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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Jul 06. 2021

[자끄엘륄입문]3장 기술 체계 vs 자유의 나라

[자끄엘륄입문]



엘륄은 20세기의 탁월한 기술철학자다. 그는 기술을 분석함으로써 20세기 사회를 이해하려고 했다. 기술을 통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영역을 분석했고 기술을 시대정신이라고 생각했다.     

1용어 

 1)떼끄니끄 (technique)

기술의 정의: 광범위한 의미로서의 기술을 의미한다. 피아노 치는 기술, 스키 타는 기술 등...

그런데 엘륄에게 기술은 현대 사회를 결정적으로 구성하고 움직이는 시대정신이자 강한 권세로 보았다. 따라서 기술은 현대사회라는 컨텍스트에서 살펴야 한다. 그에게 기술은 테크놀로지,과학기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술이란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합리적으로 고안되며, 절대적 효율성을 갖는 방법들의 총체’다. 즉 기술은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적용되며, 특정분과의 기술이 아닌 ‘수단과 방법들의 총체성’을 기술로 본다. 그리고 ‘최상의 효율성과 합리성’의 특징을 기술이 추구한다.      

스포츠 기술 : 과거의 스포츠는 자발적이고 선수는 각자의 스타일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의 스포츠는 모든 것이 계획적이다. 음식의 양과 질, 수면시간 등 모든 것이 매뉴얼에 의해 통제된다. 선수 고유의 개성이나 스타일은 매뉴얼에 의해 조정되거나 제거된다. 결과라는 최상의 성적을 거두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그것 하나라고 보기 때문. 선수는 기술적으로 계산되고 조정되고, 자신을 거기에 맞추어야 한다.     

유혹의 기술: 이성을 유혹하는 데에도 기술이 이용된다. 옷, 화장, 헤어스타일, 걸음걸이, 말투 등도 목표에 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강요된다.      

2)떼끄놀로지 

기술담화란: 엘륄에게 떼끄놀로지란 기술에 얽힌 이야기, 기술이 유포한 이념이나 이데올로기 등 전부를 포괄하는 말이다. 즉 기술 담화다. 만약 자동차학원에서 운전기술을 배운다고 할때는 테크니크이지만, 이런 자동차의 유용성이나 문제점 등을 친구와 얘기한다면 떼끄놀로지를 의미하는 셈이다.      

기술담화의 범람:그런데 엘륄은 기술이 허풍을 떤다고 비판한다.즉 기술이 인류를 유토피아에 도달하게 해준다는 근거없는 낙관론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러다보니 현대인들은 기술의 위험성을 간과하고 맹목적으로 신뢰하게 된다. 설령 문제가 생겨도 기술발전을 통해 점차 사라질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기술담화는 구체적으로 세가지로 정리가능하다. 1) 기술의 힘과 다양성, 성공, 완벽함에 대한 허세, 2) 기술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은폐 3)인간과 기계의 관계성에 대한 강조 등을 통해 기술에 대한 비판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2. 새로운 기술이 출현하다.     

1)전통기술과 현대기술 

 새로운 기술의 특징: 과거의 기술은 제한된 분야에만 적용되었고, 공간적, 시간적으로도 제약이 컸었다. 그리고 기술은 개인의 선택에 의해 제한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술은 이 제약을 모두 벗어버렸고, 그래서 엘륄은 기술에 대해 우려하게 되는 것이다. 기술은 영역을 넘어 연결되고 전지구적으로 공간을 초월하며, 시대의 발전으로 시간 초월 또한 이뤄낸다. 그리고 개인의 선택영역을 넘어서서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되었다.     

 2)현대 기술의 여섯 가지 특징 

기술적 선택의 자동성

 -현대기술은 ‘단 하나의 최선의 수단’ 이라는 효율성의 원리에 충실하다. 따라서 다양한 수단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 오직 최고로 효율적인 수단만을 ‘자동적’으로 택할 뿐이다. 여기서 인간의 개성,의지,기호,취향 등은 배제되고, 오로지 순수한 기술적인 방식을 통해서만 수단이 결정된다.

자기확장성

 - 기술은 진보한다. 그리고 기술은 비가역적인 진보다. 기술이 급격하게 빨라진 배경에는 그만큼 다수의 사람들이 기술발전에 매진하기 때문이다. 한 분야의 기술발전의 방향이 잡히게 되면 수많은 기술자가 거기에 달라붙어 기술을 정교화, 세련화시키며 자기확장을 해간다.

일원주의

 - 기술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분리될 수 없다. 종종 기술은 사람하기 나름이라고 얘기하지만(도구론적 관점) 그러나 엘륄은 기술은 기술로써 존재한다고 반박한다. 즉 기술이란 그것이 활용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 자체를 의미한다. 기술은 모든 것에 사용되게 되어있다. 그런 기술의 각 사용결과에 대해 우리가 가치판단을 할 뿐이다. 따라서 기술의 선한 활용, 악한 활용은 기술 자체와 무관하며, 기술은 우리가 평가하는 좋은 방향, 나쁜 방향 모두 실현하게 되어있다. 즉 기술에 윤리를 도입한다는 것은 순수한 이상주의일 뿐이다. 기술이 윤리에 구속되지 않고 오히려 기술 자체가 새로운 윤리를 만들어 간다. 그리고 이런 기술의 일원성은 자기확장성과 결합하여 점점 더 커지게 된다. 즉 경찰이 사회를 감시하는 기술의 발달 속에 장단점이 모두 있는데, 그런 기술이 선전기술,행정기술,재정기술 등과 다시 만나서 확장하고, 그 확장은 다시 다양한 문제의 가능성을 실현한다. 

기술의 결합필요성

 - 하나의 기술은 새로운 기술의 필요를 촉진하고, 새로운 기술은 이전 기술과 결합해 간다. 즉 획기적인 신기술은 기존의 평형상태를 깨뜨리고 새로운 상태를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기계와 기술이 또 생기고, 조합되고, 조직된다. (1773년의 플라잉셔틀은 직물을 짜는 기계였다. 이에 따라 실의 수요가 커지고, 실을 만드는 제니방적기가 생기고, 실이 많으니 직조기도 생겨난다. 이 과정에서 조직기술과 작업기술이 필요해지고, 생산된 수많은 상품을 내다팔 상업적 기술이 필요해진다. 그리고 이렇게 거대화된 산업을 관리하는 국가의 통제기술 또한 발생한다)

기술의 보편성

 - 기술은 지역과 국가를 넘어, 시대를 넘어 하나의 거대한 전체를 이루고 있다. 기술은 특수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현상이며 보편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구에 존재하는 수많은 문화와 문명들이 기술 덕분에 동질화되고 있다. 효율성의 힘이 다른 문화와 문명을 정복하는 시대다. 기술이 들어가면 기존의 사회문화 전체가 연쇄적으로 바뀌게 되어있고 결국 그 기술을 주도하는 방식에 의해 동질적인 문화가 되는 것이다. 

바. 기술의 자율성

 - 기술의 진보와 발전에 개입할 수 있는 어떤 힘도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술의 자율성이다. 기술은 기술에 의해서 진보, 발전한다. 모든 가능한 기술은 기어이 활용되고 말 듯이 국가도 종교도 기술의 발전 자체를 막아서기는 무리다. 그리고 인간과 기술의 관계 또한 자율성으로 분리된다. 인간은 예측 불가능한 존재인 만큼 모든 정확도와 예측을 중시하는 기술철학과 상충된다. 따라서 기술은 원리적으로 인간과 맞지 않는 만큼 인간을 배제하는 쪽으로 발전한다. 어쩌면 이는 인간존재가 ‘자유’라는 실존적 특성을 갖는 것과 연관된다. 인간이 예측불가능하다는 것은 인간이 곧 자유롭다는 것이다. 반면 기술은 그 자유를 통제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자유와 기술 중 하나를 택하고,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그러나 현대인 대부분은 자유를 포기하고 있다.      

3. 세 가지 기술

 엘륄이 문제 삼는 기술이란 전자,전기자동차 등 개별분야의 기술이 아니다그 이면에 존재하는 논리와 구조그리고 정신을 문제 삼는 것이고그게 그에게 기술의 의미다.

 * 기술 현상

 - 기술적 작업은 노동자 수준에서 일어나는 활동을 말한다. 기술자의 작업 행위 모두는 기술적 작업이다. 그러나 과거와 현대의 기술적 작업 사이에 차이가 있는데, 과거의 기술은 무의식적이고, 자연발생적이고, 실험적이다.( 배고픈 원시인이 야자나무 열매를 발견하는 것을 계기로 야자나무를 능숙하게 따는 기술적 작업이 생겨난다) 그런데 현대 기술은 책상 위에서 시작된다. 즉 이성적 판단과 의식이라는 두 가지 개념이 개입되는 것이다. 원하는 결과에 이를 수 있는 최선의 수단과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것이 엘륄이 말하는 기술 현상이다. 

 기술적 작업 이전에 이성적 판단과 의식의 개입으로 최선의 수단을 찾으려는 것을 ‘기술 현상’이라고 일컫는다. 오늘날 기술은 하나의 정신이자 권세다. 엘륄은 이 중 세 가지 기술을 분석하는데 경제기술, 국가기술, 인간기술이다.


 1) 경제기술

  - 원래 기술과 경제는 별개다. 그러나 19세기 새로운 기술의 출현과 함께 사회도 변하기 시작했다. 기술은 경제에 밀접한 영향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20세기 들어 경제는 물리학적 방법론을 도입한다. 즉 경제는 기술에 종속되기 시작한다. 경제란 통계학, 회계 기술, 모델 활용, 여론 분석을 통해 정확하게 관측하고 예측하는 기술적 작업이 되었다. 그리고 경제계획이 중요해진다. 보수든 진보든 분야와 정도만 차이가 있을 뿐, 이제 경제는 국가에 의해서 계획되고 통제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로써 개인의 중요성은 급격히 사라지고 경제활동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것도 결국 효율성의 원리 뿐이다. 그리고 인간은 경제 체제의 부속으로 전락한다. 오늘날 노동하지 않는 백수는 인간도 아니게 된다. 선전에 따라 만들어진 상품생산, 광고, 소비라는 끊임없는 악순환은 인간의 영혼을 파괴한다.

 2) 국가기술 혹은 조직기술

  - 과거 국가의 통치는 도덕적 철학적 문제였다. 그런데 이제는 기술이 국가를 집어삼킨다. 거대한 기술환경에 맞게 사회는 변모한다. 그리고 이 변화 속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할 주체가 필요해지고 거기서 국가가 새로운 위상을 갖게 된다.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기관. 국가의 책임과 권능이 절대적이 된 것이다. 국가는 국민 모두의 공적이면서도 사적 생활 전반에 대한 보호자로 나선다. 국가는 교육기술, 군사기술, 산업 및 상업기술, 보험 및 금융기술, 조직기술, 심리기술 등 온갖 종류의 기술을 끌어모아 거대한 기술복합체가 되었다.

 현대 정치에서 이념은 더 이상 쓸모가 없다. 국가는 기술에 종속되어 끌려간다. 오직 효율성의 원리 앞에 이데올로기는 힘을 잃는다. 법은 ‘정의의 추구’가 아니라 ‘질서 유지의 도구’에 불과하다.

 3) 인간기술 

 - 인간기술이란 인간과 기술을 조화시키는 기술이다. 이러한 기술이 필요하게 된 이유는 기술의 혁명적 발전 앞에 인간이 적응하지 못할 정도로 되었기 때문이다. 시계 없이도 잘 살던 인류는 이제 시계에 종속된 삶을 살아간다. 시계의 흐름대로 일과가 짜임새 있게 돌아간다. 모든 것이 너무 빨리, 너무 많이 변했다. 이 모든 변화가 기술에서 왔다. 자유가 인간의 실존적 특징인 만큼 인간은 반기술적이다. 그런데 기술이 인간의 자유를 뿌리부터 제거해나간다. 인간과 기술의 필연적 충돌, 외롭고, 미칠 것 같은 분노와 스트레스라는 이름으로 현대병이 생겨난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인간을 닮아가는 기술: 인간기술은 그래서 인간과 기술의 조화를 목표로 한다. 기술을 인간화시키면서 인간을 기술화시키는 것. 따라서 현대 기술은 나날이 인간을 닮아간다. 기계는 더 이상 차가운 이미지가 아니다. 인간의 감성을 터치하려고 한다. 

 -기계를 닮아가는 인간인간기술의 사례로 교육기술이 있다. 정상적이고 선량한 인간을 육성하려고 등교, 하교, 수업시간이라는 시간 규율이 생겨난다. 그리고 매년 한 학년씩 올라가는 등 인간이 기계처럼 움직이도록 훈련을 받는 것이다. 학과의 내용도 비판 정신을 훈련하지 않고 직업교육이 되어갈 뿐이다. 원래 인문학은 자유를 가르치는 기술이었으나 이제 학문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지 않는다. 인간을 기계답게 취급하고 취업과 연봉만을 생각하도록 내몬다. 

 -선전오늘날 대중매체는 대중을 공기처럼 둘러싸고 끊임없이 선전을 전달한다. 그리고 파편화된 사람들은 대중매체로 인해 사이비 공동체의식을 소유하게 된다. 즉 선전은 대중에게 공통의 기질과 심리 상태를 창조한다. 이로인해 인간은 선전이 전해 준 생각들을 제 것인양 착각하며 종속되게 된다. 현대인은 결코 선전 밖으로, 기술 밖으로 나갈 생각을 못한다. 선전은 인위적으로 스타를 만들어 경외의 대상으로 삼거나 추상적이고 가상적 생활환경을 만들어내고 대중으로하여금 어딘가에 정주하고 있다는 귀속감을 준다. 영화,티비,캠핑 등의 오락등은 기술 사회에서 인간이 겪게 되는 무력감, 무가치, 분노, 방향상실의 문제를 누그러뜨리는 해소 기제인데 선전이 그것을 파급효과로 만들어내는 셈이다. 

 - 인간-기계 복합체의 출현 인간 기술의 결과 인간-기계 복합체가 만들어진다. 기술사회에 정상적으로 적응된 이상적 인간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은 기술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음에도 그렇지 않은 것 같은 착각 속에서 거짓 해방감을 느낀다. 그리고 인간의 본능과 영혼 속까지 기술과 완벽하게 통합되려 한다.      

4. 기술 체계 

 1)기계가 되는 세상 

엘륄은 54년에 [기술의 역사]라는 책을 통해 이러한 비판을 수행했다.그리고 77년에 [기술체계]라는 책으로 이론을 보완한다. 여기서 ‘체계’라는 개념이 중요하다. 오늘날 세계는 기술 사회의 단계를 넘어서서 기술 체계의 단계로 진입한 것이다. 기술 체계는 이제 기술환경, 혹은 기술 사회가 아예 거대한 하나의 기계가 되어가고 있음을 밝힌다. 그 많은 기계와 기술들이 이제는 하나의 거대한 기계로 결합하고 있다. 뇌와 연결된 신체 조직처럼 여러 기계는 하나의 정보시스템을 갖춘 일련의 연속된 결합체다. 오늘날의 인터넷이 그 예가 된다. 과거보다 훨씬 유기적이고 긴밀하며 하나로 결합한다. 이제는 기술적 환경이 아니라 환경자체가 기술이고 기계다.      

 2) 새로운 사회에 대한 몇가지 개념들

60-70년대에 여러학자가 새로운 시대에 대한 의견을 내놓았다. 다니엘 벨의 ‘후기 산업사회’, 클라크의 ‘서비스 혹은 3차 산업사회’ , 맥루한의 ‘뉴미디어 사회’ , 기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 브르제진스키의 ‘정보화시대’가 있다.      

5. 파국을 향하여 

 1)불길한 전조 

 엘륄은 기술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발전해 가는 사실을 지적한다. 목적지 없는 무한질주이기에 그 누구도 그 끝을 모른다는 점이 문제다. 무엇 때문에 기술이 발전하는 것이며, 어디까지 발전할 것인가?

 엘륄은 기술이 인간의 모습을 띠어가는 모습에 경악했고 인간이 기계화되는 것에 절망했다. 80년대가 지나가며 기술에 대한 일말의 의심마저 사라졌다. 이제 남아있는 문제는 기술의 문제일뿐 시간만 지나면 기술에 의해 모든 문제가 해결될거라는 낙관론에 빠져있다. 청소년들의 말투, 아이돌그룹의 노래, 춤, 모두가 기계와 닮아간다.

 2)현대교회의 슬픈초상-테크노 처치

 교회는 이제 기술의 전도자가 되었다. 시네마를 방불케하는 본당 홀, 입체 음향 시트템, 콘서트와 같은 경배와 찬양, 위성 생중계, 컴퓨터로 관리되는 교회행정...‘가장 효과적인 방법’의 전도와 양육 시스템과 같이 통계수치와 사회학 방법론이 선교전략이 되었다. 교회의 전도는 이제 이웃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다.      

6. 변증법적 방법론 

 그렇다면 엘륄에게 기술은 악인가? 그렇지 않다. 엘륄은 기술이나 상품 그 자체를 악이라고 비판한 적은 없다. 컴퓨터는 컴퓨터일 뿐이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중립이다. 그에게 현대 기술은 하나님의 작업의 일면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얼마든지 인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엘륄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닌 기술체계에 대한 비판과 우려다. 자동차, 티비, 컴퓨터는 ‘오직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 들어올 때만이 자체의 의미, 힘과 효과를 가지기 때문이다’ 즉 기술은 사회적인 컨텍스트 속에서, 즉 기술체계안에서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 현대사회라는 컨텍스트 내에서 기술은 인간을 파괴하고, 소외시키는 악이 된다. 

 그렇다면 기술이 악이라면 우리는 기술을 포기해야 하는가? 엘륄에게는 변증법적 방법론이 있다. 기술은 악이지만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기술을 사용할 수밖에 없고, 사용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사용하는 기술은 (기술체계안에서) 악이다. 그는 변증법안에서 이 둘을 끌어안는다.          

7. 자유와 필연의 변증법 

 1)자유자

자유자 하나님 – 자유는 하나님께 속해 있다. 하나님만이 참 자유하시다. 즉 인간 자유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다. 칼바르트의 전적타자론처럼 엘륄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전적 타자로서의 하나님은 세상의 어떠한 규칙과 제도, 법칙으로도 포섭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계에서 자유롭다. 오히려 자유라고 말하는 것 조차 형이상학의 덫에 걸릴 수 있기에 말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하나님의 자유를 논할 수 있는 자격은 하나님 한 분 뿐이다. 따라서 인간의 기술, 국가, 돈의 질서, 폭력에 포섭되지 않은 유일한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런 분이 인간을 자유롭게 창소하셨다.      

소외최초의 인간이 자유를 누렸으나 곧 타락과 함께 죽음의 세상으로 들어왔고 여기서 필연의 질서가 개입된다. 혹은 필연의 질서에 인간이 편입된다. 밥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인간. 밥을 위해 돈이 필요하고, 돈을 위해 일해야 한다. 이것이 필연의 질서다. 국가,기술,선전,혁명, 폭력 등 모두 필연의 질서에 속한다. 우리는 육체와 정욕의 짐에 눌려있고,상황과 여론, 사회,문화기능에 지배당한다. 이처럼 필연의 질서에 속박당한 인간의 모습을 ‘소외’로 표현했다.      

자유롭게 하시는 자유인그리스도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의 노예인 우리에게 들어오신다. 이것이 은총이자, 신비이고 기적이다. 이것이 인간에게 알려질 때 이것을 ‘계시’라고 한다. 일반 종교가 인간이 신을 향해 올라가는 행위라면 계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로 내려오는 은총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해방하시고,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내려오신다. ‘하나님의 행위는 계시를 믿는 사람을 해방하며, 본질적이 아니라 실존적으로 자유로운 인간이 되게 한다.’

그리스도는 해방자다. 예수는 모든 필연의 질서를 끊고 자유를 친히 살아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경제,정치,종교의 권력을 영원히 이기셨고,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필연 질서의 근거인 죽음을 파괴하셨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모든 필연의 질서는 붕괴한다.      

자유롭게 하시는 성령성령은 자유롭게 하시는 영이다. 성령으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계시의 담지자고 자유의 담지자다. 그들의 삶은 체계화할 수도, 규범화할 수도 없으며, 윤리화할 수도 없다. 그리스도교 윤리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자유인들의 행위가 어찌 강령으로 체계화될 수 있겠는가? 물론 그들도 이 세상에 발딛고 살아야 하기에 모종의 윤리적 삶을 취하는 것은 불가피하겠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임시적이고, 변증적인 경우에 한해서이다.      

2) 필연의 윤리기술 윤리      

 오늘날 기술은 필연의 질서의 극치다. 기술은 인간에게서 모든 자유를 제거한다. 기술의 발전방향은 자유가 제거되는 방향이다. 그러면 인간은 비인간으로 전락한다. 기술은 새로운 덕과 인간성, 윤리를 창조해냈다. 기술윤리의 핵심은 한마디로 ‘기술이 선이고, 그래서 기술에 참여하라’이다. 

 모든 것이 기술로 판단되는 세계다. 정치와 경제, 나아가 종교까지도 그러하다. 진정한 의미의 비판정신과 창조성은 어디있는가? 기술체계를 벗어나려는 시도자체가 비정상으로 취급받는다. 물질적이고 결과적인 성공에 기술이 항상 기준이다. 

 오늘날 교회강단은 성공하기 위해 믿음을 가지라고 설교한다. 성공하기 위해 새벽예배에 가고, 그래야 은혜받는다고 믿는다. 그래서 세상을 변혁시키겠다는 그리스도인들조차 절대로 기술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와 함께 전통, 종교, 문화 등 기존의 다른 덕과 가치, 도덕은 사라진다. 혹은 기술윤리에 맞게 재해석된다. 기술윤리는 무엇보다 직업윤리를 말한다. 직업에 종사하는 것이 선한 인간의 척도다. 그리고 기술윤리는 집단윤리로써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백가쟁명은 허락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의 윤리뿐이고, 그래서 기술윤리는 전체주의로 귀결된다. 또한 기술윤리는 개인 윤리를 제거한다. 공적윤리와 사적윤리의 병존이 힘들어지고 개별인간의 영혼까지 기계화 한다.

 3)자유의 윤리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로 인해 필연의 질서에서 구원받았다고 해도 우리가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는 없다.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필연의 질서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은 장차 죽음이 영원히 사라지고, 우리를 얽매이는 모든 것,필연의 질서에서 완전히 벗어날 날을 알고 또 기다린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소망의 담지자다. 이 소망은 날마다 기도할 때 기도의 자리에 실현된다. 기도자에게 소망이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이미 도래했다는 것을 경험한다. 

 자유는 소망을 굳게 붙잡는 자들의 행동 양식이다. 그래서 그 자유는 반드시 행동으로 드러난다. 자유는 그저 심령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자유는 곧 윤리다. 엘륄은 이를 ‘자유의 윤리’라고 불렀다. 비록 우리의 자유는 한계를 갖고 있고 그래서 마지막 때까지는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는 없다해도 폐쇄적인 반역의 체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힘이다. 인간을 옥죄는 억압적 지배질서를 관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예를 들어 인간은 돈의 질서 가운데 산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필연의 질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질서 안에서도 돈의 질서를 거부할 수 있다. 거저 줌을 통해서 돈의 질서속에 은총의 질서를 관통시킨다. 폭력 또한 필연의 질서이지만 우리는 사랑의 폭력으로 혹은 무능력이 아닌 비능력으로 폭력의 필연성을 거부할 수 있다.      

 4)자유의 투쟁 

 기술 윤리로 인해 지독한 순응주의가 온 세상에 만연하다. 이런 세상에 그리스도인은 부름을 받았다. 이 세상을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일부가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비순응자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성경에는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우리의 실존을 그린다. 우리는 자유롭게 살도록 부름 받았다. 이 세상의 보험, 대책, 안전, 조직망 다 허위다. 우리는 오직 성령의 인도만을 믿어야 한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으로부터 뿌리뽑힌 자다. 

 기술체계로부터 뿌리뽑힌 위치에서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날마다의 싸움. 흡수되지 않기 위한 싸움이다. 우리는 자유인,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자유인의 신분을 가졌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세상의 노예이고 기술 체계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모순과 긴장이 우리의 노예신분을 변형시킨다. 

 자유의 투쟁을 위해 무엇보다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 우리는 자유의 실습을 해야 한다. 현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 우리가 취할 행동 양식과 생활 방식에 대해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한 사람으로 살아남는 것, 자유인으로 생존해 내는 것이 어떤 혁명보다 우선해야 한다. 또한 이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제시하는 어떤 목표에도 무관심해야 한다. 그것들은 허위다. 마지막으로 현대의 중심개념들을 거부해야 한다. 모든 신화는 거짓이기에 거부되어야 한다. 경제 성장, 국력 신장, 기술의 발전이 우리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저 소외되고 노예가 될 뿐이다.      


 *엘륄은 비관적인 전망과 이 위기의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뭔가 느끼고 행동하길 바랬다. 이 판도와 흐름을 바꾸길 원했던 것이다. 그 혁명은 오직 은총으로 가능하고, 그 은총을 받은 자들, 자유로운 자들의 행동을 통해서 가능하다. 

 안정감과 귀속감을 주는 기술체계를 떠나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주님의 명령을 따라서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그곳으로 걸음을 옮겨야 한다. 오직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약속뿐이다. 우리를 해방하는 자유의 나라. 결국 우리는 자유의 모험을 해야만 한다. 기술체계인가 자유의 나라인가?


https://www.youtube.com/watch?v=ShVbaVFA5L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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