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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Jul 02. 2020

19세기 신학에서의 내재성2-슐라이어마흐와 리츨

스탠리 그랜츠의 [20세기 신학] 중에서 


1 [슐라이어마흐]-[1768-1834]


슐라이어마흐는 종교적 감정, 인간의 특별한 경험. 직관적 삶을 종교의 중심으로 격상시켰다.그는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기독교적 감동, 신앙의 감정들에 대해 중점을 둔다.

당시 그는 1800년의 낭만주의에 매료됨. (낭만주의는 계몽주의 철학의 합리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나 인간의 감정,상상력,직관을 강조함. 자기 실현과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시,음악을 소중히 여김, 괴테의 영향력)

[신앙에 관하여]라는 책을 통해 신앙을 멸시하는 교양인들에게 진정한 신앙은 교리와 무관하며 그것은 보편적인 감정에 관한 문제라고 설득하려 하였다.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에 관한 교리적이거나 신조적 명제에 복종하는 것과는 다른,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라는 점을 입증하려 하였다.

그의 대작은 1830년의 [기독교신앙]이라는 조직신학서이다.

현대를 위한 기독교 교리의 체계를 제시함.

정통주의자들의 반응- 계몽주의 시대의 반초자연주의적 정신을 용인한다는 합의각서,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척하면서 인간에 대해 말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였다

진보주의자들의 반응- 유행이 다 지난 권위주의적 교의서로부터의 해방이며 동시에 과학과 갈등하지 않는 진정한 의미의 현대적 기독교 신앙형태로의 전이라고 보았다.


계몽주의에 대한 슐라이어마흐의 반응

18세기는 인간의 이성을 격상시킴.칸트는 순수이성은 감각적 경험의 대상의 영역에만 제한되고 감각적 영역은 넘어설 수는 없다고 보았다. 이성이 감각적 경험의 세계에만 적용할 수 있다는 칸트의 주장은 신앙과 이성을 연결시키고자 한 종교사상인 정통주의나 이신론 모두에게 심각한 문제를 안겨주었다. 슐라이어마흐는 칸트가 설정한 이성의 한계를 받아들이면서도 그의 종교비판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다.

마침 이 시기에는 역사비평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생겨, 성경 및 기독교적 권위가 있는 문서들에 대한 의문이 생기고, 자연법칙에 대한 믿음의 배경이 큰 만큼 기적이나 초자연적 개입에 대한 신뢰도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슐라이어마흐는 한편으로 권위나 교의적 신앙체계에 대한 불신이 있었으나, 동시에 자연의 생동감, 인간감정의 힘과 상상력에 대해서는 신뢰를 갖고 있었다.즉 합리성만을 강조한 계몽주의에 대해 감정의 측면에 있어 반박을 제시한다.


신학적 방법

종교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필연적인 어떠한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며, 심지어 그것과 동일하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인간의 경험에 기초한 신학을 시도했다. 인간의 경험과 의존감정이 신학의 근본이 될 때 정통주의나 합리주의사이의 갈등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전통주의는 초자연적 계시로써 신학을 보았기에 위로부터의 신학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계몽주의 신학은 그 작업을 하나님에 대한 합리적 사고에 관한 성찰로 보고, 아래로부터의 신학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슐라이어마흐는 전통주의방법은 인간의 창의력을 질식시키고 하나님에 대한 교리와 하나님 자신을 혼동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한편 계몽주의의 이신론적 접근방법은 메마르고 자연주의적 신앙으로 인도해 종교철학과 다를바가 없다고 비판했다.

이 두 입장을 비판하면서 신학을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경험의 인간적 성찰로 간주했다. 종교적경험이 신학적 성찰의 근거가 된 것이다. 그는 종교의 본질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합리적 증거나 초자연적 계시된 교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문화 속에 있는 근본적이고, 유한한 것들을 통하여 모습을 드러내는 무한한 것에 대하여 전적으로 의존하는 '감정'에 있다고 보았다.

그가 종교를'감정'이라고 할 때 이 감정은 단순한 영어의 감정이 아닌 '어떤 깊고 심오한 의식'을 가리킨다.즉 뚜렷한 사고나 감정 이전에 느끼는 성찰이전적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직접적 의식으로써 모든 유한이 무한에 일시적인 것이 영원한 것 안에 보편적으로 존재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것도 매개로 하지 않는 직접적 느낌 안에서 생명자체를 소유하고 아는 것이 종교이다.

이성과 양심이 각각 과학과 도덕을 발생시킨다면 경건은 종교를 낳는다. (경건이 종교적 감정)그에게 과학,도덕,종교는 대등한 것이었다. 경건과 종교과 과학,도덕과 다른것임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기존 교의들,신학체계와도 구분하려 하였다. 교리는 그저 경건을 말로 표현하려는 인간들의 시도에 불과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처럼 경건은 종교라는 형상의 본질이며,어떤 구체적인 종교전통(질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형성되고 성취된 기독교의 '하나님-의식'이나 '자기-의식'이라는 경험에 있다.

그가 이룬 신학적방법론의 혁신은 바로 '믿는 주체로 돌아가라' 이다. 믿는 자들의 경험이 신학의 주제이며 기준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교리적 형식은 끊임없이 재검토해야 한다고 보았다. 어떤 교리도 완전한 것은 없기에 언제든 수정가능하다. 신학의 비판적 과제는 교회의 설교나 교리적 형식이 당대에 일구어 놓은 기독교의 '하나님-의식'에 대한 최선의 분석에 엄밀하게 일치하는 지를 검토하고 무엇을 유지하고, 무엇을 폐기해야 할지 , 수정해야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그의 신학적 방법은 분명 계몽주의를 흡수하되 그 또한 넘어서려는 기획이었다. 인간의 경험을 중시하며, 권위를 배제하고, '아래로부터'의 지식을 세워가려 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경험 안에 국한시키고, 하나님 자체나 우주의 궁극적 본질에 대한 사유는 피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종교를 이성의 한계 내에서만 가두려는 계몽주의의 규정을 벗어나 경건의 영역을 강조하였다. 감정과 직관적 지식을 강조한다.


교리적혁신

성경은 신학의 중심이 아니다. --그럼에도 중요성은 인정한다. 초기 기독교공동체의 '종교적경험'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모든 교리들은 그리스도인의 종교적 자아-의식, 그리스도인들의 내적경험으로부터 추출되어야만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성경의 권위는 절대적이지 않다. 다만 성경이 그리스도자신의 '하나님-의식'을 순전히 반영하는 한에서 권위가 있음은 인정한다. 결국 신학을 위한 궁극적 기준은 성경자체가 아닌 그리스도인들의 자의식 안에 재현된 '하나님-의식'이다.


하나님

그의 신론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경건한 하나님-의식,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존감정에 의해 결정된다. 하나님의 속성이라 하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이 아닌, 이 또한 인간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다. 즉 하나님 그 자체에 대한 묘사가 아닌 하나님을 경험하는 인간의 경험의 방식이다.

이러한 관점은 기존 기독교사상과 크게 충돌한다. 우선 슐라이어마흐는 악을 하나님이 원인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이 죄와 악의 창시자라는 것이다. 구속을 위해 죄가 반드시 필요한 만큼 그가 죄를 창시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기적의 현실성을 단호히 거부한다. 기적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는 셈이라고 본 것이다. 세번째, 중보기도의 효과를 부정했다.즉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뭔가 다른 일이 생겼을거라고 믿는 것 역시 하나님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는 셈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하심이다. 결국 그는 초자연적 현상을 강하게 부정하는 셈이고, 과학과 기독교는 원칙적으로 모순되지 않게 본 셈이다.

마지막으로 삼위일체교리에 대한 비판이다. 종교적 의식에 관한 언급이 아니기에 삼위일체교리는 기독교신학에 거의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다고 보았다.

그는 범신론을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을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하기를 꺼렸다. 하나님은 멀리서 이 세계를 다스리는 어떤 위대한 인간과 같은 존재로 보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객체가 아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이며, 모든것을 결정하고, 모든 것 안에 내재하는 초인적 능력으로 피조성이 부과하는 모든 차별성을 뛰어넘는다.


기독론

예수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는가? 전통적인 성육신 교리를 거부하고, '하나님-의식'이라는 경험에 기초한 기독론으로 대치한다. 그는 한 개인안에 인성과 신성이라는 두 본성이 있을수 없다고 비판한다. 그 대신 예수의 이상성과 그것을 사람들 속에 재생시킬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으로 전통교리를 대체한다. 예수는 애초부터 절대적으로 막강한 '하나님-의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지만 그 외에는 다른 인간과 완전히 같다고 보았다. 즉 구속자는 인간 본성이라는 정체때문에 모든 인간과 같으나 동시에 그가 가진 '하나님-의식'의 힘때문에 모든 인간들과 구분된다. 결국 예수의 구속사역이란 그가 가진 '하나님-의식'을 사람들에게 나누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평가

비록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점도 같고 있으나 슐라이어마흐의 핵심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거부한다는 점에 있어서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모토가 됨은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그의 '절대 의존 감정'에 기반한 신론은 약점이 된다. 이 틀에 맞지 않으면 설령 진짜 하나님의 특성이 있다고 해도 그의 기준틀에 맞춰서 잘려나가게 된 셈이다. 게다가 그는 하나님의 행동을 자연과 의 동일시한 나머지 구속이 하나님의 행동인 것만큼 악과 고통도 하나님의 행동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또한 그의 입장은 은총론에 심각한 문제들을 가져온다. 이 세계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면 이 세상을 구속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될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라는 것은 행동과 반응의 호혜성을 수반해야 하는데 슐라이어마흐의 하나님은 이상하리만치 냉랭하고 무감각해 보인다. 20세기 전쟁들로 인해 사람들은 하나님의 파토스에 대한 생각하게 되는데 슐라이어마흐의 하나님은 그것이 없다. 인류를 불쌍히 여기는 측은심도 없고, 고통에 대하여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하나님이 다 무슨 소용인가?

게다가 예수에 대해서는 본질적으로 일반인간과 같다고 본 만큼 결국 예수가 존재론적으로 인간이상의 존재가 아니라면 얼마든지 예수를 능가하는 또다른 인간이 나올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교리와 크게 충돌할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2[알브레히트 리츨과 고전적 자유주의]



-윤리적 문화 안에 내재하시는 하나님

리츨파는 개신교의 '고전적 자유주의'라는 말과 동의어라 볼 수 있다.

리츨-하르낙-라우센부시의 계열.


고전적 자유주의 신학

자유주의자들은 기독교의 신조들을 현대적 지식의 빛 안에서 재구성하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계몽주의 이후 문화속에서 일어난 발전들은 신학 속에 적극적으로 융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즉 현대사상의 주장들을 최대한 인정해 가는 것이다.

두번째 특성은 개개 기독교사상가들이 전통적 신조들을 비판하고 재구성할 자유가 있다는 점이다.

셋째, 기독교의 실천적,윤리적 차원에 초점을 맞춘다. 모든 신학적 논의 중점에 하나님나라를 둠으로써 교리를 도덕화한다.

넷째,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다른 무엇을 두려고 했다. 성경 자체의 많은 부분들은 불변의 진리라는 알맹이를 감춘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보았다.그렇다고 성경을 무시한 것이 아니다. 그 안에서 현대의 과학과 철학에도 부식되지 않는 진리의 알맹이를 찾고자 노력했다.

다섯번째, 초월성을 간과하고 신적 내재성 쪽으로 흘러간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역사적, 윤리적사랑의 사회로서 강조한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또한 불연속성이 아닌 연속성을 보고자 한것이다. 그렇기에 예수에 대해서도 하나님과의 벌어진 관계를 극적 사건으로 이어주는 존재가 아닌, 모범적 인간의 수준으로 보게 된다.


리츨의 신학적 방법

리츨은 신학과 과학사이에 있는 갈등은 지식에 있어서 과학과 종교의 두 유형이 있음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 진단했다

과학이 순수 이론과 객관성, 그리고 중립의 입장에서 비주관적 인식을 추구한다면

종교는 실재에 대한 가치판단으로 이루어진다.즉 항상 사물이 어떤 모습이 되어야하는가에 대한 규범적이고 가치적인 판단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과 그 본질적인 신성을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그것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결정함으로써 알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전통적 기독교신학조차 형이상학적 요소에 대한 얼마 간의 논의를 뒤섞는다는 점에 있다. 즉 기독교신앙을 어떻게 합리적 근거들로 확립할 수 있는지 노력하는데 신존재 증명에 대한 이론들이 그러하다. 리츨은 바로 이러한 측면을 비판하면서 신학의 영역을 공고히 하였다. 과학적 지식과 종교지식을 뒤섞으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과학적 지식의 영역으로 하나님을 설명하려하는 순간 하나님은 객체가 되어버린다.

신학은 하나님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선 을 성취하도록 도움으로써 사람들의 삶에 도덕적인 영향을 끼치는 한에서만 하나님에 관심을 갖는다.

인간의 최고선은 예수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발견되는 집단적 가치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의 공동체 바로 그 자체이다. 이에 대한 어떠한 이론증명은 필요없다. 그렇다고 믿음의 도약도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긍정은 수세기에 걸친 그리스도인들의 집단적 경험에 뿌리 박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예수의 부름과 생애에 대한 역사적 연구가 이를 뒷받침한다.

결국 신학은 교회안에서 가질 수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집단적 종교 경험 및 도덕적 경험을 연구하는 것이다.

신학의 근거와 규범은 무엇인가? 성경전체가 아닌 건전한 역사비평연구를 통하여 결정된 사도적 사상체계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칸트와 유사성이 있다. 칸트의 기본적인 인식론을 견지하되 그의 회의론을 개량하고자 하였다.즉 신학에서 형이상학을 삭제하고 윤리학과 밀접하게 연관시킨 점은 칸트와 비슷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가 행한일을 통하여 정말로 알려질수 있다고 주장한 것은 칸트와 다른 점이다. 즉 현상과 본체의 영역을 나눈 칸트를 비판하면서 어떤 사물(하나님)은 그것이 이룬 결과속에 존재하며 그 속에서 드러난다고 보았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

그는 자신의 신학적 방법처럼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 그분 자체를 놓고 거의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만 기독교신학을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보았다.

리츨은 삼위일체에 대해서 거의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아마도 경험을 벗어난 이 교리는 이론적 지식의 영역에 있는 것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기독교신학의 주된 긍정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점이다. 즉 리츨은 하나님 자체보다 하나님나라에 관심이 있었다.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이 나라가 인류가 추구하는 최고선이라고 파악한다. 즉 신앙이 알고있는 하나님은 사랑이신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인 셈이다. 결국 인간과 하나님의 목적은 동일하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다.

그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함에도 하나님의 존재를 이 세상에서 그의 나라가 진보하는 것과 동일시하기에 내재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역사 안에 계신 신의 내재성 말이다.


죄와 구원

리츨은 원죄에 대한 교리대신 '죄의 나라' 를 가정한다. 죄는 일차적으로 이기성이다. 즉 하나님나라에 배치되는 것이고 죄는 대물림이 아닌 보편적인 것이다.

리츨이 본 하나님나라는 두가지 초점을 갖고 있는데 하나는 칭의이다. 즉 종교적인 초점으로 하나님이 죄인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선언하는 것. 두번째 윤리적 초점은 이웃사랑을 실현하라고 부르신 명령이다. 따라서 리츨에게 구원이란 일차적으로 저 세상에서의 지복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일차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위에 완전히 실현되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는 피안적 종교가 아닌 사랑에 감화된 윤리적 행동을 통하여 세계를 변혁시키는 종교인 셈이다.


기독론

고전적 기독론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성품론을 다룬다. 리츨은 이를 거부하는데 그것은 예수에 대한 가치판단이라기 보다는 이론적 주장에 가깝다고 본다. 즉 예수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기 이전 그 자체에 대한 두 성품론에 대해 비주관적 주장일 뿐이라고 일축하는 것이다. 예수에 대한 평가는 예수 자체의 본질이 아니라, 그의 역사적 행위, 종교적 확신, 윤리적 동기에 관심을 가질때 가능하다고 보았다. 예수의 신성에 대한 주장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생애를 통해 판단한 가치로 보아야 한다. 리츨에 대한 비판처럼 예수를 단순한 인간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예수가 받은 소명, 그것을 성취한 역사적 영향력을 통해서 그를 하나님이라 가치판단 할 수 있다고 본셈이다.

따라서 예수의 왕권적 선지자직의 독특성이 어디서 유래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거부했다.

리츨에게 이러한 질문은 공허한 형이상학적 질문일 따름이다.

그러나, 정작 리츨역시도 선재적 판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이 하나님에 의해 영원히 아신 바되고 그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는 의미에서 이미 '선재'한 것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자신이 누누이 주장했던 행동, 드러남을 통한 판단이 아닌 초월적 근거와 기원을 모순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리츨의 신학의 중심은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하여 이루신 구원의 성취에 있다.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하나의 도덕적 모범으로써 그리스도의 역사적 삶을 놓는것이다.

그는 이 세상 죄를 대신 받는 예수의 속죄의 교리도 인정치 않지만 그 죽음의 특별성은 인정한다. 즉 리츨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에도 별로 이야기한 바가 없다.


평가

그의 가장 큰 공적은 과학,철학과 갈등하는 기독교 신앙을 불필요한 갈등으로부터 구해주었고, 교의를 도덕화하는 데에도 공헌한다. 기독교가 피안의 세계에만 집중한다고 비판받는 시대에 기독교의 중심적 진리의 도덕적 능력을 묘사해낸것이고, 이는 '사회복음'을 전개하는데 일조하게 된다.

문제는 리츨의 주장처럼 이론과 종교의 두영역을 정말 절대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이다. 게다가 신학적 연구를 가치판단의 영역에만 국한시키면 신적 초월성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하나님 존재의 내적 실재를 논의할 기회조차 박탈시키게 되면 하나님은 철저히 인간과의 관계속에서만 드러나고, 이는 내재성을 확립시킨다.

게다가 인간 지식의 영역을 비종교적 영역에 국한시킨것이 과연 바른판단인지에 대한 의문도 있다. 종교는 지식의 영역에 포함될 수 없는가?

또한 예수의 신성을 거부하는 것도 강력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예수는 그에게 있어 종교적, 윤리적 이상일 뿐이었다. 즉 그는 그리스도와 나머지 인류의 간극을 메워버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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