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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겁쟁이 공작새 Dec 08. 2019

0의 사람

어느 호구의 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호구다. 

그리고 호구라는 것에 나름의 만족감을 느낀다. 아니, 느꼈었다. 

지금은? 잘 모르겠다.


언제부터였을까. 

남들에게 피해주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의 욕망을 하나씩 덜어냈다. 

내 욕망을 추구하면 누군가는 피해를 보거나, 원하던 것을 얻지 못했으니까.

내가 +가 되면 다른 누군가는 -가 될테니까.

그래서 갖고 싶었던 것, 하고 싶었던 것, 먹고 싶었던 것, 편하고 싶었던 것, 그런 욕망들을 

하나씩, 하나씩, 

덜어냈다. 


물론 아쉽기는 했다. 하지만 잠깐의 내 아쉬움이 남들에겐 피해고 민폐가 될 거란 생각에 

나의 +를 포기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타인이 나를 보는 관점이 더욱 중요하게 느껴졌다.

나의 +를 포기하면, 타인이 나를 보는 시각에 -는 사라지니까. 그들이 나를 좋게 보길 바라기 보단, 

나를 미워하지 않기를 바랐다. 

모나지 않게 행동했고, 거슬리지 않게 행동했다. 잘 보일 생각은 없었다. 어느샌가 형성된 내 세계관에선 

민폐를 끼치지 않는 것만 해도 충분히 잘 된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끼치지 않고, 무난무난하게 협조를 잘 하는 사람. 하지만 플러스 알파는 하지 않는 사람. 

이런 나에게 나름 만족을 하며 살았다. 


누군가는 나를 호구라 생각했을 것이다. 주란 것 주고, 비켜달란 것 비켜주고, 양보해달란 것 양보해줬으니. 

그런 인식도 나쁘지 않았다. '그놈은 개새끼야' 라는 평가보단 '그놈은 호구야'가 좀 더, 착하고 순해보이지 않는가. 호구일지언정, 가해자는 되지 않겠다는 강박에 잡혀 살았다. 


그렇게 나는 0의 사람이 되었다. 사람을 대할 때의 노력은 잘 보이기 위한 노력이 아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한 노력인 사람. 피해 가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매력적이지도 않는 사람. 시시껄렁한 얘기는 쉽게 나누지만, 딱 거기서 그치는 사람. 기억에 남지 않는 사람. +도 -도 아닌, 0의 사람.


지금의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 적의 내가 되고자 했던 인간상에 거의 부합한 사람이다. 서투르던 인간관계도 개선했고, 음침했던 표정도 일반적인 사람의 표정으로 개선했다. 어릴 적의 내가 고치고자 했던 단점들을 대체로 많이 고쳐놨다. 그래, 단점들만. 

나는 나의 단점들, 남이 볼까 두려운 단점들에만 신경을 쓰고 장점들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나름 잘한다 믿었던 작문능력은 썩혀버렸고, 그림들은 나 스스로 낙서라 폄하하며 서랍장 안으로 숨겼다. 고등학교 시절,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해주던 감수성은 나 스스로 중2병이라 진단하곤 그대로 죽였다. 반딧불의 불처럼 미세하게 빛나던 열정들은 단점들을 덜어낼 때 함께 딸려 간 것인지 요새는 도통 볼 수가 없다


그리고 취업 준비를 시작하고서야 깨달았다. 이런 호구를, 이런 0의 사람을 써주는 곳은 없다는 것을.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가 나폴레옹이 되기 위해선 사람을 죽일 수 있어야 한다 생각했던 것이 최근에는 점점 이해가 간다. 당연히 정말 사람을 죽여야겠다는 것은 아니다. 욕망을 추구함으로써 사람은 활력을 얻고 개성을 얻는다. 지나가는 얼굴없는 행인이 아닌 기억에 남는 한 사람이 된다. 비록 그것이 다른 이에게 불편, 민폐가 될지라도 이후에 보이는 그 사람의 장점으로 상쇄가 될 터이다. 

하지만 0의 사람에겐 남는 것이 없다. 누구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았기에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불편을 끼치지 않기 위해 욕망을 억눌렀기에 그를 되돌아 볼 사람도 없다. 후에 그를 기억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이런 평가밖에 남기지 못할 것이다.

'착한 사람'


0의 사람은 욕망의 억제가 습관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정작 정말 원하던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정말 쫓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시야가 흐릿해 보이지가 않는다. 무의미한 삶이라는 미로에 빠져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이 상태의 0의 사람은 어떻게든 본인의 흔적을 세상에 남기려고 하는데, 스스로는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타인이 요구를 들어주는 것밖에 없다. 

그리고는 결국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그래, 남들에게 착하게 살았으면 된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호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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