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무대책으로 페루로 갔던 날 이야기
90년 12월, 나는 4개월 일정으로 남미로 가기 위해 뉴질랜드를 떠났다. 오클랜드 공항을 떠나 하와이에 한번 들러 LA를 거쳐 페루로 가는 엄청 돌아가는 여정이었다. 왜 그런 복잡한 여정을 택했는지는 다른 글에서 소개하고 싶다.
90년 당시, 대부분의 남미 국가에 가기 위해서 한국사람은 비자를 받아야 했다. 그게 당시 한국의 위상이었다. 지금은 소위 여권 파워가 세계 최고 수준이니 대부분 무비자로 여행하게 됐지만, 당시에는 비자가 필요한 나라가 꽤 많았다. 그런 와중에 페루는 무비자 입국이 가능했으니, 요즘 말로 꿀이었다. 그래서 난 일단 페루로 입국해 차례로 다음 여행국 비자를 받아 여행하는 방식으로 페루행을 택했다. 한국에서 비자 신청을 하고 출발할 수도 있었지만 비자 수수료가 꽤 비쌌다. 그런데 남미에서 하면 대부분의 나라에서 비자를 무료로 발급해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길을 나섰다. (사진에 보면 파라과이 비자를 페루에서 무료로 발급받았다.)
LA를 떠난 비행기에서 내 옆에 앉으신 분은 일본계 페루인 아주머니였다. 당시 내 기억이 맞다면 페루의 대통령은 일본계 후지모리였다. 그분은 영어를 꽤 하셨기에 대화가 가능했다. 대화를 하다보니 이분의 얼굴에 근심스런 표정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페루를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어를 한 마디도 못하고, 현지에 아는 사람도 없고, 공항에 마중나올 사람도 없고, 그냥 유스호스텔 주소 하나 달랑 들고 가는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분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무대책 청년을 걱정해주셨다. 그래서 혹시 공항에 누가 픽업하러 나오는가 물으니, 사촌동생이 차를 갖고 나온다고 하셨다. 나는 그 차를 좀 얻어탈 수 있는가 여쭤봤다. 그랬더니 얼마든지 태워주겠다 하셨다. 그렇게 기내에서 만난 분의 호의로 난 리마 시내로 입성했고, 유스호스텔을 어렵지 않게 찾아 들어갔다. 짐을 풀고 나와 일단 여행자 수표를 현지 돈으로 환전했다. 다음은 길거리 음식으로 배를 채웠다. 그리고 난 공중전화 박스로 갔다. 거기에서 두툼한 전화번호부를 집어 들고 김씨 이름을 가진 분을 찾았다. 예상대로 꽤 많은 김씨가 등재되어 있었다. 난 그 중의 한 분, 김순업씨를 찍어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아드신 분께 김순업씨 댁이 맞는지 묻자 그렇다고 하신다. 그래서 난 이마저마 해서 한국에서 오늘 페루에 온 사람인데, 내일부터 선생님 댁에 머물 수 있을지 여쭤 받다. 전화선 반대편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도저히 상상도 못했던 뜬금 없는 전화에 분명 당황을 하신 것이다. 이윽고 호흡과 정신을 가다듬으신 김순업씨는 가족들과 잠시 두런두런 상의를 하시고 오라고 하셨다! 주소를 일단 받아들었고, 물론 머무는 동안 비용은 드리겠다고 말씀드렸다.
다음 날 난 유스호스텔을 나와 김순업씨 댁을 찾았고, 그곳에 며칠 머물면서 다음 여행국 비자 신청을 위해 대사관 정보도 얻고, 현지 정보도 확인하고 한국 음식도 먹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과거 아날로그 시대, 한인 여행객이 그리 많지 않던 시절이니 가능했던 일들이다.
지금 돌아보면 낯선 청년, 생면부지의 사람의 전화 한 통에 본인들 가정을 개방해 주신 김선생님 가족께 정말 감사했다. 그렇게 나의 4개월 남미 여정은 제법 짜릿하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