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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Dec 27. 2021

[DEUS EX MACHINA] 1-1

인문사회학을 위한 예비적 고찰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제가 집필한 인문사회학 입문서이자 각종 논술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을 위한 수험교재이기도 합니다. 인문학에 관심있는 일반 독서 대중을 위해서도 제작한 책이기에 앞으로 브런치에 순서대로 조금씩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실제 구매는 아래 링크를 참조하시면 됩니다. 


https://www.bookk.co.kr/book/view/112769


1-1 [자연에 대한 인식과 인문학의 위기]


이 글의 목적     

 우선 가장 ‘큰 공간’의 문제부터 시작하자.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 대한 모든 지식을 다 다룰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 모든 문제가 발생하는 범주와 틀은 사유해 볼 수 있다. 즉 공간적으로 가장 큰 범주부터 시작해서 점차 작은 범주들로 세분화해 나가는 것이다. 우주부터 지구자연,-> 국가->지역공동체->가정->-> 정신과 육체 식으로 세분화해서 가장 중심되는 문제설정만 사유할 수 있다면 모든 지식을 다루지는 못할지언정 모든 지식이 포함되어있는 그 범주는 다 검토할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는 방식은 철저히 ‘인간’적인 것이다. 인간을 배제한 자연은 그저 자연과학의 대상에 불과하다. 우리가 궁금한 것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문제 인식이며, 이는 곧 인간의 문제이고, 그렇다면 그 인간이 어떻게 세계, 우주와 연관을 맺고 있는가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고 효율적인 시작점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이 첫 단원은 모든 사유의 중심인 인간과 그 인간을 둘러싼 ‘환경’과의 관계문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우선 현대사회의 치명적 위기 중의 하나인 환경파괴의 문제와 인문학의 문제는 표면적으로 전혀 다른 소재를 다루고 있기에 그 연관성을 찾기가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결국 인간과 환경이라는 두 ‘주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같은 원리의 문제임을 알 수 있고, 따라서 근본적인 원인 또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두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면, 자연스레 문제의 대안도 성찰할 수 있게 되기에, 현대사회의 주요문제인 두 사례를 통해 통합적 사유의 가능성을 찾아보고자 한다.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적 사유그 문제의 시작들

오늘날 환경파괴의 원인이 무엇인가란 질문 앞에 어떠한 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 단순히 쓰레기를 많이 버려서, 삶의 편의를 위해 오염을 시킨다는 등의 대답은 어린아이들의 대답 수준이고,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현대문명의 발전을 위한 인간의 탐욕 때문이라고 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오늘날 한국 인문학의 위기도 대학의 인문학과의 위기에서 시작해서, 오늘날의 편의주의, 물질주의, 취업을 위한 실용주의 등의 원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의 원인은 원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 원인 중의 원인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환경문제와 인문학의 위기의 토대 적인 원인이라 한다면, 바로 서구의 근대적 사유의 핵심, 인간과 환경, ‘인간과 자연이라는 이분법적인 인식체계’야 말로 그 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을 주체로 두고, 환경은 주체에 대응하는 수단과 도구의 대상에 불과하다는 인식체계가 바로 오늘날의 환경파괴, 인문학적 사유의 위기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원리를 좀 더 살펴보고 그 문제의 확장과정을 살펴보자.


데카르트의 사유코기토(cogito)의 출현과 환경의 대상화

신 중심의 중세를 벗어나, 인간중심으로 되돌아가자는 르네상스의 주장은 새로운 시대의 격변을 예고했다. 오직 신 중심의 사유체계였던 중세 안에서는 인간이 설 자리가 없었다.


[중세의 사유체계]     

주체-----------------------대상

-------------/(단절)-----------인간

  신  (신의 우위성) >         인간     

 중세에는 신이 모든 사유의 주체이며, 인간은 단순한 수단과 도구의 수동적 대상이었으며, 신과 인간의 존재론적 격차 속에서 신은 인간보다 월등한 존재여야 했다. 그러나 중세의 끝자락에 발생한 르네상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사상과 그리스 인문주의를 부활시켜, 인간의 가치를 다시 살리는 역할을 해낸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변혁 속에서 데카르트는 인간의 완전한 독립을 위한 철학 체계를 완성해 낸다. 그러나 신에게서 독립하기 위해서 인간이 해결해야 할 독립자금으로 요구된 것이 바로 존재론, 인식론, 윤리학의 문제인 것이다. 인간이 왜 존재하는지, 세상이 왜 존재하는지, 신의 대답이 아닌, 인간 자신의 답을 찾아야 했고, 그 존재를 인간이 정확히 인식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존재들 간의 삶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특히 인간의 인식능력이 만약 정확성, 엄밀함을 갖추지 못한다면 이 세계를 바로 인식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데카르트가 해결해야 했던 가장 큰 난제는 바로 인식론의 문제였다.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를 통해 의심할 수 없는 확고한 지식을 찾아내었는데, 그것이 바로 ‘생각하는 나’ 이다. 적어도 인간은 생각하는 동안에는 존재함을 자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사유하는 인간이야말로 모든 지식의 뿌리가 될 수 있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사유능력이 오직 인간에게만 있기에, 존재론적으로 인간은 이 세상 어떤 피조물보다도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근대의 인식체계]     

주체-----------------------------대상

인간이성--------------/(단절)----------환경

인간   (인간의 우위성)   >                 환경


 즉 ‘인간’+‘인간을 둘러싼 환경’ = ‘세상’ 이 되는데, 인간은 사유의 능력, 이성이 있기에 인간을 제외한 모든 환경과는 다른, 질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근대의 인식체계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인간의 이성 우월성을 통한 인간과 환경의 이분법적 관계’라 할 수 있다. 물론 데카르트의 논리는 이성을 통한 논증이기에, 정신과 육체의 또 다른 이분법을 파생시킨다. 즉 정신이 육체보다 우월하다는 관념론을 전개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사유체계가 근대사회에 미친 영향

 그렇다면 이러한 근대적인 인식체계가 도대체 현대의 환경파괴, 인문학의 위기에 어떤 영향을 준 것일까?

 먼저 환경파괴의 과정을 살펴보자,

데카르트의 인간이성의 독립은 신 중심의 중세시대를 벗어나게 하였기에, 이제는 자연 안에 깃든 신의 존재나, 영의 존재를 부인할 수 있게 되는 가능성을 과학자들에게 던져 준다. 즉 자연을 종교적이 아닌, 객관적인 법칙으로 연구할 수 있는 자유가 과학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실제로 데카르트의 코기토 이후, 서구는 과학혁명의 시기를 거치게 되는데,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도 이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주체-----------------------------대상

인간(과학자) -----------/-------------환경

                                             

결국, 자연은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적 존재라기보다는, 우주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와도 같은 무생물적인 대상이 되어 버린 것과 같다. 따라서 인간은 이성의 우월성을 무기로 마음껏 그 이성의 궁금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연을 실험실의 도구로 전락시켜버린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부정적인 결과를 곧바로 발생시킨 것은 아니다. 적어도 중세의 주술적 사고에서 벗어남으로써 자연 속에서의 불필요한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자연을 연구한다는 것은 곧 자연을 자원화시킬 수 있는 능력의 확장을 가져오기에, 기술개발로도 연결이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서양의 산업혁명이 이 시기에 일어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자연을 인간이 더 알게 되고, 통제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자연을 자원 삼아 생산물을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결국 산업, 대량생산체계는 대량소비를 해야 하게 되어, 시장을 발달시키고, 화폐의 사용량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킨다. 곧, 자본주의 사회의 도래가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과학혁명을 일으키고, 이는 다시 산업혁명을, 그리고 이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복합적으로 일으켜 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과정이 있었기에 서구의 근대문명이 중세의 정체기를 벗어나, 세계에서 강력한 제국주의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제국주의는 소수의 백인국가를 제외한 세계에는 비극적 결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파괴 문제도 자연스럽게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과학혁명의 초기에는 자연을 순수하게 탐구하고, 법칙을 찾아내는 데 있었다면, 산업혁명의 발전 시기에는 모든 동력이 자연자원에서 발생하기에, 자연에 대한 인간의 필요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이미 인간의 이성 우월론으로 자연은 이분법적 관점으로 존재론적인 폄하를 받고 있었기에, 자연이 자원화되어서 마구 파괴되는 것이 인간이성에 있어 하등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인간이성의 무한한 낙관론은 자연의 파괴를 파괴로 보는 시각이 아닌, 발전을 위한 도구로 합리화되었다.

 일일이 수작업으로 했던 일들을 기계가 대신하게 되고, 자동차가 개발되고,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것을 보게 된 인간을 상상해보라, 이 모든 결과물이 인간의 이성에서 나왔다고 믿었기에, 이 눈부신 발전 앞에 자연의 존재는 이미 인간의 인식 안에 사라져 버렸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근대화의 발전과정 속에서 자연은 수단과 도구화되어 철저히 파괴가 진행되어 온 것이며, 이 파괴가 심화되기 전까지는 서구 문명은 그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20세기가 시작되고, 이성의 결과물들이 문제를 일으키면서, 점차 환경파괴의 심각성도 함께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주체------------------------대상      

 인간----------- >/-------------환경

인간중심주의-->>환경파괴-->> 인간의 파괴     

환경파괴가 심화함으로써 인간이 절실히 깨닫게 된 것은 결코 인간과 자연이 이분법적으로, 존재론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신들의 문명만을 위해 자연을 파괴할 때는 인식하지 못했으나, 자연이 파괴되자, 그 위험성이 다시 인간에게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자정작용으로 더는 정화할 수 없는 단계부터는 언제나 인간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것이 환경파괴의 파괴력이었다. 물이 오염되고, 공기가 오염되고, 이산화탄소가 배출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는 이제껏 인간 이성이 만들어놓은 모든 결과물을 송두리째 파괴할만한 위력을 갖고도 남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의 위기는 어떻게 발생한 걸까?

 인간이성의 우월성은 특정한 학문 분야의 발전만을 가져다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수학과 과학을 통한 엄밀성의 학문이었다. 애초에 데카르트가 발견한 이성은 확실한 지식을 찾기 위한 목적이었음을 상기해보면, 그 결과 역시 자명하다. 신이 던져 주는 진리를 거부하고 인간 스스로 진리를 찾고자 했기에, 절대적이면서도 엄밀한 지식이야말로 진짜 지식, 진짜 학문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수학과 과학 분야의 절대적 지식을 바탕으로 지구와 우주의 법칙을 발견하고, 계산하여, 환경을 인간의 의지대로 마음껏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이 환경보다 우월하지만, 그 우월한 근거는 수학, 과학처럼 엄밀한 사유, 도구적 이성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같은 인간의 사유라 하더라도, 정확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는 질문들, 문제들은 가치가 떨어지는 학문으로 폄하되는 문제를 안게 된다.

 인문학이 무엇인가? 인간을 연구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의 정신, 영혼, 삶의 의미를 연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우월한 도구적 이성은 열등한 자연을 연구하는 것이기에, 자연과학이라 할 수 있다. 자연과학 분야를 필두로, 실용적이면서 확실한 지식을 추구하는 분과학문이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이고, 인간의 존재, 삶을 고민하는 철학이나 역사, 문학 등은 열등한 학문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대상--------------------------주체

 인간과학--------- < --------자연과학

 비판적 이성------- < -------도구적 이성

(인간이 자연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으로 인해정작 주목받는 연구 분야는 자연과학 분야가 된다따라서 인간이 우월함에도인간의 정신적 가치삶의 의미를 찾는 학문은 정작 폄하 받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학, 과학을 기초로 한 학문을 실증학문이라 하는데, 19세기는 이러한 실증학문만이 학문의 범위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져서, 이 시기를 실증주의의 시대라고도 한다. 이는 기존의 정신과학, 인간 과학은 학문의 분야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문제를 발생시키게 된 것이다.

 그러나, 20세기가 들어서면서, 인류의 가장 큰 비극이었던 세계대전은 이러한 인간 이성 낙관론에 제동을 걸게 된다. 인간의 수학, 과학적 지식의 결과물 중 가장 첨단화되는 것이 바로 무기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 무기는 엄청난 인명 살상을 가져다주었고, 가장 이성적이라는 독일 사회에서 히틀러가 나오고, 유대인 학살이 나왔다는 점에서, 인간의 도구적 이성에 대한 심각한 회의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역설적으로 인간이 왜 존재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인간 자체에 대한 질문들, 바로 인문학적 물음이 다시 사회에 던져지게 되는 것이다. 정작 인간의 삶에 대해 답을 얻지 못하면서, 인간을 둘러싼 환경을 변화시키려고만 하는 것은 단순한 편의주의 물량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자연파괴와 인문학 위기의 근본적 원인을 통한 대안의 도출

 결국, 자연파괴의 근본적 원인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인간의 도구적 이성의 우월성이 인간과 자연을 철저히 다른 존재로 자리매김 시켰던 인식 자체가 그 원인임을 밝혀야 한다. 인간이성의 우월성을 통해, 자연은 수단과 도구화가 됨으로써 철저하게 파괴가 된 것이다. 물론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닌, 우월한 인간을 위한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욕망이 불러온 결과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자연파괴의 해결에서도 무조건적인 이성낙관론, 기술낙관론을 통해, 주장할 것이 아니라, 근대적인 인간과 자연의 인식 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 인간 주체와 자연대상의 관계가 아닌, 인간 주체와 자연 주체라는 소통적인 관점이 바로 그것이다.


 주체<--------------->주체

 인간<--------------->자연     

인간과 자연이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진 존재가 아니라, 인간 속의 자연, 자연 속 인간의 개념이 필요하다. (인간을 향한 자연, 자연을 향한 인간) 인간과 자연이 서로 소통하는 상호주관적인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의 환경파괴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의 출발점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의 상호주체성의 균형이 자칫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 즉, 기존의 인간 우월성을 비판하려다가 또 다른 극단, 또 다른 이분법인 자연 우월론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자연 우월성을 주장하고, 동양철학의 무위자연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결국 오늘날의 인간 문명의 당위성 자체가 사라지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전히 인간의 위치는 중요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생명과 나무 한 그루의 생명을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인간을 먼저 살려야 한다. 그러나 기존 근대의 독단적 인간 우월론에서 벗어나, 상호주관성을 회복할 때 인간도 자연을 공생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고, 개발론에서도 자연친화적인 개발을 가능케 되는 것이다.


       주체<------------>주체

  인문과학<----------->자연과학     

 인문학의 위기의 대안 역시 이분법적 사고에 대한 극복에 있다. 물론 아직도 현대사회는 인간의 도구적 이성의 우월성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더욱 강화될수록, 인간의 이성도 자본을 창출할 수 있는 도구로만 사용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오늘날에는 순수 자연과학도 우월성의 자리에 있지 않다. 인문학도 자연과학도 우월한 위치에 있지 않다면, 무엇이 그 위치에 존재하는가, 오직 돈이다. 오직 명예와 부, 실용성만을 강조하는 시대 속에서 인문학적 사고는 더욱 위기로 치닫고 있다. 자연파괴 문제는 이미 그 한계점에 이르렀고, 더 인식을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인간의 문명 자체가 파괴됨을 직시하기에 그 해결의 방안이라도 도출되는 상태이다. 그러나 인문학적 사고의 위기는 오늘날의 성공 주의, 물량주의가 너무나도 강하여서, 인간의 인간됨이라는 근본적이라는 질문 자체가 던져지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환경을 조작하여서 인간의 삶 자체는 모르더라도, 자신의 환경이 부유해지고, 편안해지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단편적인 현대인의 사고는 더 큰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

  인문학적 사유의 부활은 바로 이 극단의 위기 속에서 시작된다. 서구중심의 세계대전이 인문학적 사유의 부활 신호탄이 되었듯이, 극단적으로 자본 위주로만 흘러가는 위기의 시대일수록 인간적 가치, 삶, 존재에 대한 물음이 갈수록 절실해 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성공만을 위해 달려온 수많은 세대의 허무함도 바로 이러한 필요성 들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단절은 이미 시대착오적 사유이기도 하다. 인간과 환경이 이미 상호주관적 관점으로 다시 사유해야 한다면, 인간과 환경을 둘러싼 학문과 사유들도 재정의해야 한다. 인문과학과 사회과학, 자연과학이 온전히 연결되고, 서로 협업할 때 그 학문적 시너지 효과도 배가가 되는 것이다.

 생명공학이든 로봇공학에서도, 결국 인간과의 연관성이기에 인문학자들이 자연과학자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고, 인문학자들도 수학과 과학 분야의 문외한인 채로 연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미 시대는 끊임없이 연결되는 네트워킹의 시대임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정리

근대적 사유의 핵심이었던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적인 관계가 오늘날의 자연파괴와 인문학적 사유의 부재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근본적인 인식체계의 변화가 없이는 문제의 해결도 있을 수 없음 또한 알 수 있다. 따라서 인식적 차원의 원인과 대안의 측면을 고찰하는 것이야말로 시대 속의 발생하는 모든 문제에 대한 토대 적 접근법임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진정한 해결 가능성은 새로운 인식체계에 대해 얼마만큼 동시대인들이 공감할 것인가, 그리고 그 공감한 인식체계를 얼마나 실천적으로 실행할 것인가에 달려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보론

이성,기술낙관론으로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견해에 대한 반론     

 이성낙관론과 기술낙관론은 기존의 인간과 환경의 이분법적 인식체계를 그대로 유지하고, 인간 이성의 우월성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체계라 할 수 있다. 물론 오늘날의 환경파괴문제를 해결할 또 다른 신기술이 개발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의 결과가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의 문제를 발생시켰던 실증적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 다른 기술로써 현재의 환경파괴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낙관론은 또 다른 새로운 환경문제를 가져다줄 가능성이 더욱 큰 것이다. 게다가 정말 인간의 이성이 뛰어나다면 이러한 환경파괴의 문제까지 진행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환경파괴문제의 상황 자체가 기술낙관론의 위험성을 반증하는 것이다. 기술낙관론만 믿고, 인식체계의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는다면, 인류멸망이라는 가장 최악의 상황도 가능성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비록 지금의 예방비용이 든다고 하여도,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 비견한다면, 이 비용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것이 된다. 따라서 이성 낙관론만을 신봉하는 것은 광신적인 종교적 믿음과도 다를 바 없는 근거 없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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