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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Jun 17. 2020

디트리히 본회퍼 -삶의 한복판에 계신 하나님의 초월성

스탠리 그랜츠의 [20세기신학] 중에서 발췌요약


히틀러 암살에 참여했다가 결국 순교한 신학자 본회퍼


원래는 자유주의 신학자 하르낙이나 제베르크의 제자였으나 정작 영향은 칼바르트에게 받음.(그리스도중심)

그의 학위논문인 [성도의 교제]는 바르트에게 신학적 기적이라는 찬사를 받음

1932년 히틀러가 권자에 오르게 되면서 본회퍼는 학문의 장을 떠나 목사로 활동하게 됨(바르트는 목사로 시작해서 신학자로)


독일교회의 타락과 이에 대항하는 고백교회에 참여.


목회자들을 훈련하기 위한 불법신학교를 1935부터 40년까지 운영, 핀켄발데

(나를 따르라.신도의 공동생활집필)


전쟁이 임박하자 친구들의 권유로 39년 미국으로 건너가지만(라인홀드 니버의 도움)

그는 고국에 남아 압제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함.


"지금 나의 동포들이 겪는 시련을 함께하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난 후에 독일로 돌아가서 교회를 재건하는 일에 참여할 권한을 가질 수 없을 것이요"


그 후 나치에 저항하는 운동에 가담, 연락원 노릇도 하지만 계획들이 무위로 돌아가면서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하게 됨(목사로써의 딜레마를 이겨냄)


1943년 체포- 옥중서신, 저항과 복종 집필


44년 암살계획이 드러나면서 고문을 받고 45년 4월9일 처형됨. 수용소 해방되기 며칠전이었음.



중심되신 그리스도


 본회퍼는 전통적인 조직신학자는 아니었기에 다른 학자들과 달리 그의 신학이 제대로 정리되지는 않았다. 당연히 그 시대의 영향으로 제대로 신학을 연구할 상황이 아니었기에 안타까움이 크다고 볼 수 있음.


그의 주 저작중 [중심되신 그리스도-그리스도론]은 학생들의 강의노트에 의해 모아진 것이고 그의 [윤리학]은 미완의 원고였다.

무엇보다 그가 39살의 젊은 나이에 처형된 만큼 그의 사상은 계속 성장,발전,변화중이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큼.

그의 여정은 

1기-베를린대학의 교수시기, 

2기-고백교회에 가입하여 체제와의 갈등하며 사람들을 가르쳤던 목회자시기, 

3기-히틀러에 저항하던 시기로 구분할 수 있음.


 1기에 그의 관심사는 교회를 공동체로 봐야 한다는 것


2기는 대가를 지불하는 제자도에 관한 것이었음


3기는 세상 안에서의 거룩함


이 세 시기를 종합해주는 것이 그의 기독론이었다.


그는 다른 자유주의신학처럼 예수의 현존에 대해 고민한 적은 한번도 없었음.(당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과학과 자연주의의 영향으로 예수의 실존에 대해서조차 고민,의심,부정하는 경우가 있었음) 

다만 그의 삶의 여정마다 그리스도의 현존과 실재의 초점들이 달라지는 것에 대해 씨름했었다.


초기에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교회 안에서 발견했기에 교회론에 초점을 둔 것이었다.즉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라고 강조.


후기에는 세상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의 문제를 갖고 씨름하였기에 초기의 교회론을 벗어난다.



자유주의와 결별


그는 종교적 선험을 부인했는데, 종교적 선험은 자유주의 신학 안에서 인간이 하나님과의 접촉점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이미 자신 안에 있다는 주장이었다.(자연신학)하지만 본회퍼는 칼바르트의 주장처럼 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 안에서만 주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하나님의 자기계시가 신학과 윤리학의 핵심이었기에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의 종교성에 대한 비판하였다.


한편 바르트의 초월성 강조에 대해서는 비판적 관점. 

하나님의 말씀이 시간 속에 구체화됨을 바르트가 간과했다고 보았다.



현대성과의 씨름


본회퍼는 교회론이나 자유주의비판보다는 현대성과의 씨름을 통해 그의 신학적 유업을 남겼다. 

[나를 따르라]의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의 대비


값싼은혜- 교리를 믿기만 하면 구원이 쉽게 얻어진다고 믿는 신앙, 관습적인 기독교


값비싼은혜- 구원이 값진 것. 하나님의 아들을 대가로 요구한 동시에 인간에게는 제자로 사는 삶, 순종을 요구함


루터가 수도원에서 나와 세상에 돌아오며 깨달음을 얻었듯이 예수를 따르는 길은 이 세상 속에서 사는 것이다. ( 지나친 세속화도 문제지만 세상을 피해 도피하는 것도 문제)


자유주의신학이 늘어놓는 '성숙한 세계'는 인간의 자율성을 의미하여, 하나님의 은혜,진리와 같은 준거점은 필요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본회퍼는 단순히 여백을 메우기 위한 하나님은 본인도 거부함. 설명될 수 없는 것에 대해 끌어들여진 신개념에 대한 접근방법의 문제점을 파악했다. 이러한 공간메꾸기 논리는 결국 과학에 대한 자신감이 넘치는 시대에 들어서면 당연히 그 신은 폐기되는 것이다. 이를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신학의 관심사를 내면으로 돌려서 유지시키려 한 셈인데 본회퍼는 이러한 접근 자체에 대한 비판을 감행한 것이다.


'신앙없는 세계에서 존재하는 교회의 존재의의는 무엇인가?'


그렇다고 이 세계 속 인간의 나약함,추악함을 들춰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세계라는 이 세상 자체를 복음에 기초하여 그리스도의 빛 아래에서 이해하는 것. 자율적 세계라고 해도 결국 기독교적 신앙과의 관련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지 않으면 진정한 자기이해가 불가능함을 깨우쳐줘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성이 배제된 기독교


이런 흐름에서 본회퍼는 종교성이 배제된 기독교를 주장한다. 물론 거짓 종교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진정한 기독교신앙을 제시하고자 함이다. 인간은 종교성을 타고났다는 기존의 변증학적 종교성을 비판,혹은 사변적 형이상학에 머무르는 종교성을 비판한다.무엇보다 신앙을 영적인 영역에만 국한시켜 신앙을 개인의 사물화로 만드는 행위를 비판했다.


이제는 성숙한 세계라는 상황 속에서 성경적 용어들의 비종교적 해석을 요구한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계신 초월자'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에서가 아닌 알고 있는 것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현대세계에 연약해지신 하나님을 '자기 자신을 이 세상에서 밀어낸 자들을 용납하시고 기꺼이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 그의 연약함으로 이 세상의 능력을 능히 이기시는 성경의 하나님을 따라야 한다.



거룩한 세속


이러한 하나님 이해는 '거룩한 세속'으로 이어지는 급진적 제자도와 연관된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계신다.즉 어떤 종교의 영역에 갇힌 분이 아니다.그리스도인들인에게 닥치는 시험은 이 세상을 벗어나 경건한 영지로 숨어 종교적 내면세계에 빠져드는 것, 혹은 그 반대로 종교자체를 이 삶의 여러 국면의 활동중 하나로 폄하하는 것.


초월과 초연의 경건추구 경계,금욕주의 경계


그리도인이 됨이란 이 세상에서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교회는 마을 한가운데에, 그들의 삶은 이 세상에서 사는 삶이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의 구석구석에 스며들도록 이 세상의 잔을 마셔야 한다.


 한편으로 세상의 참여는 우리의 삶에 허락된 좋은 것들을 긍정하는 것을 포함한다.하나님이 주신 복속에서 누리고 사랑하는 것,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경건이라는 이유로 사양하는 것이 잘못이다.


 한편 이 세상의 참여는 하나님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계 역사에 대한 전적책임을 갖는다.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진정한 제자됨이다.교회는 이 세상의 사람들을 위하여 존재할 때에 비로소 그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


'한 사람이 신앙이 무엇인가를 배우는 때는 이 세상에서 철저히 살아가고 있을 때이다.그는 자신을 어떤 종교적 존재,가령 성자라든가,회심한 죄인,성직자라고 하든가,의인,불의한자,병든자,건강한자와 같은 이름으로 부르려는 여하한 시도도 배격해야 한다.종교적 너울을 벗어 버리는 바로 이것,즉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태연히 살아가는 것이 내가 말하는 세속의 의미이다. 바로 이러한 삶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철저히 하나님의 품으로 내던져 이 세상에서 그의 고통에 함께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본회퍼의 제자도가 고전적 기독교의 경건을 뒤엎는 것은 아니다.즉 세상속에서 부도덕하고 욕망에 탐닉하는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고통에 참여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한계를 넘어갈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하나님의 임재에 밀착된 삶, 그리스도 안에서 살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윤리적인 삶과 신명을 다해 사는 삶이 하나로 모아지는 것! 그리스도는 인간을 선하게 할뿐 아니라 또한 강하게도 하신다.


궁극자와 제2궁극자


영원한 실재와 현재세계는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기에 제2의 궁극자인 세계를 완전히 배격하거나 전적으로 인정하는 이중적 실수를 피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제2의 궁극적 세계에 전적으로 속한 자들처럼 살되, 그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점을 명심하고 매일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야 한다.하나님의 의도를 바라보며 이 세상에 참여하는 것.이렇게 할때 그리스도가 이 세상과 만나는 만남에 참여하게 된다



은밀한 제자도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은둔성'이 있어야 한다.이 세상에서 유독 자신을 의식할 필요가 없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전시하려고 해서도 안됨.오히려 하나님이 그분의 감추인 실재를 드러내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드려야함.


판켄발데의 신앙공동체의 집단적 경건생활을 통해 은밀한 제자도를 추구했으며 동시에 세상참여의 지지근거


 그리스도인은 제2궁극적 세계에 살면서 다른사람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야한다. 문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능력은 자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다.


한편 성숙한 세계라는 맥락에서 기존 교회가 구시대적 범주에 묶여 종교성에 매달릴 때 은밀한 제자도는 이를 대체할 방법이 된다.



초월성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처럼 본회퍼는 초월성을 확립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그의 초월성은 바르트처럼 인간세계에 돌입해오는 말씀과는 달랐다.그에게 초월하신 하나님은 이 세상 가운데 계시지만 이 세상 너머에 계시는 이다. 제2의 궁극적 세계에 의매를 부여하는 궁극자의 실재,신자나 교회로 하여금 이 세상 존재하는 사명을 감당하도록 지탱해주시는 은밀한 제자도로 나타나시는 분.


'초월이란 우리가 범접할 수 없고 우리의 힘으로 미칠 수 없는 과업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손을 내밀면 닿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시는 당신이다. 다른 어떤 종교에서처럼 동물의 모습이나 어떤 추상적인 형태의-절대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무한한 동등의-모습도 아니고, 또는 희랍 신화의 자율적 인간의 신인도 아니다.그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이며,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존재하는 인간, 즉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다.'



비록 본회퍼는 자신의 신학을 집대성하지는 못했으나 그의 처절한 삶과 죽음 자체가 그의 신학적 주제를 체현한 것이며,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고난에 진정으로 참여하는 급진적 제자도의 삶이라는 과업완수를 위해 희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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