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종덕 Aug 21. 2022

뭘 그렇게까지 했나 싶다


1984년

생애 처음 첫 출근을 하던 날, 당시 은행원이던 아버지는 직장생활의 기본은 “근태”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셨습니다

그 후에도 틈만 나면 성실하고 빈틈없는 직장생활에 대해서 여러 가지 조언을 하셨고 나는 그 말씀을 따르며 10년, 20년, 30년 근속상을 받으며 대과 없이 정년퇴임을 할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적당히라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40년 가까운 직장생활을 하며 난 단 두 번의 지각을 했는데 한 번은 성수대교가 무너진 날이었고 또 한 번은 폭우가 내려 우면산이 무너져 내린 날이었습니다.

두 번 다 죽을 수도 있었던 위험으로부터 간신히 비켜나간 경험이었기에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서늘합니다.


만취가 되어 몸을 가눌 수 없는 날도 어떻게든 제시간에 맞춰 출근을 했고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베란다로 나가 날씨를 살펴, 눈이 오거나 비가 내리면 일찍 출발을 했고 대체로 월요일에는 길이 막히기 때문에 여유 있게 출근을 했습니다.

회사와 일 밖에는 몰랐고 당연히 진짜 소중한 것들을 등한시하며 살았습니다.

그게 잘하는 건 줄 알았습니다.


그런 나를, 그렇게 살아온 시간들을 자랑하려 시작한 글이 아닙니다.


정년퇴직을 하고 처음 맞은 봄날

나는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고 자전거로 제주도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나도 모르게 형편없이 떨어진 체력 때문에 예상보다 이틀이 지체되었습니다.

그런데 힘에 부쳐 천천히 페달을 밟은 덕분에 나는 훨씬 많은 것을 볼 수 있었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햇빛에 부딪쳐 반짝이는 바다를 보며 감탄을 하기도 했고 언덕에서 온몸으로 바람을 맞기도 했습니다.

현무암으로 얼기설기 쌓은 제주도의 돌담은 촘촘지도, 견고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엉성하고 빈틈이 많은 돌담이 오히려 바람에 무너지지 않고  견디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전혀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한 지도 3년이 지났습니다.

잊고 있었던 소중한 것들도 되찾고 무엇보다도 나를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적당히 나태하고 게으릅니다.

쫓기지 않고 늘 여유롭습니다.

그런데도 편안하고 행복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빈틈이 없는 사람이 아니고 쉴틈을 만드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현명하지 못했습니다.

뭘 그렇게까지 했나 싶은 마음이 듭니다.


사위와 딸 그리고 조카들을 보면 내 젊은 날과는 많이 다릅니다.

시대가 다르기는 하지만 그들은 가족 위주의 삶을 그리고 충분히 즐기며 사는 모습입니다.

"결핍,   우아하게 말하면 여백입니다.
꿈이든 사랑이든  여백을  채워버리면 
 순간부터 우리는 불행해집니다."

안도현 시인의 말입니다. 

너무 꼭꼭 채우는, 보이는 대로 빈틈을 메꾸는 삶은 현명하지 못한 삶입니다.

그걸 알았기에 내 노년은 풍요로울 것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