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난한 이들에게 위생을 강조하는 짓 따위는 그만두어야 하며
정반대의 습관을 장려해야 한다. 읍내에서는 도로를 더 좁게 만들어야 하며
집 한 채에 더 많은 사람들이 바글거리며 살게 만들어야 하며,
전염병이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는 창궐하고 있는 질병에 대한 맞춤형 치료약을 배척해야 한다.'
코로나 시대에 위와 같은 소리를 어떤 정치지도자나 지식인이 얘기했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아마 무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꼭 말을 해야 본심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얼마든지 표현하지 않고도 자신의 본심을 숨기면서 그 의도를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권력이고 통치의 본질일 수도 있다.
위와 같은 정신나간 소리를 하는 당사자는
경제학사를 공부하다보면 꼭 한번은 지나치게 되는
[인구론]의 '멜서스'다.
이번 코로나 시대를 지켜보며
그리고 놀라우리만치 자국민에게 관심이 없어보이는
몇몇 세계의 정치지도자들을 보면서
나는 '멜서스'가 떠올랐다.
멜서스는 산업혁명의 격동기속에서
부자들을 대변하는 경제학자였다.
쉼없이 돌아가는 기계와 함께
인간으로써의 최소요건조차 박탈당하며
산업혁명을 일구어낸 당사자인 빈민 노동자계층의 목소리는 그에게 들리지 않았다.
멜서스의 [인구론]은 단순하다.
인간이 생산하는 식량생산량의 증가는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인간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것.
재미있는 것은
멜서스는 사람들의 동기중 가장 강력한 것을 '성욕'으로 보았다는 점.
그리고 성욕이 강하면 출산율로 자연스레 이어진다고 본 것이다.
인간의 가장 강력한 욕구인만큼 유복한 생활속에서 놓이면 성욕은 끊임없이 분출되고
출산율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25년 단위로 인구가 두배가 될 것으로 멜서스는 예측했다.
그런데 역사상 멜서스의 주장처럼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적은 없었고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 이건 어떻게 설명했을까??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
식량생산의 최대치에 맞추어 나름 인구를 조절해왔다고 그는 주장한다.
여기서 그는 인구증가를 제한하는 '예방적'요인과 '실재적'요인을 분류하는데
예방적 요인은 출생률 자체를 낮추는 것으로 '불임시술,금욕,산아제한'
실재적 요인은 기근,빈곤,전염병,전쟁처럼 피할수 없는 억제요인이 있다.
자연스러운 예방적 요인이 실패하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실재적 요인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즉 출산율이 증가하는 것을 막지 못하면 결국에는 기근과 빈곤, 전쟁, 전염병이 발생하여 다시 인구를 조절하게 된다는 것이다. 유럽 중세의 흑사병이 유럽인구의 3분의1을 줄였다는 것을 기억해보자. 전염병 발생요인에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인간이 밀집해서 모여 사는 과정에서 발병하고 그 영향력을 극대화된다. 전쟁 또한 그러하다. 한정된 자원은 인구증가로 인해 더욱 부족해지고 결국 힘의 갈등을 통해서 해결하려는 것이 전쟁이다. 이래저래 어느 임계점을 넘어서면 실재적 요인이 반응하는 것이다.
사실 여기까지 보면 멜서스의 직관적인 통찰은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의 삶도 그의 예측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말이다.
지구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그에비해 인간의 수는 많다. 혹은 그 이전시대 어느때보다 일인당 소비량이 많기에
어떻게든 과잉수요는 피할 길이 없는 상황이기에 어쩌면 그 어느때보다 전염병이나 전쟁등의 위험은 높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의 괴상망측한 분석은 다음에서 나온다.
멜서스는 도덕적절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그에게 이 덕목은 부자에게만 있고 빈민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이분화하였다는 점이다.
즉 국가가 빈곤층을 구제하기 위해 지원을 한다고 해보자.
멜서스의 예측으로는
빈곤층은 저축할 기회가 생겨도 거의 실행에 옮기지 않고 최소한의 생계비만 지출한 남은 금액은 전부 선술집에서 흥청망청 써버린다고 보았다. 공짜소득이 주어지면 자신이 부자가 되었다는 착각에 노동의욕을 상실하고
방탕해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경제여건이 개선되면 도덕적 절제가 없는 빈곤층은 성욕으로 인해 출산율이 올라가고
가족이 많아지면 경제적 빈곤으로 다시 떨어지게 될거라는 점이다.
반면 도덕적 절제의 미덕을 갖춘 상류층들은 자신들의 욕구를 절제할 수 있기에 오히려
사유재산권과 결혼제도를 통해 사회안정에 기여하게 된다고 보았다.
멜서스는 한발 더 나아가 이렇게 선언한다
'인류가 이뤄놓은 모든 위대한 문화적 성취는 사적 소유시스템과 그것이 낳은 계급간 불평등덕이다'
결국 멜서스는 그 당시 영국사회의 빈민을 돕기위한 모든 조치에 반대했다.
도덕적 절제능력이 떨어지는 계층에게 지원을 한다는 것은
오히려 인구를 필요이상으로 증가시키는 불필요한 낭비로 본 것이다.
문득 멜서스의 이 진지한 분석과 그의 태도를 보고 있자니
인류 역사에서 소수 엘리트가 절대다수의 대중을 이끌어간다는 '엘리트주의'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브라질대통령과 미국의 트럼프, 일본의 아베는 정말 국민 개개인의 생명과 안전을 중시하고 있는지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태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결국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정치권력일 뿐이고 그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선에서 정치적인 제스춰는 취할지라도 결국 국민 모두의 권리,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정신따위는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북유럽의 복지국가인 스웨덴도 집단면역이라는 보기좋은 대안을 제시했으나 결국 방치의 다름아니며 한편으로 지나치게 높아진 복지비용의 문제를 코로나사태를 통해서 어쩌면 그 수급권자의 비율을 줄일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지나친 논리의 비약일수 있다. 국가의 복지기금,재정을 아끼기 위해 전염병을 은근히 방치하여 국민의 사망을 유도하는 정치지도자라니??? 입에 담기 쉽지 않다.
그러나 오늘 멜서스의 주장을 다시 읽어보면서 오히려 멜서스는 최소한 '솔직한' ? 엘리트주의자가 아니었을까? 욕은 바가지로 후대에 얻어먹더라도 결국 자신과 같은 중상위층과 상류층 사람들에게 '너희도 같은 생각하고 있잖아?' 라고 묻는 것은 아닐까.
위에서 언급했던 멜서스의 대사를 다시 상기해보자.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는 창궐하고 있는 질병에 대한 맞춤형 치료약을 배척해야 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지금 인류는 손씻기 운동도 사회적 거리두기도 무엇보다 백신도 만들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우리는 다 하고 있지 않냐고??
미국,일본,스웨덴을 다시 보자, 이미 그들은 안전이 확실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경계조치를 크게 낮추고 있다. 경제를 빌미로 한다고 해도 결국 연휴가 되면 수많은 시민들은 공공장소에서 엉키게 되고 코로나는 다시 퍼지게 될 것이다.
백신은 트럼프에게 또 하나의 미사일과 같다. 즉 상품이자 무기인 것이다. 인류는 구원하기 위한 도구가 아닌
미국의 배를 채우기 위한, 더 정확하게는 자신의 재선을 도울 도구로써 개발하는 것이지 모든 인류를 위한
처방책이 아니다.
멜서스의 기준에서
도덕적 절제의 미덕계층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즉 나와같은 서민들이라면
대한민국 국민인것이 다행이 아닐 수 없겠다.
최소한 문재인 대통령은 트럼프와 정반대의 이유로 백신을 정의하고 있으니 말이다.
문재인대통령은 백신이 어느 나라, 어느 계급을 위한 것이 아닌 인류 모두의 '공공재'가 되어야 한다고 연설했다. 모든 인간의 인권과 생명의 가치가 동등하다는 관점에서의 접근법이다.
그러나 멜서스는 이런 상황 또한 예측하고 불길하고 기분나쁜 한마디를 더한다.
'이런저런 무질서 상태를 완전히 근절할 수 있는 계획을 제시함으로써 스스로 인류에게 큰 봉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무리, 선한 의도를 갖고 있지만 아주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이들을 또한 꾸짖고 배척해야만 한다'
즉 문재인 대통령같은 생각은 멜서스 입장에서 이상주의자일 뿐이고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어리석은 자라고 보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는 세계를 직시해야 하고,
세계의 정치지도자들 및 엘리트계층을 주시해야 한다.
그들은 그저 우리를 자기 권력을 위한 수단과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동등한 생명이기에
부족한 지구상황에서도 어떻게든 함께 살아가기 위해 불가능해보여도
그 무게를 견디고 싸워가는 자인지를 구분해야만 할 것이다.
더 섬뜩한 것은 이렇게 멜서스의 생각에 반대하면서도
어딘가 마음 한켠에서 그의 주장에 동조되는 듯한 꿈틀거림에 있다는 점이다.
다함께 행복한 세계를 인간은 정말로 바라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