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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Aug 15. 2022

반지하 살이, 그 2년의 기억과 2022년의 반지하

    


 2022년 8월, 

서울에는 시간당 100미리가 넘는 폭우가 쏟아졌고, 

그 비는 강남구에는 비싼 외제차를 침수시켰으나

금천,관악구에는 사람의 살림 그 공간 전체를 침수시켰다. 


피해는 다양한 방식으로 속출했으나 

가장 큰 피해는 '반지하'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삶의 터전'에게 일어났다. 


세 모녀가 미처 탈출하지 못한 그 사실상 지하나 다름없는 반지하는 

무능력한 대통령과 시장이 쭈그려앉아 황당한 망말이나 지껄이는 모욕의 장소로 

망자들을 우롱했다. 

정작 그들은 알지 못했다. 자신들이 그렇게나 무책임하게 일찍 퇴근하지 않았다면,

전날 인천의 침수를 분명 보고 들었던만큼 

그 무엇이든 '대책'이라는 것을 준비만 했더라도 

그 세 모녀는 적어도 세상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녀들의 죽음에 가장 책임이 큰 두 사람은 그렇게 쭈그려 앉아 국정홍보를 위한 사진컷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밖에 이재민이 되어 주민센터나 체육관에 임시거처를 마련한 많은 사람들 대부분은 반지하 살림을 하는 분들이었다. 

살아는 있으나, 영혼은 이미 푹 수그러들었을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나 역시 

첫 아이가 돌이 될무렵 2년 간 서울 합정동에서 반지하 생활을 했었다. 

그 반지하의 기억들이 수해 앞에 절망하는 듯한 이재민 분들의 눈동자 속에서 피어오른다. 


애초에 자취살림으로 시작했던 결혼 생활이었기에 

처음에는 원룸이 신혼방이었다. 

처음 원룸은 얍실한 집주인들에게 속아 벽 한쪽이 몇 달만에 곰팡이 꽃으로 가득 피는 사실상 반지하였다. 

분명 주차장이 앞에 있는 1층이었으나, 주인집은 무슨 심보였는지 그 주차장 셔터를 늘 내려두었고, 

빛이 들지 않는 한쪽 벽면이 그대로 곰팡이 서식처가 되었었다. 정말 검푸른 곰팡이가 1센티 가까이 자랐었다. 이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어리숙한 우리 부부는 처음 그 집을 보러갔을때 집주인 부부가 도배를 하는 그 부위가 바로 곰팡이 피는 부위임을 눈치챌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가 나는 그 집에서 처음 몇 주간은 잠을 자기만 하면, 바닥이 물이 고일 정도로 땀이 났었는데 없는 살림에 한약을 한첩 지어먹으니 겨우 몸을 회복할 수 있었다. 

두번째 원룸은 단독 주택 안에 덩그라니 세입자를 받기 위에 정원 안에 지어놓은 곳이었다. 거기는 여름에는 미친듯이 덥고, 겨울에는 미친듯이 추운 곳이었다. 겨울에 벽의 찬기운에 등이 차가워져서 도저히 기댈 수가 없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첫째 아이는 거기서 태어났다. 여름에는 집이 한증막이 되니, 갓난 아기가 땀띠라도 날까 싶어서 근처도 아닌 1킬로 정도거리의 대형마트로 피신하던 적이 한두번이 아닌었다. 심지어는 은행 ATM이 있는 곳이 에어컨이 있었기에 그곳으로도 피신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 열악한 상황을 견디다가 

집을 서울 합정동으로 알아보게 되었고 

중개비를 아끼기 위한 네이버까페 '피터팬'에서 발품을 팔아 운좋게? 500-20으로 투룸이 있는 반지하 방을 얻게 되었다. 

운이 좋았다고 표현한 이유는 당시 15평 정도의 반지하 투룸이 그 가격에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매물이 나왔을때 서로 줄을 섰는데, 당시 나가는 세입자분이 내가 아기가 있는 신혼부부라는 것을 알고 일부러 나를 선택해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선계약을 했고,

아기를 업은 채 아내에게 처음으로 합정동 반지하집을 소개해주러 갔을때 한편으로 설레이기까지 했다. 

나름 저렴한 가격에 투룸 사이즈를 구했다는 가장의 뿌듯함? 이라고 해야할까. 여튼 그런 심정의 설렘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약간의 신남을 머금고 아내에게 합정동 반지하 집의 철문을 처음 보여줬을 때의 아내의 눈빛 말이다. 우리 현실에서 이럴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기에 체념하는 듯한 눈빛 같기도 하고, 반지하로 내려가는 서러움 같기도 했다. 나 역시 바로 기분이 다운 되었지만, 뭐 어쩌랴, 우리는 그렇게 반지하에 입주했다. 


이제 반지하 생활동안 인상깊었던 몇가지 사건들을 정리해보련다. 


1.좁은 골목

 내가 사는 반지하방은 입구까지 가기위한 골목자체가 ㄷ 모양으로 들어가는 좁은 곳이었는데, 첫차 모닝을 60개월 할부로 사서 주차할 공간조차 나오지 않았다. 뭐 주차할 곳은 기대도 안했으나, 정작 처음 집앞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을 때 빠져나갈 골목길이 너무 좁고, 초보운전인 나로써는 그 작은 모닝에 상처를 안내고 나갈 방법이 없었다. 몇 번을 낑낑대다가 새 차를 긁고 나서야 빠져나가는 그 현실이 참..... 물론 차를 그리 애지중지하는 타입은 아니어서 크게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2. 곱등이와 바퀴벌레 

반지하하면 빼놓을 수 없는 두 놈이다. 곱등이는 정말 늘 있었다. 어디서 들어오는지는 몰라도 가끔씩 현관 신발장에 출몰하고, 여기저기 뛰어다닌다. 난 바퀴벌레도 싫지만 곱등이가 더 싫었다. 왠지 더 징그러웠다. 잡고 나서 몸을 휴지로 우그러뜨릴 때 내 비위도 우그러지는 것 같았다. 

바퀴벌레는 처음에는 없는 줄 알았었다. 언제였을까, 아이 생일인지, 아님 아내와 내 생일이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케잌을 사다가 먹은 날은 분명했다. 저녁에 케이크를 먹고, 남은 것을 그대로 싱크대에 올려두었었다. 그리고 잠에 들었는데, 새벽에 화장실 생각에 잠에서 깨었고, 방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서 불을 켜는 순간 케이크에 몰려있던 작은 바퀴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보았다'고 하지 않고 '느꼈다'고 하는 이유는 그만큼 바퀴가 빠르기 때문이다. 잠에서 덜 깬 상태로 바퀴를 명확히 직시하기는 힘들었지만, 온 몸이 오싹했다. '아.... 우리 아기가 바퀴가 먹던 케이크를 먹을 수도 있겠구나' 나는 일부러 불을 다시 끄고 기다렸다. 바퀴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으니까. 숨을 죽이고 있으니 바퀴벌레의 이동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사사삭!' 순간 불을 켜니 이번에는 문지방 틈으로 바퀴들이 있다가 사라지는 것을 봤다. '아.......' 

나는 다음날 바로 없는 살림에 해충박멸업체를 불렀다. 그냥 바퀴약으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예전 아내의 자취방에서 충분히 경험했기에, 아기를 위해서라도 과감하게 돈을 쓸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해충박멸업체는 첫 비용으로 18만원정도를 내야했고(월세가 20만원이었던 때다.ㅠㅠ) 그 후로 매달 관리비 2,3만원을 정기적으로 납부해야했다. 그러면 2달에 한번씩 검사를 하러 직원분이 나오고, 약을 바꿔준다. 실제로 효과는 있었고, 우리는 그후로 바퀴가 없는 환경으로 이사할 때까지 5년을 넘게 관리업체에 돈을 지불해야 했다. 내가 사는 공간에 바퀴가 더이상 없다고 확신하기까지 정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3. 속옷도둑

긴말하지 않겠다. 내가 살던 다가구주택은 담벼락이 있었고, 우리집 반지하 창문 밖으로 아주 작은 공간이 있었다. 반지하에서는 빨래가 실내에서 잘 안마르기 때문에 아내는 담벼락 안쪽의 그 공간에 빨래를 널어놓고는 했는데, 어느 날 아내의 속옷이 사라졌다. 아내는 내가 장난으로 가져간 줄 알고 웃으면서 내놓으라고 했었는데 나는 정말 몰랐었던 일이었고, 아내는 그순간 머리끝까지 소름끼쳐했었다. 충분히 위험한 공간이었다. 


4.  쥐

여름이었던가. 언젠가부터 내가 컴퓨터를 두고 작업하던 작은반 창분으로 시큼하기도 한 이상한 악취가 나기 시작했었다. 대체 뭔 냄새인지 모르겠으나 처음 며칠은 참았었다. 그럼에도 그 냄새가 사라지지 않아서 창문밖을 살펴보았다. 내 방 창문과 담벼락 사이는 빨래를 널던 공간보다 훨씬 좁은 10CM정도 공간만 있었다. 그래서 햇빛은 더욱 잘 안드는 곳이었는데, 아 젠장........

철창이 있어서 고개를 내밀 수는 없었으나, 최대한 머리를 내밀어 옆을 보니 내 창문과 담벼락 사이에 쥐가 한마리 죽어있었다. 이미 죽은지 며칠이 되었는지 거기에는 구더기가 바글거렸다. 어떻게 치울 방법이 없었다. 그 좁은 공간에 들어갈 수도 없었고, 물청소를 어찌 하겠는가. 결국 구더기가 쥐를 다 먹고 사라질때까지 나는 내 방 창문을 닫아두었다. 정말 자연이 그 흔적을 다 가져갈때까지 말이다. 하지만 아직도 죽은 쥐와 구더기의 꾸물거림의 끔찍한 형상은 내 머리에 그대로 남아있다. 


5. 볕 

반지하의 가장 큰 단점은 결국 지하라는 점이다. 지하가 아니라는 것을 그렇게나 강조하기 위해 반지하 월세방은 항상 '1층같은 반지하' '2개단만 내려가는 반지하'등으로 호객행위를 한다. 뭐, 우리집은 6,7계단이었기는 했으나 그래도 창문은 나름 컸고, 그래서 하루 몇 시간은 햇빛이 들기는 했다. 이번 물난리 때 사망한 세 모녀의 반지하 창문은 그래서 너무나 더 마음이 아팠던것 같다. 저 정도의 창문크기라면 얼마나 빛이 들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얼마나 집안이 습기로 가득했을까. 

반지하를 살면서 가장 힘든 점이 바로 인간은 원래 해를 보고 살아야 하는 존재인데 그러지 못한다는 그 자체다. 묘하게 그 곳에 있으면 우울한 감정이 스물스물 기어나오는 것 같다. 분명 나는 사회에서 당당하게 일을 하고, 능력있는 사람이라고 자부하면서 사는데, 집은 나를 다시 끌어내린다. 공간이 사람을 지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강력한 공간이다. 그리고 아내와 첫째딸은 그 반지하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우울하게 보냈을까. 나야 일을 하러 나갔다라도 오니 기분전환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첫째딸아이는 아기였으니 아무것도 모른채 해맑았기는 했다. 하지만 내가 일을 갔다올 동안 하루종일 아이와 함께 했던 아내는 그 환경에 더욱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2년이나 반지하에 살다가, 9층짜리 서민아파트 월세로 옮겼을때 가장 감격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이글을 읽는 누구나 알 것이다. 심지어 9층 남향이었다. 첫날을 보내고 아침에 그 큰 창으로 베란다 넘어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데 감동의 눈물이 절로 떨어졌었다. 


-반지하를 강제로 탈출당하며???-


우리 세 가족의 반지하 생활은 전혀 의도치 않은 타이밍에 끝이 나버렸다. 

일단 우리집은 지방에 사는 집주인이 아파트 개발을 위한 투자목적으로 사들인 곳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연락이 왔다. 아파트 개발 확정이 되어 자기는 보상금을 받게 되었으니, 이제 집을 빼달라고. 

물론 아직 계약기간이 남아있었던만큼 당장 나가지는 않았지만 이사할 여력도 없었기에 고민 중이었다. 

그러다가 두번째 겨울을 맞았을 때, 정말 혹독하게 추운 날이었다. 나는 하필 그날 부산에 일이 있어 내려와있었는데, 기차를 타고 내려가는 중간에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수도관이 동파된 것 같다고. 그래서 물이 안나온다고 했다. 내가 있어야 얼은 수도관을 녹이기라도 할텐데.... 1박2일 일정으로 부산을 내려온 것이었고, 내가 책임자로써 함께 한 자리라서 당장 서울로 올라갈 수도 없었다. 어린 첫째 아기를 붙들고 아내는 필히 울었을 것이다. 이미 내게 전화할때도 그 상황 속에서 울먹였으니까. 

그러나 부산에 도착하고 몇시간이 지났을까. 아내에게 또 새로운 소식이 왔다. 보일러도 고장난 것이다. 영하 10도가 넘는 한파에 보일러마저 고장이 났고, 아내는 아기와 물도 없는상황에서 추위에 떨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부랴부랴 아는 교회 형님에게 상황설명을 하고, 바로 아내와 딸아이를 형님네 가정으로 피신시켰다. 나 역시 더이상 일을 볼 수가 없었다.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그길로 부산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이미 수도관과 보일러 모두 고장난 상황에서 수리비도 많이 나오는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집주인이 나가라고 통보한 만큼 고쳐줄리 만무했다. 결국 나와 나를 돕고자 모인 교회 형님네 가족들은 차라리 새로운 집을 찾자고 의견을 모으고, 다음날 서울 합정 근처부터 가능한 월세방을 찾으러 돌아다녔다. 2년동안 나름 열심히 일했으나 고작 내가 모은 여윳돈은 500정도였다. 500-20으로 살았으니, 보증금을 1000만원까지는 올릴 수 있었는데, 문제는 서울 집값의 상승률이 더 컸다. 합정에서 반지하도 구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다시 반지하에 들어갈 용기도 없었다. 결국 지상층으로 예산선에 맞추다보니 합정동은 우리에게 사치였고, 결국 강서구 방화동, 서울 끝자락까지 살펴보았고, 거기서 2000-40짜리 12평 아파트를 찾게 되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금요일에 수도관이 터지고, 토요일에 집을 찾으러 다니고, 그날 집주인 불러다가 계약해서 다음 월요일에 입주를 했다. 정말 말도 안되는 스케줄이었으나, 그 정도로 급한 상황이었다. (아참 보증금은 1000밖에 없는데 2000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은 나를 도와준 형님들이 흔쾌히 500씩 보태주었다. 갚을 생각하지 말고 받으라면서 ㅠㅠ) 

그렇게 우리 가족은 또 새로운 곳으로 둥지를 틀었다. 처음 원룸은 관악구 신림동이었고, 두번째 원룸은 동대문구 전농동, 세번째 반지하가 마포구 합정동, 네번째가 바로 강서구 방화동 아파트였다. 

 결국 이렇게 우리의 반지하 생활은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마포구 합정동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합정동 근처 빌라4층에 여전히 세입자로 살고 있다. 그래도 이번 집은 5년이나 넘게 재계약하면서 오래 살고 있다. 다만 여전히 제대로된 아파트는 꿈도 못꾸고 있다. (방화동 아파트는 너무 좁았고, 낡은 만큼 작은 방하나는 너무 추워서 사용이 불가할 정도였고, 관리비는 엄청나게 나왔다. 그래서 동네는 살기 좋았지만, 인생의 모험을 걸고 다시 합정동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제 반지하 생활을 접은지도 10년이 지나서 아득한 옛날같지만, 이번 수해는 나의 반지하 생활의 아픔들을 다시 끄집어내었다. 물론 그러면서 내 신세를 한탄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직도 반지하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나와 같은 서민들의 고통이 여전히 크다는 것이 어떤 메아리로 떠돌아다니고 있을 뿐이다. 

 서울시장은 앞으로 반지하를 모두 없애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나는 되묻고 싶다. 정작 중요한 것은 탐욕에 눈이 멀은 다주택자를을 규제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겠냐고, 실거주 목적으로 집을 한채씩만 갖도록 정부가 규제를 해야 집들이 남아돌게 되고, 그래야 빌라 2,3층 살던 사람들이 거품이 꺼진 아파트로 이동하고, 반지하사는 분들이 1층으로 올라올수 있는거 아니냐고, 그냥 무조건 못살게 만드는 것은 반지하를 살 수밖에 없는 처지의 사람들을 길거리로 내몰게 되는 탁상행정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 지금 정부는 이미 부자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 있고,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그 부담을 지우고 있다. 종부세는 대체 왜 완화하는 것인가? 앞으로 집값이 폭락하면 과연 그 매물을 다 누가 거둬들일까? 세금 부담없는 현금부자들이 바로 주워갈 것이다. 

 확신하건대 '그들은?' 반지하를 없애고 싶어하지 않는다. 계급이 있어야 그들은 동력을 얻는다. 남의 머리위에 올라서서 통치하는 권력의 욕망은 반지하 살이가 있을때 더욱 정당화되니까 말이다. 결국 정치는 쇼로 남을 뿐이고, 우리는 또 각자도생해야 할지도 모를 판이다. 판이 개판이면 뒤짚는 판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참. 내가 살던 그 반지하집은 결국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헐렸는데, 바로 그 아파트가 합정 푸르지오다. 밑에 사진 속 왼쪽 아파트, 딱 저 자리가 우리가 살던 그 곳이다.ㅜㅜ 정작 나는 근처 빌라를 배회하며 가끔 저 주상복합 상가에 놀러가 외식을 할 뿐이다. 그게 내 현위치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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