. 적당히 뜨겁고 적당히 차가운, 그래서 자신이 서서히 익어간다는 사실도 알 수 없는 냄비 속의 개구리 같은 존재가 되어 가는 것이다.
몇 년 전부터 나와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는 중국인 대학원생이 있었다. 지도교수의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는 학생이다. 나이는 나와 동갑으로 이미 40대에 접어들었는데 중국에 아내와 아들이 있으며, 최근 부모 두 명이 모두 큰 수술을 받았다. 본인의 수입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아내가 중국에서 일을 하며 남편 뒷바라지와 시부모 봉양, 아들의 양육까지 모두 책임지도 있었다. 이러한 사정을 알고 있기에 논문 완성 시점을 최대한 앞당기기 위해 이런저런 제안도 하고 지시도 해봤지만 가지고 오는 결과물은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읍소도 해보고 윽박도 질러 보았지만 이 학생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다. 항상 웃는 얼굴에 여유로움이 가득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실증분석 결과에 대한 해석이 부족하니 선행연구 학습을 통해 관련 배경지식을 보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을 전달하였는데, 그 후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길래 뭘 하고 있나 물어보니 경제학 교과서 한 권을 통째로 정독하고 있다며, 관련 지식을 얻게 되어 행복하다고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장 마무리지어야 하는 논문의 기한이 코 앞에 있는데 학과의 각종 행사에 커다란 DSLR 카메라를 가지고 와서 단체사진을 찍어주거나 중국인 후배들의 대소사에 참견하는 등, 본인의 논문을 발전시키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많은 고민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그에게는 이 과정을 끝내고자 하는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아내가 용돈을 꼬박꼬박 보내줄 뿐 아니라 양육과 봉양의 의무에서는 완전히 해방된 지금의 상태를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가족의 구성원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양육을 책임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나의 상식은 그에게 해당되지 않는 듯 보였다. 참다못해 그의 아내가 마침 한국에 방문한 틈을 노려 3자 대면을 시도해 봤지만, 그의 아내에게서 "남편이 공부를 참 좋아해요. 하고 싶은 일만 하려 합니다. 교수님께서 잘 지도해 주시면 안 될까요"라는 힘 빠지는 대답만 돌아왔다. 아내도 이미 그런 남편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고,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기에 모든 것을 포기한 눈치였다.
결국 그 학생에게 중국으로 돌아가던지, 다른 지도교수를 찾아보라는 통보를 전달했다. 그는 논문을 완성시킬 수 있도록 학생을 학문적으로 지도한다는 나의 의무 밖에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앞서 이야기한 한국인 선배, 벨라루스 선배, 그리고 중국인 대학원생 모두 우리가 흔히 '유학 낭인'이라고 부르는 유형의 사람들이다. 해외 대학에 진학하고 타지에서 생활하는 과정에서 많은 돈과 시간을 쏟아부었지만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들을 일컫는 속어다. 이들은 과거의 생활로 돌아가지 못할 정도로 너무 먼 길을 왔지만 그 여정을 확실하게 결착 지을 정도의 의지와 노력을 보이지 못한 채 머나먼 외국의 '연옥' 어딘가에서 떠돌며 점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자기 팔자 자기가 결정하는 것이라고 속 편하게 생각하면 그만일 수도 있지만, 이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비용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주변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지불해야 하는 희생이다. 유학은 보통 모국보다 더 나은 교육환경을 제공하는 선진국으로 가기 마련이다. 모국에서 제공하지 못하는 고품질의 교육서비스를 누리기 위해 큰 비용을 지불하고 외국으로 떠난다. 경제적으로 아주 유복한 형편이 아닌 다음에야 이 과정에서 주변의 도움을 받는 것은 필수적이고, 유학의 성과를 기다리는 긴 기간 동안 가족 등 주변인들은 당사자만큼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물론, 학위를 받지 못한다고 해서 유학의 전 과정을 '실패'로 규정짓는 것은 위험하다. 내가 6년 만에 학위를 받고 돌아오는 귀국길에 마중 나온 아버지는 "나는 네가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올 줄 알았다. 그래도 영어라도 배우고 오면 되겠지, 싶어 유학을 보낸 거다"라고 말했다. 아버지의 말씀처럼 유학 과정에서 누린 성장의 기쁨을 이후의 삶에 적극 녹여낼 수 있다면, 학위 획득과 별개로 당사자와 주변인 모두 진이 크게 빠지지 않을 정도의 보람은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소개한 사례에 등장하는 '낭인'들은 졸업이라는 확실한 목표로 나아가지 않고 주저앉아 버리는 쪽을 택했다는 점에서 들인 노력을 무색하게 하는 힘 빠지는 지점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들을 그저 용기 없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더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을 것이다. 5년으로 설계된 대학원 과정을 내가 6년 만에 졸업한 이유도 사실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는 나오지 않았고, 고비고비마다 벽에 부딪히는 느낌이었다. 지도교수님은 매주 자신을 찾아와 모르는 것을 물어보라고 하셨지만,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단계에 접어들었을 때 이대로 주저앉아버릴까 덜컥 두려워졌다. 그때부터 어떤 '병'이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논문을 다시 시작하지 못하는 병, 책을 펴지 못하는 병, 지도교수를 찾아가지 못하는 병이었다. 논문 작성 파일을 여는 것이 두려워 하루 종일 집을 청소하거나 요리를 하기 일쑤였고, 지도교수님과의 미팅 날짜를 어떻게든 연기하기 위해 핑계를 찾아 헤맸다. 논문 작성을 차일피일 미루니 작성 기한을 맞추지 못하는 것은 물론, 논문의 완성도 역시 서서히 떨어져 갔다. 우여곡절 끝에 1년 늦게 졸업을 할 수 있었지만, 당시 지도교수님은 "금전적인 문제만 없었다면 너를 지금 졸업시키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냉정하게 평가했다. 그만큼 졸업논문의 완성도는 엉망이었지만, 나는 앞서 경험한 한국인 선배와 벨라루스 선배에 대한 기억 때문에 졸업이 늦어지는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때 조금 더 용기를 냈다면, 자신의 약점과 한계를 충분히 인정하고 주어진 여건 안에서 최선의 결과를 내기 위해 노력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최근까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이 교훈을 너무 늦게 알아버린 탓이다.
뒷걸음치지 않고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용기. 상상하는 자신의 모습과 다른, 그보다 훨씬 못한 자신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인정하는 용기. 자신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그릇된 상상력으로 탄생한,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신화'를 적극적으로 깨부수고 현실로 돌아와 땅 위에 발을 딛고 설 용기. 이는 타지에서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공부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 입장에서 이 정도의 겸손함을 챙기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잘난 척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남들 못지않게 공부를 해왔다는 자신감 정도는 충만한 상태에서 학위과정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스스로에 대한 강한 믿음은 미래가 불투명한 공부를 뚝심 있게 해 나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지만, 이것이 너무 강할 경우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일을 그르치기도 한다. 나의 한계는 어디인지, 플랜 B는 어떻게 세워야 할 것인지, 어느 시점에서 '포기'해야 할 것인지 냉정하게 판단하고 실행해야 한다.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너무 쓴 약이지만, 꼭 삼켜야 하는 보약이기도 하다.
앞서 이야기한 그 중국인 대학원생은 최근 다른 지도교수를 구했다. 며칠 전 나를 찾아왔길래 새로운 지도교수와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어떠한 것들을 챙겨야 하는지 소상히 알려주었다. 얼마나 알아 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제발 그의 여정에 마침표가 존재하기를 간절히 빌었다. 어떤 방식으로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