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어머니들

by 이종덕

1964년

여섯 살 터울의 내 여동생이 태어나던 해 나는 강화도에 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맡겨졌습니다.

동생이 웬만큼 크고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2년 남짓 할머니 손에 자랐습니다.


모두들 어려울 때라 삼 남매를 함께 키우기는 어려워서 그렇게 하신 걸로 짐작됩니다.


강화도로 가는 길은 멀고 멀었습니다.

내가 살던 돈암동에서 신촌 굴레방다리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그곳에서 강화도로 가는 조그만 합승 버스로 갈아타면 버스는 털털거리며 김포 나루까지 한참을 힘겹게 달려갔지요.

김포와 강화도를 잇는 강화대교가 생기기 전이어서 M보트라고 불리던 군용 바지선에 버스가 올라 타면 바다를 건너 주었습니다.

지금도 강화도에서 석모도를 오가는 바로 그 배입니다.


어머니가 나를 강화도로 데려다주고 서울로 돌아가시던 날 나는 서럽고 두려워서 밤늦도록 울었고 할머니가 그런 나를 달래느라 쩔쩔매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어머니는 한 달에 한번, 어떤 때는 두 달에 한번 나를 보러 오셨습니다.

크레파스와 스케치북 그리고 과자와 빵을 사들고 다녀가시곤 했지요.

옛날에는 창호지를 붙인 미닫이 문의 창틀에 한 조각 유리를 끼워 방에서 밖에 누가 왔는지 내다볼 수 있게 해 놓았었습니다.

나는 매일매일 손바닥만 한 유리창에 코를 박고 어머니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내가 시골생활에 적응하고 익숙해지는 만큼 어머니가 어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신작로 길로 올라오는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띄면 반가우면서도 냅다 뒷산이나 다락으로 숨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가 많이 속이 상하셨을 테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화도에서의 내 유년기는 지금 생각해보면 정서적으로 풍요롭고 소중한 추억입니다.

그리고 어린 아들을 떼어놓은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염려되고 아프셨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지금도 이따금씩 그때의 일을 기억하며 어머니의 절절한 사랑을 느낍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어느새 나는 60대 중반이 되었고 딸아이는 그때의 내 어머니 나이이며 손주는 그때 내 또래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도 많이 늙으셨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사랑은 깊어만 갑니다. 표현은 안 하시지만 뵐 때마다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어

다 못 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1절은 누구나 외우고 있는 동요 “섬집 아기”의 2절 노랫말입니다.

엄마의 마음이 너무나 절절하게 가슴을 파고듭니다.


세상의 어머니들이 다 그렇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싸나이 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