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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Jun 11. 2020

하녀, 자본주의 안에 우뚝솟은 남근이라는 표상.

문제작 '하녀'를 보았다. 

일단 영화는 보는내내 지루하거나 따분한 느낌은 전혀없이 흥미롭게 본거 같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불이켜질때, ''이게뭔가.'싶었다. 

도대체 감독의 의도가 뭐였을까, 

일단 영화의 도입부인 도시의 야경, 자살직전인 여성의 시선부터 시작해서 밤거리를 누비는 수많은 여성들,

일하는 여성들 향락의 자본주의 속에 수많은 여성의 군상들을 보여주며 영화는 시작한다. 


그리고 주인공 전도연의 역할은 어벙한듯 하면서도 순수한, 그리고 삶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독특한 여성의 모습이다. 여기서 독특하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체계에 잘들어맞지 않는 해괴함이기도 하다. 

이러한 주인공이 외딴곳의 대저택의 하녀로 들어가는 것도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안되지만, 

이 캐릭터가 현대자본주의시대에 안맞는 캐릭터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되려 이해가 갈지도 모르겠다. 

포스트모던인같은 '그냥' 좋아서랄까. 


문제는 이 저택에서 만나게 되는 윤여정과 안주인 서우라는 두 여성인물과의 관계다. 

윤여정은 철저한 프로정신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만, 뒤에서는 이러한 현실을 증오하는 점에서 전형전인 감정노동의 가면을 쓰고 있음을 알수 있고, 

서우는 모든 것을 갖은 부자이지만, 대를 확고히 이어야 한다는 안사람의 강박증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영화는 바로 이 여성들과의 관계가 이정재라는 거대남근이라는 표상을 맴도는 행성과도 같은 느낌이다. 영화의 모든 중심이 바로 이 사회를 정복하고 지배하는 남근선망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배들의 열연으로 영화는 되려 중심이 그들에게 쏠리는 듯도 하지만, 

이들은 결국 부수적 장치라 할수 있는 희생적 도구일 뿐이다. 

안주인인 서우와 그 엄마는 이 집안에 대를 잇기위해, 권력을 유지하기위해 끊임없이 이 집안의 남자들을 감싸안는다. 그나마 때를 덜탄? 서우는 나름순수해서 하녀와 관계를 가진 남편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의 권력관계의 테두리를 깨지않기 위해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증오를 같은 여성인 전도연에게 전가시키는 것과 같다. 



윤여정은 남근선망의 대상이 이정재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아들이다. 그녀는 이 집안에서 모든 수모를 겪어가며 참아냈던 것은 오직 아들을 위해서라는 것을 영화상에서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영화 마지막에 하녀직을 과감히 그만두는 모습에서 주체성을 찾은 유일한 인물이라는 영화평이 있었는데, 이에 동감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윤여정은 이 일을 그만두어도, 이제 자신의 욕망의 모든 목적인 아들이 검사로 임용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만약 아들이 검사가 되지 못했다면, 그녀가 욕망하는 수준에 아들이 이르지 못했다면 근녀는 계속 이 집에 매여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주인공 전도연은 자신의 순수한 본능을 따르다 거대한 남근의 권력에 상처받고, 그나마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져지만, 영화에서 보다시피 그들의 권력관계에 어떠한 흠집도 내지 못한다. 여기서의 복수는 단순한 사랑에 대한 복수가 아닌 것이 중요하다. 물론 이정재를 순수하게 육체적으로 좋아했을지 모르지만, 그 역시 본능에 충실했을 뿐이다. 마치 영화베티블루의 여주인공처럼 이 영화에서 전도연은 이드,원초아의 표상적 캐릭터가 아니였을까 싶은 마음도 드는 것이다. 그저 순간순간 자신의 본능대로 느끼고 행동하는데, 그렇게 무의식적 자유를 현실로 나타낼 때 결국 현실 권력구조 앞에 억압당하는 충격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이정재는 이 영화 안에서의 중심이다. 

그러나 본질적 중심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정재라는 캐릭터도 결국은 자본주의 사회안에서 군림하고 있는 남근이라는 본질의 임시적 표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정재는 태어나서 단 한번도 자신의 욕망의 결핍을 느껴보지 않은 인물이기에, 모든 것을 가져야만 했던 권력자이기에 어떠한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는다(전도연의 분신자살이라는 충격) 어쩌면 이정재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무의식적 캐릭터가 아닐까,하긴, 욕망은 결핍을 전제로 하는데, 이 영화에서 이정재의 욕망의 결핍은 보이지는 않으니, 그저 절대적 남근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그래서 이 영화의 성관계장면에 유독 오럴섹스가 강조되는 이유도 그러한 측면이 아닐까. 여성 위에 군림하는 남근말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수많은, 그리고 다양한 현대여성들의 군상들이 나오지만, 결국에는 이러한 자본주의 권력구조 앞에 끌려가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메세지를 읽어내게 되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자본주의권력의 근본이 바로 남근이라는 점이 더 충격적인 메세지이기도 하고 말이다. 


이 영화를 쉽게 비판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지배계층에 대한 조소와 비판적 요소를 통해 얘기하곤 하는데, 적어도 그렇게 단순한 구성만은 갖고 있지는 않은것 같다.


그러나 내가 느낀 당혹감은 이 영화전반을 흐르는 거대한 마초적인 특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이 시대가 그런가, 이러한 담론은 이미 과거의 담론이 아닐까싶어서이다.

되려 여성의 권력을 느낄 정도로 여권이 향상되고 있는 이 시기에, 마치 태양처럼 남근이 군림하고 행성처럼 여성들이 떠도는 듯한 이미지가 연상된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시기성에 대한 곤람함이 느껴지는 것이다. 

하긴, 만약 정말 감독의 의도가 그랬다면, 되려 허를 찌르는 주제의식일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지나간 담론이라 생각하는데, 여전히 자본주의 권력계급을 이루는 중추신경이 남성적 남근이라고 역설적으로 외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정말 그럴까? 나도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여배우들의 연기가 눈부신 것은 사실이여서 연기상을 타도 어색할 건 없을거 같은데,

왠지 작품상은 아닐듯하다. 

분명 시대성에서 엇나갔다고 생각하니까..발상의 전환이 없이는 쉽지 않을거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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