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분석과 니체의 ‘초인’
이 영화는 한없이 아름다운 장면을 그려내면서 동시에 한없이 깊이 침잠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우울함을 절묘하게 중첩시킨다. 그 아름다움은 지구의 멸망이라는 극단적인 시점과 충돌의 위기적인 장면이 만들어내는 것이며, 공교롭게도 ‘멜랑콜리아’라는 이 행성의 이름처럼 우울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운명과 필연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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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틴의 결혼식 날, 일 년 전 이혼한 부모의 갈등적 모습을 식장에서 다시 목도하면서 저스틴은 우울증이 심화되고 자신의 결혼식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식장을 빠져나온다. 그리고 드레스차림으로 집 앞 골프장 한가운데서 소변을 보고, 화장실에서 드레스를 벗어던진 채 식 중에 목욕을 하기도 하며, 조카의 방에서 잠들고, 심지어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따라다니는 직장 후배와 갑작스런 성교를 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저스틴의 우울증세와 일탈적 행위에 대한 원인을 감독이 집요하게 캐내고 있지는 않다. 그저 우울함에 빠진 한 여성의 심리를 행동을 통해서 보여주며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스틴의 우울증 증세에 대한 나름의 원인 파악을 짐작해 볼 수 있다
* 불완전한 부모의 관계- 낭만주의자와 냉소주의자 사이
- 자신의 결혼식임에도 불구하고 저스틴의 정신이 급격히 무너지게 된 계기가 바로 자신의 이혼한 부모의 갈등 때문이었다. 이혼한지 일 년도 안 지났는데 새로운 애인을 두 명이나 데려온 아버지(그것도 두 애인의 이름이 같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쏘아 붙이는 냉소적인 어머니의 말다툼이 그녀를 괴롭힌다. 어쩌면 아버지는 여성편력이 있는 지나친 낭만주의자 같은 기분파인 반면 어머니는 전형적인 냉소주의자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의 차이에도 불과하고 극도로 힘들어 하는 저스틴의 도움을 둘 다 외면하고 각자의 길을 가버린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라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단지 아버지는 좋은 말로 회유하고 몰래 도망가고, 어머니는 냉정하게 거부한다)
* 회사의 성과주의
- 저스틴은 능력 있는 카피라이터이지만 그를 고용한 상사는 그녀의 결혼식에 까지 업무를 강요하고 들이민다. 심지어 그녀의 결혼식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말단 직원을 붙여서 언제든 광고 문구를 얻어내려고 한다. 이 말단직원은 그 날 안으로 광고문구를 얻지 못하면 해고당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절박하게 움직여야 했고, 저스틴은 이 사실을 굳이 자기에게 말하는 상사에게 환멸을 느낀다.
* 언니와 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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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클레어는 한없이 좋은 친 언니와 같이 보인다. 그러나 정작 이 성대한 결혼식을 본인의 의중대로 판단해서 준비하고 저스틴을 그 가시적인 행사의 주인공으로 앉혀 놓은 것과 다를 바 없다. 즉 완벽주의에 가까운 언니로 인해서 저스틴은 결혼식의 주인공이면서도 언니가 기획한 결혼식의 대상으로 전락한 꼭두각시와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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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부는 전형적인 속물과도 같다. 이 모든 결혼식 비용을 본인이 지불했다는 것을 끝없이 아까워하면서 저스틴에게 행복을 강요한다. 그녀의 행복을 진정 비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불한 돈이 낭비가 되는 꼴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행복에야만 한다는 강요를 저스틴에게 하는 셈이었다. 결국 결혼식을 망친 저스틴을 한없이 혐오한다
* 파티에 초대된 사람들
- 파티는 무엇보다 성대하다. 결혼식 장소도 대저택이고 고급스러운 파티가 분명하다. 그럼에도 주인공 신랑신부가 늦어져서 두 시간이나 기다려서 시작하고 자정이 훌쩍 넘어서 끝나는 이 파티가 과연 행복할지 의문이 남는다. 즉 1부에서 저스틴의 우울증으로 인한 기행이 중요한 포인트이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면 저스틴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이 파티에 참여한 모두가 불행해 보인다. 파티를 준비한 기획자도, 집사도, 참여한 하객들도 모두 피곤할 것이 분명하다. 서구의 파티문화 및 피로연을 부럽게 바라볼 때가 있는데, 감독은 이러한 형식이 누구에게도 즐겁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듯 하다. 동생 결혼식을 모두 기획하고 진행해야 하는 언니의 스트레스와 이 모든 비용을 지불하는 형부, 그리고 서빙을 하는 일꾼들, 파티기획을 망친 기획자, 초대장을 받았으니 안올 수 없었던 하객들, 무엇보다 주인공인 신부와 신랑도 전혀 즐겁지 않다. 그저 사회적 위치가 정해준 자리에서 자기 역할 놀이는 하는 것처럼 보인다.
*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와 브뤼헐의 ‘눈속의 사냥꾼들’ ,‘게으름뱅이의 천국’
- 우울증에 몸소리 치면서 저스틴이 방에 있는 그림들을 다 밀어내며 새로운 그림들을 펼쳐서 놔두는 특이한 장면이 나오는 데, 여기서 나오는 그림이 말레비치의 추상화와 브뤼헐의 작품들이다. 말레비치는 절대주의를 표현한 현대화가로써 숭고함을 기하학적 도형으로 표현하는 추상화가이기도 하다. 이 그림은 마치 저스틴의 갑갑함을 부각시키며 목을 조이는 느낌을 준다. 반면 저스틴이 새롭게 펼쳐놓은 브뤼헐의 그림들은 충분히 인간적이다. 사냥에 지쳐 마을로 돌아오는 사냥꾼과 사냥개들, 그리고 포만감에 쓰러져 있는 게으름뱅이들의 모습들은 역동적인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남편
- 1부 내내 가장 불쌍한 사람은 저스틴의 남편이다. 저스틴의 우울증 증세를 감당해 주면서 참아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자기중심적 인간에 불과함이 드러난다. 우울증에 힘들어하는 저스틴을 기쁘게 해줄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자신이 구매한 과일밭 사진을 보여준다. 자기들의 노후계획이라면서 말이다. 얼마나 역설적인가. 이제 결혼한 부부가 벌써 노후를 준비한다는 것이 말이다. 지금 당장의 순간이 괴롭고 죽을 것 같은 공포 속에서 저스틴은 힘들어 하는데 남편은 노후준비 계획을 갖고 희희덕 거리는 셈이다. 그가 결정적으로 돌아서게 되는 계기도 자신의 노후계획의 상징인 과일밭 사진을 저스틴이 그 자리에 두고 갔다는 것에 있다는 점에서 그의 속내가 드러나는 셈이다.
* 배경음악- 바그너의 ‘크리스탄과 이졸데’, 그리고 바그너와 니체
영화상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음악은 바로 바그너의 음악이고, ‘크리스탄과 이졸데’의 한 부분이 나온다. 이 비극은 남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이야기 인데, 흥미롭게도 스토리 안에서 서로 죽음을 각오하고 극약을 먹게 되는데, 정작 더욱 사랑하게 된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이들의 사랑을 안타까워한 하인이 약을 바꿔치기 한 것이다. 죽음을 각오하니 다시 사랑으로 바뀐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흐름처럼 우울증을 직면할 때 이를 극복하는 저스틴의 모습이 오버랩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바그너는 니체가 초기에 가장 극찬했던 작곡가이기도 했다. 니체의 초기철학은 ‘비극의 탄생’에서 보여지는데, 아폴론적인 밝은 서사가 아닌, 디오니소스의 파괴와 공포의 비극을 강조했다는 특징이 있다. 그런데 이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작품을 가장 잘 만드는 작곡가를 바그너로 꼽았던 셈이다. 파괴와 공포의 디오니소스가 역설적으로 삶의 역동성을 만들어내듯이 이 영화의 흐름 또한 죽음 앞에서 죽음을 극복하는 역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관련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ost감상은 밑에 링크 클릭)
https://www.youtube.com/watch?v=1JEYnjKxf4A
이 영화의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저스틴과 클레어라는 두 자매의 대조적인 모습이다. 영화 1부만 보면 언니 클레어는 아무런 문제가 없이 유복하게 잘살고, 꼼꼼하고 자상한 언니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 동생인 저스틴은 우울증을 빌미로 모든 계획을 망쳐버리는 문제아에 불과해 보인다.
그러나 영화가 2부 클레어로 전환되면서 멜랑콜리아라는 거대한 행성이 지구와 부딪힐 가능성이 제기되는 가운데 클레어의 심리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즉 언니라는 사회적 위치가 만들어 준 가면이 완전히 박살이 나는 시점이 다가오는 것이다. 철저하게 공포에 질려있는 클레어를 안심시키기 위해 이성을 상징하는 남편은 과학자들의 견해를 인용하며 거짓말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정작 저스틴의 형부 또한 강박적 성향이 있다는 점에서 언니와 다를 바가 없었다. 단지 언니보다 좀 더 이성적 사유를 신봉하면서 침착함을 보여주려고 노력할 뿐 나중에 가족을 팽개치고 자살을 할 정도로 등장 인물 중 가장 연약한 인물임을 반증하게 된다. 결국 형부와 언니처럼 완전함을 추구하는 강박적 성향은 그러한 완전함이 무너지기 시작할 때 극한 불안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데, 멜랑콜리아의 지구충돌 가능성은 평온했던 클레어부부의 삶을 뒤흔들어 놓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동생의 결혼식을 그렇게 화려하게 계획하고, 철저한 순서에 따라 진행하는 언니의 모습이 바로 그러한 강박적 성향을 보여줌을 알 수 있다. 우울증으로 자신의 몸 하나 가누기 힘들어져 언니의 집에서 요양하게 된 저스틴을 언니는 완벽한 언니의 역할로써 수행하며 보살피는 것 또한 그러한 모습이다.
결국 영화의 반전은 멜랑콜리아가 지구를 지나친 듯 하다가 결국 다시 되돌아오며 지구멸망이 확정시되는 그 시점에 과학적 완벽성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클레어의 남편은 도저히 그 불안적 상황을 감당하지 못해 자신의 아내와 어린아들도 내버려두고 혼자 극약을 먹고 죽음을 택한다.
반면 이미 우울증으로 삶의 가장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 있던 저스틴은 멜랑콜리아의 등장으로 오히려 생기를 찾아간다. 지구종말이라는 극한 상황이 그녀에게 새로운 공포가 될 수가 없을 정도로 이미 최악의 공포와 고통을 겪고 있었기에 멜랑콜리아의 등장은 오히려 반동적으로 그녀에게 힘을 주는 것이다.
* 멜랑콜리아와 우울한 저스틴의 응시
일상의 삶이 완전히 불가능해진 저스틴이 다시 생기를 얻게 되는 것은 놀랍게도 지구멸망의 가능성을 가져오는 멜랑콜리아 행성의 출현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저스틴이 기력을 차리고 음식을 잘 먹으며 활동하게 되는 장면이 바로 어두운 밤 홀로 숲속에 누워서 멜랑콜리아의 빛을 벌거벗은 채 받아들이면서 부터이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에로스한’ 장면이다. 즉 1부에서 혼자 목욕을 하거나, 직장 후배와 충동적 섹스를 하고, 남편과 스킨쉽을 하는 장면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심지어 2부에서 우울증으로 혼자 목욕도 못해서 언니가 목욕을 시켜줄 때도 벌거벗은 장면은 나오지만 전혀 다르다. 이 영화에서 남자와 이뤄지는 스킨쉽과 섹스는 모두 비어있는 행위에 불과하다. 자신의 비어있는 욕망의 자리를 채우려는 공허한 섹스이거나 남편의 성적 욕망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다 결국 거부하는 장면, 그리고 병이 든 나약한 육체는 어떠한 에로틱함도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런데 홀로 벗고 멜랑콜리아의 푸른 빛을 쬐고 그윽히 바라보는 저스틴의 눈빛에서 진정한 욕망을 성취하는 듯한 에로틱함이 묻어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저스틴은 운명의 시간을 받아들이는 ‘강철이모’의 자리로 돌아간다.(영화속에서 우울증에 시달리는 저스틴을 보면서도 끝임없이 ‘강철이모’라고 믿고 부르는 조카가 있다. 그리고 조카의 바램대로 저스틴은 영화 후반에 ‘강철이모’가 되어서 조카를 지켜주는 ‘초인’이 되는 셈이다)
* 니체의 ‘초인’과 ‘아모르 파티’
여기서 왜 이 영화에 행성충돌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드는데, 이 행성의 이름이 우울증을 암시하는 멜랑콜리아라는 점에 의미가 있다고 본다. 지구보다 훨씬 큰, 영화 첫 장면의 충돌장면은 대등한 충돌이 아닌, 멜랑콜리아가 지구를 삼키는 장면에 가깝다. 즉, 우울증에 침몰해버리는 인간의 비유적인 모습이 아닐까, 실제로 두 자매의 종말에 관한 대화 중에 지구는 이미 사악하기에 멸망해도 상관없다는 저스틴의 단호한 표현에 언니는 그래도 전 우주에 생명체가 지구에만 있겠냐며, 또 다른 곳에도 얼마든지 있지 않겠냐는 반문을 한다. 그러나 저스틴은 단호하게 전 우주에 생명은 지구 하나뿐이라고 주장한다. 철저한 고독, 우주에 지구 한곳만 생명체가 있듯이, 우울증이라는 바다에 침몰할 위기와 공포 속에서 자신을 도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철저한 고독을 저스틴은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오히려 이러한 현실을 감내함으로써 저스틴은 되려 충돌직전까지 정신이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니체의 ‘초인’이론이 떠오른다. 니체는 삶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비극적 삶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들과 함께 가는 것도 아니고, 오직 자기 홀로 묵묵하게 이 잔인한 운명을 받아들이고 걸어가야 하는 자가 바로 ‘초인’이며 운명을 사랑하라는 ‘아모르 파티’가 된다. 전 우주에 지구 혼자라는 것처럼, 사실은 나 홀로 존재하는 것과 같다. 아무에게도 기대지 말고 스스로 문제를 받아들이고 해결해 가는 것 말이다. 니체 역시 정신병에 시달리면서 죽어갔지만 그의 삶도 그의 철학처럼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그 삶을 살아냈을 뿐이었다. 우울증이라는 인간 내면의 끝없는 파괴와 외부의 지구 멸망이라는 멜랑콜리아의 위협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찾아가게 된 셈이다. 그리고 혹시 아는가, 니체의 영원회귀론처럼 사악한 지구 하나 멸망한다고 해도 우주는 우주나름대로 또다른 역사의 반복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말
결국 영화는 지구와 멜랑꼴리아의 충돌로 마지막 장면을 장식한다. 남편의 자살도 위장하면서까지 언니는 끝까지 사회적 위치를 지키려 한다. 즉 엄마로써의 위치, 언니로써의 위치를 말이다. 그래서 충돌 직전에 삶의 마지막의 장면 또한 인위적이고 가식적으로 재현하려고 한다. 테라스에서 다함께 와인이라도 마시면서 마무리하자고 말이다. 저스틴은 단칼에 거절한다. 죽음 앞에서조차도 체면을 차리고 싶어 하는 언니에게 냉소적으로 응대하며 차라리 화장실에서 맞이하는 것은 어떠냐고 응수한다.
정말 영화상의 일임에도 어떤 지구 종말 영화보다 더 공포스럽게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우울증이라는 것이 지구 종말과도 같은 존재의 파괴에 대한 공포적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 그 우울증을 받아들이고 역으로 이겨내는 저스틴의 모습 속에서, 그리고 어린조카와 함께 마법동굴이라는 피난처를 상징적으로 만들고 그 안에서 운명을 받아들이는 저스틴의 단호한 모습 속에서, 어쩌면 여전히 희망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지 모르겠다. 한 가지 흥미로웠던 점은 마지막 장면, 즉 멜랑콜리아가 저스틴, 조카, 언니를 덮치는 그 장면에서 저스틴과 조카는 이 운명을 받아들이며 눈을 감고 손을 잡은 채로 있지만, 언니는 결국 두 손을 뿌리치며 자기 얼굴을 가리고 죽는 다는 것이다.
가장 이성적이고자 했고, 사회적 위치를 중시하며 체면을 중시했던 형부와 언니는 끝까지 종말의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공포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셈이다. 어쩌면 ‘강철이모’를 믿고 마법동굴을 순수하게 믿었던 아들이 더 용감했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