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시나페홀로 Jun 26. 2020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본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



*공리주의에 입각한 판단사례

바다에 표류한 4명의 선원이 더 이상 먹을 식량이 떨어지자, 병에 걸리고, 나이가 가장 어린 선원을 죽여서 잡아먹었다. 나머지 3명은 이 한사람의 희생을 통해 생명을 연명하다 구조가 되었고, 본국에 돌아가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피고가 된 생존자들의 논리는 최악의 상황에서의 최선의 선택임을 강조했다. 누군가를 죽여서 먹지 않으면 모두가 죽을 수 밖에 없었는데, 어차피 병에 걸린 아이는 죽을 상황이었기에 다수를 위해 소수의 희생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 이러한 논리에 대한 두 가지 반박이 가능하다. 첫째, 어린 선원을 잡아먹어 얻은 이익이 희생보다 정말 더 큰가? 물론 살아난 사람의 숫자, 가족의 기쁨 총량은 증가하겠지만, 이러한 사례가 정당화되면 사회 전체적으로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살인에 대한 사회적 기준의 약화, 법의 자의적 해석 등, 두 번째, 설령 아이의 희생이라는 비용보다 잡아먹은 이익이 더 크다 할지라도 사람을 잡아먹는 행위 자체가 용서될 수 있는가? 본인의 동의없이 목숨을 빼앗는 것은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도덕적 비판이 가능하다.

- 위의 사례에서 다수의 선원들이 판단한 논리, 그리고 첫 번째 반박이 바로 공리주의의 판단방식이다.


1.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

- 벤담의 철학은 오늘날의 정책입안자, 경제학자, 경영자, 일반 시민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도덕의 최고 원칙은 행복의 극대화이다. 쾌락이 고통을 상회하여 공리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즉 쾌락과 행복을 극대화, 고통을 최소화하는 것이 옳은 행위의 판단 기준이 된다.

- 모든 고통과 쾌락은 ‘감정’에 지배된다. 쾌락이라는 감정,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감정이 모든 옳고 그름의 기준인 셈이다.

- 이러한 판단기준은 각 개인 뿐만이 아니라 정부의 법과 정책 입안에도 기준이 된다. 벤담이 보기에 공동체란 허구의 집단일 뿐이며 단지 개인들의 총합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벤담은 자신의 공리원칙에 강한 자신감이 있었다. 설령 이 원칙에 반대한다 해도 결국은 쾌락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극소화하고자 하는 적용 방법의 차이일 뿐이며 원칙 자체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공리주의 적용

벤담은 자신의 원리를 적용한 ‘원형교도소(판옵티콘)’를 제시했는데, 이는 중앙에 감시탑을 설치해 교도관이 재소자들을 감시하되, 재소자측에서는 감시탑을 볼 수 없게 하여 24시간 감시당한다는 두려움을 줄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교도소 운영을 민간업자가 하되 운영비용은 죄수들의 노동력을 통해 충당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실제로 당시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이러한 공리주의에 입각한 효율적 원리는 오늘날 영미의 교도소 운영에 점차 적용되는 실정이다.

또한 벤담은 구빈원을 세워서 극빈자를 강제수용하는 방안을 세웠다. 일단 거지를 보는 일반인들은 두가지 측면에서 행복이 감소된다. 정이 많은 사람은 동정심이라는 고통, 정이 없는 사람은 혐오감이라는 고통을 겪는다. 따라서 공리적으로 거지를 길거리에서 마주치지 않게 하는 것이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설령 거지에게는 부당한 처사가 될 수 있다 하여도 사회의 총 행복을 감안했을 때 강제 수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빈원의 설립과 운영비용은 또 다른 사회적 고통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있는데, 이 역시 구빈원에 수용된 거지들의 노동력을 통해 충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벤담의 이러한 원리가 가혹해 보일 수도 있지만, 벤담의 목적은 처벌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님을 유념해야 한다. 그는 단지 사회의 공리를 줄이는 문제를 해결해 다수의 행복에 기여하려고 했을 뿐이다.

- 그러나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반박1 : 개인의 권리

공리주의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개인의 권리가 존중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직 사회총합에만 관심을 두기에 개인 각자의 선호도는 단순히 총합에 더해지는 항목에 불과한 것이다.

사례1: 고대 로마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콜로세움에서 사자의 먹이가 되었는데, 공리주의의 입장에서는 사자의 먹이가 되는 사람의 끔찍한 고통보다도 그 것을 보고 즐기는 군중의 행복이 더 크다고 판단한다. 설령 이러한 행위를 공리주의 원리에 입각하여 비판한다면, 그 같은 게임이 잔인한 습성을 키우고 로마 사회에 폭력을 양산할 수 있다는 우려로 반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리주의적 비판 자체도 한 사람을 사자먹이로 내던지는 사태에 대한 집단게임의 반대논리로 적당하다고 평가하기엔 뭔가 부족해 보인다. (결국 개인의 인권, 가치에 대한 논리가 필요해진다)

사례2:시한폭탄 용의자가 잡혔을 때 고문을 정당화할 수 있다. 고문은 용의자에게 고통을 주지만, 폭탄이 터지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날아가기에 잃게 되는 총행복이 더 크다고 판단되기에 고문에 대한 도덕적 정당화를 얻게 되는 것이다. 물론 공리주의 원리로 고문을 비판할 수도 있다. 고문이 강제적 답변을 유도함으로써 진실에서 멀어질 수 있고, 우리 군인이 포로로 잡힐 때 똑같은 강도의 고문을 각오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혹은 테러용의자의 입을 열게 할 방법이 그의 어린딸을 고문해야 하는 것이라면, 공리주의자 조차도 주춤할 것이다. 분명 공리주의적 계산으로는 총행복을 증가시킬 수 있는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정당하지 못하다는 느낌에 벗어날 수 없다.

사례3: 한 행복한 도시가 있다. 문제는 모든 사람이 행복한 이 도시의 한 건물 지하에 한 아이가 인권이 유린된 채 갇혀 있는데, 시민 모두가 이 아이의 상황을 알고 있음에도 방치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아이가 풀려나면 도시의 행복이 깨질거라는 강한 믿음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리주의에 의해 이 아이의 인권은 침해되어도 좋은 것인가?


반박2: 가치를 나타내는 단일통화

- 공리주의 또 다른 한계는 바로 모든 행복을 계량하고 통합하고 계산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마치 물건의 무게를 재듯이 모든 사람의 기호를 동등하게 계산한다. 이러한 판단의 근저에는 사적 판단의 가치를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도덕적 행위를 단일통화로 바꿀 수 있을까? 무엇가 잃어버리는 것이 있지 않겠는가? 실제로 정부와 기업에서 공리주의의 논리를 비용편익 분석을 통해 시행하고 있는데, 그 문제점을 찾아볼 수 있다.

-사례1 : 담배회사인 필립모리스가 체코 당국이 흡연에 따른 의료비용증가 부담에 따라 담배에 세금을 높이려 하자 이를 막기 위한 비용편인 분석을 발표했다. 필립모리스는 흡연이 체코예산에 미치는 영향을 비용편인 분석으로 조사했는데, 정부는 손해가 아닌 이익을 흡연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결과를 내었다. 그 이유는 흡연자들이 생존 중에는 정부의 의료예산을 높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일찍 죽게 됨으로써 노년층을 위한 의료, 연금, 주거부문에서 상당한 예산 절감효과를 볼 수 있다고 발표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분석은 필립모리스와 대중의 관계를 파국으로 치닫도록 만들었으며, 필립모리스는 인간의 기본가치를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무시한 자료임을 시인하며 사죄해야 했다. 결국 흡연과 관련된 정책이 도덕적으로 인정받으려면 금전적 측면뿐만이 아니라, 공중보건과 인간행복에 미치는 영향도 고려해서 조사해야 하는 것이다.

-사례2: 인간의 가치도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1970년대에 미국에서 가장 잘 팔린 소형차 포드핀토는 가스탱크의 폭발위험성이 상당히 높은 결함이 있었다. 포드 경영자들도 이를 알고 있었는데, 비용편익 분석결과 결함을 그대로 방치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가스탱크를 안전하게 보호할 장치를 부착하려면 차 한 대당 11달러가 드는데, 그에 따른 이익(자동차운전자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그보다 크지 않다는 결과였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을 경우 죽게되는 사람, 화상입을 사람을 돈으로 환산하고, 폭발한 자동차의 비용보다 미리 차를 안전하게 전량고치는 비용이 회사입장에서 더 크다는 이유에서 였다.

-사례3: 미국환경보호국은 대기오염 기준을 내놓으면서 비용편익 분석을 시행한 결과 사람 나이에 따라 차등적인 가치를 매겼다. 왜냐하면 젊은 사람이 나이든 노인보다 앞으로 살 날이 더 많고, 이는 결국 누릴 행복의 총량이 크다는 점에서 가치를 높게 평가한 것이다.

-결국 비용편익 분석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일정한 이익과 편익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이 안전과 같은 대가를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사람 목숨에 붙여지는 금액에 대한 거부감은 극복해야할 충동적 감정에 불과하며, 이는 명확한 사고와 합리적 선택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평가절하한다


대가를 받고 치르는 고통

- 1930년대의 사회심리학자 손다이크는 공리주의의 가정을 증명하려 했다. 그는 다양한 고통을 겪는 대가로 얼마를 받으면 좋겠냐는 질문 항목을 만들어서 설문조사를 하였다. 예를들어 발가락 절단하는 대가. 지렁이 한 마리 먹는 대가, 위 앞니 하나를 뽑는 대가에 대해 금액을 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손다이크는 만족에 대한 수량적 평가가 가능함을 주장한 셈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만든 가격목록에 대해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해도 하지 않겠다는 비응답자가 3분의1일이나 있었다는 점에서 엉터리조사임을 알 수 있다. 손다이크는 이러한 비응답자를 제외하고 발표한 셈인데, 비응답자가 있으면 결국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불쾌하게 여긴다는 점이 드러남으로써 그의 수량적 평가결과가 허위가 되기 때문이다.


존 스튜어트 밀

존 스튜어트 밀은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 즉 개인의 권리 무시와 도덕적 문제에 무조건적 수량화라는 비판에 대해 반박을 제기한다. 밀은 계산적인 원칙보다는 좀 더 인간적인 원칙으로 공리주의를 다듬어서 문제를 해결코자 하였다.

개인의 권리침해라는 비판에 대한 반박-밀은 개인의 권리와 공리주의의 접목을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저술한 [자유론]은 사람들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원하는 것은 무엇인든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요지로 작성되었다. 정부는 개인의 자유를 간섭해서도 안되고, 단지 개인이 사회에 책임을 져야할 때는 타인에게 영향을 미칠 때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의 자유의 신장은 결국 공리주의와 상충되어 보인다. 예를들어 다수가 소수의 종교의 자유를 억압할 때 다수의 행복을 통해서 소수의 억압을 정당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밀은 이에 대해 반박한다. 그가 보기에 개인의 자유옹호 역시 공리주의에 기반해야 하는데, 문제는 이 공리주의 역시 넓은 의미로 확장하여 장기적인 관점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다 보면 인간의 행복이 극대화 될거라는 확신이다. 다수가 소수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당장에는 공리가 극대화될지는 몰라도 장기에는 사회의 불행이 늘 것이라는 관점이다.

-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면 장기적으로 사회가 행복해지는 근거로는 첫째 소수의 반대의견이 종국에는 사실로 판명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 둘째 설령 사실이 아니어도 치열하게 의견경쟁을 하다보면 다수의견의 독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 셋째 다수의 관습과 관례만을 따르다 보면 결국 사회는 수동적으로 변해 사회발전을 촉진하는 힘과 활기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밀의 개인의 권리주장은 한계가 있다. 사회 발전을 위해 개인의 권리를 존중한다면 , 장기적 행복을 얻으려는 사회발전의 원리상 정작 개인의 권리는 실제로 필요치 않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또한 공리주의의 원리상 권리가 침해되어 사회 전체의 행복에 어떤 영향을 미치던 간에 결국 당사자에게는 부당한 행위가 된다.

-밀은 여기에 대해서도 순응은 곧 삶의 적이라며 반박을 한다. 인간의 능력은 지각, 판단, 차별적 감정, 정신활동, 나아가 도덕적 기호까지도 포함하여 선택하는 과정에서만 발휘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결국 행동과 결과만이 전부가 아니라 개성을 중시함으로써 인격을 중시하는 꼴이 되어 결국 공리주의의 원리자체를 부인하게 되는 오류가 된다.


공리주의는 모든 가치를 하나의 저울로 계량한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밀은 벤담과 달리 쾌락에 있어 고급쾌락과 저급쾌락을 구분하여 질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벤담에겐 쾌락은 쾌락이고 고통은 고통일 뿐이어서 쾌락과 고통의 강도와 지속성이라는 기준만 존재하여 평가하였다. 벤담의 공리주의가 강력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사적판단을 배제하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누가 남에 대한 쾌락에 있어 더 낫다, 못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라 생각하였다. 따라서 모차르트를 좋아하든 마돈나를 좋아하든 질적 가치는 똑같다는 것이다. 심지어 플라톤의 책을 좋아하든 펜트하우스 잡지를 좋아하든 양자의 차이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밀은 이러한 주장에 반대하여 쾌락에도 분명한 질적 차이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위에 제기된 사자우리의 그리스도인 사례는 대중들의 쾌락이 고상하지 못하다고 비판할 수는 있게 된다. 좀 더 고상한 질 높은 쾌락을 취하라고 말이다. 밀은 다른 도덕적 이상이 없이 공리만으로 고급과 저급쾌락을 구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그는 “행복을 양산할수록 옳은 행동이며, 그 반대상황을 초래할수록 나쁜 행동이다. 행복이란 쾌락이 있고, 고통은 없는 것이며, 불행이란 고통이 있고, 쾌락은 궁한 것이다. 도덕 이론의 바탕이 되는 삶의 이론인 쾌락 추구와 고통에서의 해방이 유일하게 바람직한 목표”라고도 확신하면서 “모든 바람직한 것은....쾌락이 내재한다는 점에서 또는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막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바람직하다” 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더 바람직한 쾌락은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밀은 두가지 쾌락이 있을 때 그 둘을 모두 경험한 사람들 전부, 또는 거의 전부가 어느 하나를 절대적으로 좋아한다면 그것을 좋아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상관없이 그것이 더 바람직한 쾌락임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밀의 주장의 장점은 쾌락이라는 공리주의의 원칙이 벗어나지 않으면서 질적측면의 구분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수가 절대적으로 좋아하는 감정에 있어서 현실적으로 우리는 플라톤보다 만화책을, 오페라보다 티비시청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렇다면 만화와 티비가 더 질이 높은 것일까? 결국 단순히 즐기기 쉬워서 좋아하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실제로 만화 [심슨가족]과 세익스피어의 [햄릿]을 두고 가장 즐거운 것이 무엇이며, 가장 고급적인 것이 무엇인지 두가지 설문을 한 결과 가장 즐거운 것에는 [심슨가족]이, 고급적인 것에는 [햄릿]으로 결정되었다. 결국 우리의 쾌락의 즐거움과 고급스러움에 대한 판단이 별개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밀 역시 이러한 한계점에 대해 인정을 하지만, 그렇다고 렘브란트와 텔레비전 재방송의 차이를 모른다는 뜻은 아니라고 반박하는 셈이다. “만족하는 돼지보다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이 더 낫다”는 그의 주장이 바로 이러한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고급능력을 신뢰하는 그의 주장 자체는 수긍이 되지만, 결국 밀의 이 말은 공리주의의 전제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다. 욕구자체는 더 이상 고급과 저급을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 기준은 우리의 바램,욕구와 별개인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이상에서 구분되어 지는 것이다.햄릿이 위대한 예술이라 판단되는 것은 더 재미있는 오락거리여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고급능력을 끌어내주고 더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 공리주의를 주창한 벤담은 일관된 철학자였다면 밀은 좀 더 인간다운 철학자였던 셈이다.    

작가의 이전글 [글쓰기 연습] '언택트 사회'와 '면대면 사회'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