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에 대하여

by 이종덕

연애할 때의 감정으로 결혼생활을 유지하며 사는 부부는 없습니다.

크고 작은 갈등을 겪고 싸우기도 합니다.

새로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서로 간의 환상이 깨지고 신비로움이 사라지며 익숙해집니다.

막말로 볼 것 못 볼 것 다 알게 되는 관계가 되어버립니다.

사람들은 어떤 일이든 익숙해지면 소홀히 하게 됩니다.

교만이고 매너리즘입니다.

소홀함 속에는 당연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것이 갈등의 원인입니다.

부부관계뿐이 아닙니다.

회사에서의 일도 마찬가지이며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습니다.


내 친구는 아내가 콘택트렌즈를 끼는 것을 결혼하고 10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의 아내는 어느새 화장을 하고 있었답니다.

늘 아내가 자기보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 아내의 잠든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쉽지 않은 케이스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최대한 흐트러진 모습을 남편에게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고 나름 유지하고 소홀해지지 않도록 애를 썼던 것 같습니다.


익숙해진다는 것

편안해진다는 것

그래서 소홀해진다는 것...


한 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은퇴한 지 2 년이 다 되어갑니다.

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환경과 일상 속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집안일이라는 것이, 살림이라는 것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힘들고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끼니를 때우는 일 조차도 너무 귀찮고 어렵습니다.

청소하고, 쓰레기 내다 버리고, 빨래하고 화분에 물 주는 것 까지 해도 해도 끝이 없습니다.

그동안 아내가 참 많이 수고하고 애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거기다 애들까지 키우며 뒷바라지를 했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도와주다 보니 시간이 지나며 그냥 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면 엄청 고마워하고 좋아했습니다.

이제는 꼼꼼히 안 했다고 잔소리를 하고 어쩌다 안 하면 섭섭해하고 바가지를 긁습니다.

아내의 생각은 이미 익숙하고 당연한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얼마 전에는 이 일로 인해 아내와 다투게 되었습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아내의 수고를 알게 되었고 고맙고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힘이 닿는 대로 살림을 도왔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그동안 내가 밖에서 어떻게 직장생활을 해 왔는지 모릅니다.

간, 쓸게 다 내놓고 버텨온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내 마음속에 섭섭함과 불만이 쌓여왔던 것입니다.


어느새 익숙해지고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나 또한 익숙해져서 적응을 했으니까요.


반바지와 후줄근한 티셔츠 두세 벌로 여름을 났습니다.

어떤 때는 팬티바람으로 거실에서 방을 왔다 갔다 하기도 합니다.

하얀 셔츠에 넥타이매고 출퇴근하던 단정하고 어떤 면에서는 근엄하기까지 했던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습니다.


나 자신에게도 너무 소홀히 하며 익숙해져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반성합니다.


오늘 저녁에 딸이 온답니다.

새하얗게 올라온 수염도 깎고 머리도 감았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상태가 좋은 셔츠로 갈아입었습니다.

딸에게 꼬질꼬질 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아내가 한마디 툭 던집니다.

“딸이 무섭긴 무섭군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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