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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May 30. 2022

칸트철학의 비판점- 니체,베르그손,아도르노의 관점에서

 




 * 진리의 주관화, 주체의 객관화

근대철학의 위기를 구해내기 위한 칸트의 전략은 두 개로 정리할 수 있는데, 첫째는 진리의 주관화다. 진리를 외부의 사물이나 대상에서 찾지 않고 주체 자체 내부에서 찾자는 발상의 전환을 이끌어 낸 점이다. 둘째는 주체의 객관화다. 모든 주체가 선험적으로 갖고 있는 보편적이고 필수적인 형식을 주체 내부에서 찾아냈다는 점에서 주체의 객관화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칸트의 해결책은 또다른 한계를 드러낸다. 


첫째, 진리에 관한 문제

- 진리를 대상이 아닌 주관에서 찾게됨으로써 주관 밖의 ‘사물자체’는 그대로 남겨두게 된다. 그렇다면 진리란 결국 우리 인식의 주관, 현상에 국한된다는 한계성이 동시에 드러난다. 이 현상과 사물자체가 어떤 관계인지도 알 수가 없다면 정작 현상과 주관 안에서 찾은 진리의 정당성은 무엇으로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한 때 모든 이가 천동설을 믿었다고 해서 그것이 객관적 진리가 될수는 없음이 지동설로 드러난 것처럼, 칸트가 기획한 보편적 주관의 인식이 진리라는 보장이 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여전히 모든 이가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진리라고 말해도 되는가. 실례로 칸트가 진리라고 여겼던 선험적 종합판단 중, ‘삼각형의 세 내각의 합이 180도’ 라는 명제는 지구의, 즉 구의 표면에서는 거짓이 된다는 점이다. 구의 표면에 삼각형의 정의대로 삼각형을 그리면 필히 그 내각의 합은 180도보다 크게 그려지는 것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체제에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체제로 넘어간 오늘날 시대에 여전히 칸트의 기획이 옳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자연스레 파생된다.

 

 둘째 선험적 주체의 문제

칸트의 선험적 주체 중 ‘선험적 지성형식’의 12범주에 대한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왜 꼭 범주가 12개여야 하는지, 왜 선험적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비판이다. 범주 이전에 범주를 나누는 기준이 무엇인가? 그 기준이 없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10개의 범주처럼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점에서 칸트의 주장은 한계를 드러낸다. 또한 ‘선험적 감성형식’의 ‘시간과 공간’ 또한 마찬가지다. 칸트가 생각한 시간과 공간은 근대 뉴턴 물리학의 시간과 공간과 동일하다. 절대적인 시간과 절대적인 공간의 특성을 칸트가 참고했기에 경험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선험성을 획득한 셈이다. 그러나 현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처럼 현대물리학에서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늘어지거나 빨라지고, 공간 또한 휘어진다. 칸트 시대에는 알 수 없었던 지식이라고 해도 칸트의 기획이 보편적 진리에 대한 기획인 만큼 자유로울 수 없는 주장인 셈이다. 


 셋째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분리문제다. 

칸트에게 실천적인 판단을 하는 이성과 이론적인 판단을 하는 이성이 전혀 별개인 셈인데 순수이성이야 선험적 형식이라는 이유로 진리의 기초로 확실한 근거 역할을 지움받는 반면, 보편입법의 원리라는 도덕 철학은 무엇에 의해 정당화 될 수 있는가? 도덕 철학분야에 인식분야인 진리개념을 다시 도입할수는 없는 셈이다. 결국 실천이성의 정당화는 스스로의 근거지움일 뿐이며, 그렇다면 이는 ‘독단론’에 머물게 되는 셈이다. 개인들의 의지와 욕망을 오직 보편적 입법원리에 끼워맞추려고 하는 셈이고, 이 문제는 뒷 부분의 니체,베르그손, 아도르노 등의 학자군들에 의한 비판대상이 된다. 



 *칸트철학, 그 근대성의 양면성


칸트철학의 선험적 원리는 '유럽 근대성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근대성의 사유에 있는 두가지 계기를 확인해야 한다.

 첫번째 근대성은 혁명적 인본주의다. 중세의 신과 신의 율법에 대한 예속을 벗어나고 저항하는 혁명적 인간형을 의미한다. 신에게 기대지 않고 인간 이성의 구성적 능력만으로 충분히 인간 스스로에게 의미있는 지식을 만들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것이다. 중세의 초월적 구도가 폐기되고 인류는 내재성의 구도로 이동한 셈이다. 

 두번째 근대성은 반동적 인본주의다. 즉 중세를 넘어선 근대 안에서 다시 근대를 넘어서는 반동으로써의 인본주의다. 기존 중세를 넘어섰던 내재성을 고수하려는 세력들과 초월적 질서를 재건하려는 세력간의 갈등의 상황에서 칸트의 선험철학 역시 반동적 근대성의 강력한 무기로 변질된다. 

 선험철학의 기본 아이디어는 매개성인데, 인간이 물자체와 직접 만날 수 없지만 감성과 오성이라는 형식의 매개로만 사물과 관계할 수 있는 것이 그것이며, 감성과 오성 또한 그 사이에 구상력의 선험적 도식을 통한 매개를 필요로 한다. 매개없이 경험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다는 칸트의 아이디어는 철학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모든 분야에 적용되는 셈이다. 사회,정치 영역에서 의회나 합의체라는 대표기구의 작동 또한 매개적이다. 대중이 직접 욕망을 실현할 수 없기에, 결국 대중들이 실천하는 자기구성운동이라는 것은 언제나 이미 구성된 질서, 보편적인 선험적 매개체에 맞춰야 한다는 전제속에서만 가능한 셈이다. 즉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서 늘어나거나 잘려진 대중의 순응적 욕망만이 허용될 수 있는 셈이기에 이는 경찰국가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지침을 계도하는 반동성으로 변질된다. 




 *칸트에 대한 비판을 수행한 철학자들


칸트와 니체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새로운 니힐리즘으로서의 새로움이다. 즉 기존 기독교적 신에 대한 부정성은 이미 칸트의 시대에도 명확해진 상황이기에 니체의 이 말은 기존의 니힐리즘을 넘어서는 새로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기존의 허무주의가 세계에 대한 허무함을 통해 신과 이데아에 의존하도록 하는 방향이었다면 니체의 허무주의는 과학을 통해 생성.변화하는 세계를 부정한다는 측면에서 새롭다. 그는 신의 죽음의 선포 직후 곧장 과학비판에 착수한 셈이다. 근대가 신의 죽음을 선포한 것은 과학이라는 새로운 길이 있어서였는데 니체는 그 과학 또한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 셈이다. 사실 칸트는 이율배반의 논의를 통해서 신적인 제1원인과 과학적 인과성의 배타적 선언을 해놓은 상황이다. 즉 둘 다 선택할시 모순임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식민지적 분할통치 방식으로 종교와 과학의 영역을 분리하여 이율배반을 해소하고자 한 셈이다. 하지만 니체는 바로 이 둘 모두를 공격하는 형국이다. 니체가 보기에는 제1원인과 인과법칙의 양방향의 질주가 결국 같은 방향이었음을 폭로하는 것이다. 인과성을 따진다는 것은 하나의 재귀행동으로 무한한 뒷걸음질이라 볼 수 있는데 제1원인은 그 무한한 인과연쇄의 뒷걸음질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정지는 사실상 게으름이며 피로에 의해 중단된 지점에 불과하다. 결국 제1원인이나 인과성은 같은 것이 된다. 니체가 보기에 제1원인을 통해 발견한 신의 지문이나 과학원리인 인과성으로는 진정한 자연의 생성과 운동을 포착할 수가 없다. 그저 인간이 신봉하기로 선택한 그 대상 무엇에 불과할 뿐이다. 동일성의 철학 아래 인과법칙에 따른 과학의 파시즘에 의해 세계는 전례없이 파괴되었다. 

니체는 이러한 비판을 통해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 같은 자신만의 철학개념을 창조한 것이다. 

 칸트의 선험철학은 결국 '구성'에 있다. 즉 물자체에 닿을 수 없는 만큼 결국 현상세계는 불가피하면서 인간에 의해 창조되는 하나의 환상인 셈이다. 니체는 이러한 칸트의 환상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그 환상의 빈곤함에 반대한다. 칸트는 인식의 확실성을 위해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사유형식, 모두에게 통용될 단 하나의 환상이 필요했던 셈이다. 반면 니체는 무한히 창조적인 생산능력을 가진 인간이 대체 왜 하나로 수렴해야 하는가에 대한 비판을 전개한 것이다. 환상을 무한히 다양한 방향으로 펼쳐가기를 바란 것이 니체였다. 하나의 언어가 아닌, 새로운 언어의 창조의 필요성, 기존 언어에서의 해방을 주장한다.  자신의 언어를 찾고, 그러면서도 그 언어에서 다시 떠나오길 바라는 끝없는 생성.



 칸트와 베르그손



칸트에게 기억이란 영화와 같다. 낱장 하나하나의 필름에 시공간을 촬영한 후 다시 돌려보는 것과 같은 것이기억인 셈이다. 칸트의 인식작업도 똑같다. 새 필름에 이미지를 찍고, 재생하고, 순서대로 돌리며 하나의 영화를 완성하는 것과 같다. 결국 칸트에게 시간과 기억은 원자적인 이미지들이 쌓여서 만들어진 것이고, 당시에는 그러한 사유가 일반적이었는데 이런 입장을 고수했던 자들을 '관념연합론자'들이라 한다. 사물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관념들이 연합하여 집합을 이룬 것을 '의식'이라고 보았다.그러나 베르그손은 이런 입장과 대비되는 시간관을 주장했다.들뢰즈는 이런 베르그손의 위력을 알고 있었기에 베르그손을 통해 칸트철학을 전복하고, 니체철학을 통해 생산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을 제시했다. ( 영화1. 운동-이미지, 영화2.시간-이미지)베르그손은 우리의 기억이 분리된 의식이 아니라 유기적인 전체를 이룬다고 보았다. 프루스트의 '잏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은 마들렌 과자를 먹고 유년기 시절 전체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 과거가 한번도 체험하지 못했던 형태로 솟아올랐다는 점이다. 즉 기억에 대한 상식적 견해를 거부한다. 관념연합론자들이나 칸트였다면 기억은 의식에 차곡차곡 쌓여있던 관념들을 다시 재생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과거의 '회상'방식이다.그러나 베르그손에게 과거란 눈길에서 굴려지는 눈사람처럼 시긴이 지날수록 커지는 것이지, 그저 고정된 형태로 보존되고 쌓이는 것이 아니다. 기억의 서랍을 아무리 뒤져도 과거의 이미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필름과 사진은 없다. 과거의 순간순간은 이미 하나로 뒤엉키고 뭉쳐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뭉쳐진 과거를 다시 풀어내는 과정을 통해 매번 새로운 과거를 만나게 된다. 고정된 시간은 없으며 과거의 시간은 반복적으로 올라오되, 결코 똑같이 올라오지 않고 새로운 방식으로 반복된다.새로운 차이를 내며 반복되는 시간은 니체는 영원회귀의 시간이라고 불렀다. 결국 기억을 통해 되찾은 시간은 빛바랜 낡은 것이 아니라, 새롭게 되찾은 '순수한 시간의 체험'이다. (모리스 블랑쇼) 결국 칸트의 시간은 '공간화된 시간'이다. 시간의 질을 무시하고 시간을 양화시킨 것이다. 결국 우리가 체험한다고 믿는 시간의 흐름은 시간체험보다는 공간체험에 지나지 않다. 수학과 물리학의 시간. 물론 이러한 공간화된 시간이 과학적 지식구축에는 유용하다. 하지만 인간이 체험하는 지속으로서의 시간과는 같지 않다. 결국 칸트의 시간은 경험의 일부만을 설명할 뿐이다. 




칸트와 아도르노 


수학과 과학의 정당화를 위해 칸트는 삶의 특정부분을 과감히 배제했었다. 수학과 과학의 객관적 경험에 대한 형이상항적 정당화를 위해 선험적 종합판단을 연구한 것이며, 그 과정에서 신학적 세계는 제외되었다. 그러나 인류에게는 이러한 배제성이 대재앙이 된다. '계몽의 변증법'에서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칸트의 계몽적 사유가 어떤 폐해를 주었는지를 지적한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인간의 감성적 틀이 수량적 모델로 제한됨으로써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사물들 또한 그 제한에 갇히게 된다. 칸트의 코페루니쿠스적 전환은 대상이 인식의 주관화에 따르게 되는 만큼 대상들의 고유한 가치와 의미는 따르지 않게 된다. 대상들이 인간의 유용성 척도에 따라 위계적으로 배치된다. 숫자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은 가상(예지계)으로 여겨진다. 결국 선험철학은 인간의 감성과 오성을 통해 대상을 조작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를 가졌다는 철학적 정당화인 셈이고, 이를 통해 자연은 파괴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심각한 자연파괴는 순수이성비판의 인식론적 결론을 실행해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베르그손은 칸트의 시간관이 인간의 풍부한 시간경험을 경직적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면 아도르노는 칸트철학이 인간 정신의 왜소화라는 대가를 침으로써만 정당성이 인정된다고 비판한다. 선험적 통각의 종합활동을 통해 대상은 우리를 따로고 이렇게 정신과 세계의 일치를 이루게 되었지만, 그만큼 정신과 세계는 형편없이 축소되어버린다. 정신은 수학적 장치로 환원되고 세계는 이 수학적 장치가 획일적으로 찍어내는 생산물로 축소된다. 결국 칸트는 인간 인식을 구한 것이 아니라 포기한 것으로까지 비판될 수 있다. 칸트는 우리에게 '감히 알려고 하라'고 계몽의 모토를 외쳤으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인식을 협소화한 것이다. 





  참고문헌

1. 이진경/철학과굴뚝청소부/그린비

2 진은영/순수이성비판,이성을 법정에 세우다/그린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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