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 때린 날 장모 온다.

by 이종덕

지난주에 아내가 언니들과 함께 일주일 동안 해외여행을 다녀왔습니다.

40년 가까이 내 뒷바라지하고 애들 키우느라 언니들과의 긴 여행을 하지 못했고 이제 나도 6개월 정도 집에 있어보니 살림에 웬만큼 자신이 있어서 흔쾌히 아무 염려 말고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세 자매의 막내인 아내는 언니들이 더 늙기 전에 제대로 된 언니들과의 여행을 늘 가고 싶어 했습니다.


여행을 떠나던 날 아내는 한 시간 넘게 잔소리와 당부를 했습니다.

강아지들 밥 주는 것 잊지 말아라, 아침마다 화분에 물 줘라, 분리수거,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것 그리고 음식물 쓰레기는 냄새나니 그때그때 내다 버려라 등등...

그런데 아내가 출국하자마자 사고가 터졌습니다.

잘 돌아가던 냉장고가 고장이 나버린 것입니다.

A/S 신청을 하니 요즘 에어컨 설치기간이라 이틀이 지난 후에야 기사가 왔는데 수리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아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쩔 수 없이 비상금 챙겨 놓은 것으로 냉장고를 새로 사게 되었습니다.

냉장고가 망가지고 새 냉장고가 배송되기까지 닷새가 흘러 버렸습니다.

자기 없는 동안 먹으라고 이것저것 만들어 용기에 스티커까지 붙여 냉장고에 넣어 놨는데 이게 하나도 먹을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맥주도 미지근해지고 얼음도 없고 도대체 집안에 먹을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비상사태가 발생을 한 것이지요

문제는 새 냉장고가 배송되는 날 고장 난 냉장고에 있던 음식들을 미리 꺼내 놓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냉동실에 있던 고기며 생선은 물론 각종 냉동식품들은 이미 악취를 풍기며 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고 야채도 몽땅 다 시들어 버렸습니다.

이것들을 다 내다 버려야 하는데 엄청난 양에 악취까지 보통 고약한 일이 아니더군요.

냉장실에서는 꺼내도 꺼내도 끝도 없이 음료수병, 소스병, 뭔지 알 수도 없는 온갖 것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이런 생고생은 평생 처음이었습니다.

새 냉장고가 들어오고 나서는 이걸 다시 집어넣어야 했지요.


하필이면 마누라 없을 때 이런 일이 생기다니요.

마누라 때린 날 장모가 온다는 농담이 생각이 나서 혼자 피식 웃었습니다.

그동안 집안일에 무심했던 것에 대한 인과응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마누라 여행 다녀와서 새 냉장고 보고 엄청 좋아했습니다.

남편 죽을 고생 한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비상금 털리고, 제대로 못 먹고, 고생하고...

이제는 마누라 여행 안 보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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