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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Oct 24. 2021

[오징어게임]이 아이들에게 유해한 이유

오징어게임이 굳이 다른 미디어컨텐츠보다 위험한 이유

지난 글에 오징어게임과 르네 마그리트를 연결해서 

왜 [오징어게임]이 인기를 끌 수 밖에 없었는지를 분석했다면 

이번에는 왜 [오징어게임]이 '아이들'에게 '위험'한 컨텐츠인지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https://www.chosun.com/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2021/10/10/IGA2R6YUCBHCBNMZKRPHPVXCAU/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102015130004203?did=NA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인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아진 이 시점에 

흥미로운 기사들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을 비롯해서 다양한 국가에서 [오징어게임]의 폭력성에 대해 우려를 표하며 시청을 금지하거나 금지를 권장하는 상황 또한 많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오징어게임]이 폭력적인 장면이 워낙 많기에 당연히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시청하기에 유해한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오징어게임]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워낙 폭력과 선정성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굳이 [오징어게임]에 대한 우려는 지나친 인기에 비례하여 파생된 '작은 이슈'에 불과하다고 보는 시선이 더 많을 것이다. 

 예를들어 옛날 영화 [친구]가 개봉했을때도 청소년들에게 매우 유해하다고 해서 우려했던 현상이 있었던 것처럼.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2&oid=005&aid=0000073640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유명세 치르는구나. 


그런데 문득! 

[오징어게임]만의 특이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오징어게임]이라는 컨텐츠만이 갖고 있는 위험성이 있다면 이것은 비단 '유명세'라는 세금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위험요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말이다. 


놀이와 죽음사이 


지난 글에 [오징어게임]의 성공요인에 있어서 내가 강조했던 그 이유가 

이번 글에서는 [오징어게임]의 위험요인으로 그대로 등장한다. 


바로 

'놀이'

라는 특이성이다. 


이 드라마가 성공한 가장 큰 이유는 '놀이와 죽음'이 마그리트의 초현실성 효과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라고 나는 분석했었다. 놀이라는 어린 아이들의 전유물적 행위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죽음'이라는 오버랩이 이를 시청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충격적이고 신선한? 효과를 주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 작품을 감상하는 성인 시청자들에게는 '놀이와 죽음'의 배치가 위험요소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저 신선하고, 흥미로운 요소로 인식하면서 그것을 현실과 구분해내는 이성의 장치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들에게는 분명! 다르게 다가올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생각해보자


'놀이와 죽음' 


만약 이 드라마를 시청하는 초등학생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놀이, 특히 [오징어게임]에 등장하는 동네 놀이들은 여전히 이 아이들의 전유물이다. 

즉 학원가는 시간 때문에 불행하게 즐기지 못하는 아동들은 차치하고서라도 

분명 동네 골목에서 벌어지는 이 놀이들은 바로 이 또래 아이들만이 즐기는 컨텐츠?다. 


그런데 놀이를 아이들이 왜 좋아하는지 다시 생각해보자. 

놀이의 특성은 


-무엇보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재미없는 놀이는 당연히 놀이의 정의와 범주에 들어갈 수 없다. 

아이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놀이를 좋아한다. 그저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재미의 요소가 배가가 되는 것은 바로 놀이 진행 중에 술래 및 게임 규칙에 의해 

질 수 있거나, 혹은 가상으로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쫄깃한 긴장도가 있을때 게임의 재미는 더욱 커진다


-그럼 [오징어게임]과 똑같지 않냐구? 

-아니다. 실제 아이들 놀이에는 가장 중요한 차이가 있다. 바로 [부활]이다. 다른 표현으로 [영생]이라고나 할까? 즉 게임은 매번 반복될 수 있다. 어떤 놀이도 단 한번!이라는 개념은 없다. 아이들의 놀이는 '일회성'이 아니라 '무한성'에 그 특징이 있다. 엄마가 화내며 부를 때까지 반복되는 놀이. 혹은 자신들 스스로 질려서 그만둘때까지 게임은 계속 리셋이 가능하다.  이전 놀이에서 계속 술래하고, 벌칙먹던 아이가 다른 놀이로 바꾸면 주인공이 되고, 영웅이 되기도 하는 것이 바로 '놀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 다시말해 아이들 놀이에는 영원한 '배제' 같은 것은 없다. 단 한판의 게임안에서 임시적으로 죽거나 배제될 수는 있어나, 그 게임은 금방 끝나기에 배제된 멤버들은 금방 다시 시작될 게임판을 기다린다. 거기서 다시 화려하게 부활해서 이번에는 잘해보려는 의지를 불태운다. 


차이의 반복?


결국 아이들 놀이는 무한히 반복되는데 그 반복은 매번 똑같지 않다. 아이들은 놀이 속에서 공동체 의식을 배운다. 혼자하기 힘들때 팀을 만들고, 서로 협력하고, 가끔은 배신의 아픔도 경험하고, 게임을 못할 때는 깍뚜기를 만들어 공동체에서 배제시키지 않는 배려도 배운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게임의 규칙을 배우고 실천하면서 이성을 확장한다. 마냥 즐기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최선을 다해서 게임에 임한다. 매번 똑같아 보여도 미세한 차이가 있기에 즐거운 것이다. 매번 똑같은, 결과가 예측되는 게임을 어떤 아이가 좋아하겠는가? 수없는 놀이의 반복 속에 아이들은 감각적으로 차이를 즐기면서 인생의 행복을 만끽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징어게임]의 놀이는 어떠한가? 


1회성게임이다. 물론 생존하면 다음 게임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그건 이미 차이의 반복을 만들어내는 놀이의 즐거움이 아니기에 놀이가 아니게 된 셈이다. 


한번 게임에서 지면 바로 '죽음'이다. 그냥 가상의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탈락'이며, '영원한 배제'다.

아이들의 놀이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고, '절대' 있어서도 안되는 '룰'이다. 


놀이와 죽음이 만나게 되면서 

[오징어게임]은 대 흥행에 성공했지만


놀이와 죽음을 만나게 하면서

[오징어게임]은 전 세계 아이들의 '게임'의 '절대적 규칙'을 무너뜨려버렸다. 



친구가 아닌 전우  


[오징어게임]의 플레이어들은 생존하기 위한 '전사'들이지, 진짜 노는 아이들이 아니다. 

그렇다면 같이 플레이를 협력하고, 함께 생존하는 사람들은 

'친구'가 아니라 '전우'가 된다. 

아이들의 놀이에서 '전우'는 너무나 무겁고 비장하다. 

놀이라는 가벼움에 죽음이라는 무거움이 초현실적 분위기를 풍기듯 

'친구'와 '전우'는 분명 거리감이 있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서 진짜 '친구'를 만나고, 만들어간다. 


그런데 [오징어게임]에는 게임을 하는 같은 멤버들이 

자신을 언제 죽음으로 몰아넣을지 알 수 없는 '원수'이거나 

함께 죽음을 이겨낼 '전우'가 되어버린다. 


이제 놀이는 놀이가 아닌 전쟁

결국 [오징어게임]의 폭발적 유행은 

전 세계의 교육자들에게 직감적인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지 않았을까. 

과연 이 드라마컨텐츠가 그저 컨텐츠로 소비되고 사라질 현상이 아니라 

자칫 자라나는 이 세대 아동,청소년들에게 어떤 정신적 생채기를 남기는 것은 아닌가에 대한 두려움말이다. 

당연히 아이들이 [오징어게임]을 시청했다고 해서 

설마 현실에서 같이 게임하는 친구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게임,놀이를 하는 관점과 자세는 바뀔지도 모른다. 


영원한 친구를 만나는, 

영원히 다시 플레이할 수 있는, 

그 즐거운 기억조차 영원히 남을 수 있는 

'놀이'가 


이제는 

나의 이익을 위해

단 한번으로 친구를 원수로, 

단 한번으로 내가 모든 것을 쟁취하기 위한, 

즐거운 기억,추억따윈 필요없는 

'놀이 아닌 놀이'로 변질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게임에서 지면 죽지는 않더라도 영원히 '배제'되어 버릴 지도 모른다. 

공동체를 형성하는 '놀이'가 아니라, 

공동체에서 배제되는 '놀이'를 놀이라 할 수 있는가. 

즐거움은 두려움과 공포로 전이된다.


과연 그게 '놀이'겠는가. '노름'이겠지. 

그리고 그 노름은 어느새 '밑장빼다 손목가지 날아가는' 서슬퍼런 단두대나 작두가 연상되는 

그런 죽음의 공간으로 바뀌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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