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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Sep 06. 2021

개선인가,혁명인가-칸트의 윤리와 창조성

"어떤 사람이 비단 법적으로뿐만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준칙의 기초가 불순한 한 점차적인 개선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인간 마음속의 소질의 혁명을 통해 서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ㆍㆍㆍㆍㆍㆍㆍ 오직 새로운 창조와도 같은 일종의 재생을 통해서 새로운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칸트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중에서


보통 칸트의 도덕원칙을 생각하면

의무론, 절대론적 윤리가 떠오른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상대적 관점을 배격하고

결과적으로 좋은 것이 옳다는 관점도 비판하면서

오로지 '옳은'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것이 윤리라고 보는

칸트의 입장은 종종 보수적인 이미지나 꽉 막힌 꼰대 선생의 얼굴이 떠오르고는 한다.

'대체 그걸 누가 지키겠는가' 혹은

'설령 한두번 지키더라도 어떻게 항상 옳은 선택을 할 수 있겠는가' 등의 반박을 해보기 마련이다.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너무나 바뀌기 어려운 것이 인간의 삶 아니던가.

매일마다 다짐하고 또 다짐해도

나 자신의 나약함에 넘어질 때가 한 두번이던가.

몇번이고 치솟는 짜증을,

누군가에게 분노를 그냥 쏟아내고자 하는 이기성이

하루에도 몇번이고 꾸역꾸역 비집고 나오는 역겨운 매개체가 바로 '나'아니던가.

그래서 인간은 수없이 절망한다.


그런데 칸트는 지금 혁명과 창조를 말한다.

'노력과 개선' 따위가 아니다.

그 칸트가 '혁명과 창조'를 제시한다.


어랏. 순간 키에르케고르가 떠오른다.

점진적 변화가 아닌 '도약'을 얘기하던 키에르케고르.

인간의 절망의 끝.죽음에 이르는 병이 깊어진 그 순간에 신앙의 도약을 말하던 키에르케고르가 떠오른다.


혹은

 진리에 갈급해  몰래 찾아와 묻는 니고데모에 예수가 했던 답변도 떠오른다.

'거듭남!' 그 무엇도 아닌 거듭남을 강조했을때 니고데모는 온전히 이해할수 없었다.


지금 칸트의 답변은 같은 선상이 아니겠는가.

결국 그의 윤리도

인간의 노오력!이 아닌 셈이다.

믿음의 결단이자 도약이며 실천이며 거듭남이다.

그게 혁명이고 창조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 모두에게 희망은 있다.

결코 쉽지는 않아도

그래도 노오력의 절망, 그 지옥같은 절망의 수레바퀴

그 자체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어쩌면 그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소망이 아닌가.


모든 인간은 늘 새롭게 창조되어야 한다. 자기의 새

창조를 믿으며 결단하고 도약을 꿈꿔야 한다.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며

이전 것은 지나간 것으로 잊어버리고

새 인간으로 도약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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