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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Jan 04. 2021

[눈물닦고 스피노자]신경증에 관하여

가족에서 벗어나기

신승철/눈물닦고 스피노자/동녘


[#신경증]      


흔히 노이로제로 불리며 정상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정신적 문제의 통칭, 노이로제의 기저에 초자아인 아버지의 권위와 저항으로 작동하는 가족 무의식을 프로이트는 발견함. 가타리의 경우 초자아인 신,국가,아버지에 완전히 예속된 경우 심적인 안정과 평화가 동반하지만, 이것이 신경증을 해결하는 방법이 될 수는 없다고 본다. 

 #신경증의 발생원인은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개인성의 등장에 큰 원인이 있다. 봉건제에는 가족의 예속에 대해 당연하게 생각했기에 신경증이 발생할 여지가 없었다면 개인성의 발견 이후 가족이라는 통제양식 거부에 대한 무의식적 움직임이 태동하게 된 셈이다. 지나치게 권위적이거나 강압적인 가족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을 억압하는 경우 발생하는데 그렇다고 모든 것을 가족무의식에서 파악할 수는 없다. 사회,역사적 무의식의 실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것은 신경증 자체도 결국 자본주의 제도라는 사회적 관계망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혈통적 망상에 빠진 가족 안에서는 어떤 특이성도 생산하지 못한다. 

 가족은 굴레이면서도 안식처이고 나인 것 같으면서도 남이다. 가족도 일종의 집단이라는 점, 안정감과 역할을 부여받지만 결국 사람을 예속인으로 만든다는 문제점이 있다. 특히 가장인 아버지의 존재는 신, 국가를 대신하는 초월자의 위치다. 물론 꼭 아버지가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어도 된다. 어머니나 할머니도 아버지의 역할이 가능하다. 가족관계는 체제가 원하는 정상적인 삶이라고 여겨지는 고정된 틀을 강제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에 사로잡히면 예속당하면서도 예속을 욕망하는 역설로 나아가게 된다. 설령 아버지의 명령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사람 또한 결국 다를바가 없다. 일부러 반발하거나 능가하려고 애쓰는 그 행위가 순응과 다를바 없으며, 아버지는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작동하는 예속의 원천인 셈이다. ‘아버지처럼 되지 않을거다’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아버지처럼 되는 예속. 

 결국 부모의 유산도 예속의 장치이며, 아버지 또한 초월적 권력의 대리자이다. 예속을 거부한 스피노자는 유산도 가족도 거부했다. 물론 가족을 통해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얻을 수도 있으나 정작 이 안정과 평화가 사랑과 욕망의 역능을 마비시킨다. 왜곡된 욕망이 여기서 파생되며 모든 사회병폐가 가족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아버지가 되는 것도 거부한다. 진정한 자유를 찾기 위한 그의 노력.  

 아버지는 험한 세상에 나가서 아이들을 순응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명분에서 체제의 관리자 역할을 떠맡는 존재이기에 예속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현존하는 질서에 순응하고자 하는 것은 보수적인 세력이며 안정을 갈구할수록 예속을 희망하는 사람들이다. 아버지는 안정감을 주는 수직적 관계를 만들어내는 인물이다.

 그렇다고 인간은 가족을 벗어나 홀로 살면 예속에서 벗어나는 것일까? 결국 인간은 가족을 넘어서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자유인의 공동체는 생물학적 가족처럼 역할을 이미 분배받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역할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 언제든 그 배치를 바꿀 수 있는 자율성이 필요한 것이다. 집단 덩어리가 아닌 개별 특이성을 사랑할 수 있는 공통성으로서 말이다. 


 결국 가족이라는 틀 안에 유일무이하고 특이한 나 자신을 가둬서는 안 된다

물론 자유인은 예속인과 달리 늘 불안하고 불안정하다. 자유인들은 집단의 사멸과 유한성을 응시하고 움직인다. 예속인들이 신,국가, 아버지라는 초월자 앞에서 영원성을 보장받는 것과는 대비된다. 자유인들은 불안함을 벗어나려고 초월성의 구도로 들어가려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유한자로서의 한계인 죽음, 욕망, 광기를 응시한다. 유한성의 실존좌표를 승인한 유한자들은 서로 결합하고 무한히 변용하도록 만든다. 유한자의 결합이 무한한 이동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유한한 개개인이 초인처럼 변해서 무한으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 속에서 아이,동물,노인,광인, 여성, 장애인을 만나면서 무한히 결합되고 이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예속된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의 국지성과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고, 유한함과 한계를 두려워함으로써 초월자를 찾게 되는 매커니즘이다. 신,국가, 아버지는 바로 그 공백을 메꿔주는 존재이다. 


 #에티카 2부 정신의 본성과 기원에 대하여 ‘정리45’ -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각각의 물체나 특이성의 관념은 신의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필연적으로 포함한다.

 개개인들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독특하고 유일무이한 존재인데 이런 특이함은 유한자들이 공동체와 관계해서 무한하게 다른 방식으로 결합할 때 가능하다. 한때 선생이었던 사람이 춤꾼이 되고, 이야기꾼이 되는 것처럼. 반면 초월자는 개개인의 특이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가족의 영원성, 신의 영원성, 국가의 영원성 속에서 무한을 생각한다.

 생명이든 무생물이든 모든 물체는 각각 독특한 존재이며, 독특함들이 서로 만나 그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특성이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다. 반면 예속인들은 영원한 삶의 보장을 위해 초월자에 의존한 대가로 특이성을 상실하고 부속품으로 전락한다. 가족은 그 관계가 지속될 것이라는 생각을 만들고나서 미리 정해놓은 규칙대로 구성원을 움직이게 한다. 결국 가족의 내부에는 개인의 욕망을 포기하라는 내부규율과 터부, 금기가 있다. 사랑과 욕망의 역능을 포기하게 하는 힘.

 아버지의 사랑의 모순성. 아버지는 자식을 정말 사랑하지만 그 내부에서 가족이라는 영원성을 보장하려는 틀을 재생산하려는 명령을 함께 갖고 있다. 그리고 구성원들은 그 권위와 명령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그 가족의 틀 외부를 봐야 한다. 그 바깥에 무수한 공동체 관계망과 사회와 역사의 흐름이 있다. 사랑과 욕망은 가족과 대립된다. 

 결국 권위적인 아버지에게 콤플렉스를 느끼고 감정적 경쟁자로 느끼게 되는 신경증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가지는 치유의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 공동체의 관계망만이 협착된 심상을 변화시킨다.  자유인의 공동체를 만들고 자신의 특이성을 십분 발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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