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 사용 설명서

by 이종덕

손주 녀석이 감기 기운이 있어 소아과 병원에 데리고 왔습니다. 마누라가 손주 진료받는 동안 시간이 넉넉하니 마트에 가서 이것저것 장을 봐다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부탁인지? 명령인지? 좌우간...
사오라는 품목 중에 우엉이 있어서 야채 코너 앞에 서서 한참을 고민을 했습니다.
우엉을 두 뿌리씩 비닐랩으로 포장을 해놓았는데 저걸 하나만 사가면 하나밖에 안 사왔다고 뭐라 할 것 같고 두개를 사가면 뭐하려고 두개씩이나 사왔냐고 그럴 것 같은 겁니다.

옛날에 엄마한테 야단 맞을 때 생각이 납니다. 변명을 하면 말대답한다고 소리 지르고 가만히 있으면 무슨 말이라도 하라고 다그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그냥 우엉 두 꾸러미 샀습니다. 휴~


어떤 때는 아침식사 후 마누라와 딸이 누가 내린 커피가 더 맛있냐고 묻습니다. 좀 곤란해서 머뭇거리면 대답이 늦다고 다그칩니다.


마누라의 바가지는 받아주면 점점 심해지고 대응하면 싸움이 되어 골치 아픕니다. 가만 보면 일종의 취미생활인 것 같은데 당하는 나는 괴롭고...

오늘은 가만히 있어봤더니 무시한다고 더 세게 긁네요.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도록 무서운 말 " 당신, 나랑 얘기 좀 해요"... 순간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뭘 잘못했나? 혹시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이 모르고 지나간 건 아닌가? 언젠가처럼 잠꼬대를 잘못했나?

일단은 "내일 얘기하면 안 돼?" 하고 시간을 벌어봅니다. 그냥 얘기하자는 것 일수도 있는데 겁부터 나는 것 이건 뭔가요? "남존여비"... 남자는 여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 정말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누라를 무섭게 만든 건 내 책임도 큽니다. 연애할 때처럼 살갑게 대해주지도 않았고 물처럼, 공기처럼 늘 당연히 곁에 있는 존재로 대했고 예쁘고, 사랑스럽고, 귀여웠던 20대 초반의 모습을 잊은지 오래거든요.


어느 날 뽀얗게 먼지 앉아있던 통기타, 먼지 털어내고 줄 맞추어 오래된 포크송을 불러보는데 주방에 있던 마누라가 뽀로로 다가오더니 곁에서 따라 부르네요.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마누라 노래하는 소리를 정말 너무 오랜만에 들어보는데 조금도 변함없이 고운 목소리로 잘 부르네요. 맞아! 저 아줌마 노래 참 예쁘게 잘 했었지... 잊고 사는 게 너무 많았던 것입니다.


피땅콩이나 호두 같은 딱딱한 견과류를 먹을 때 이놈에 호두 까는 게 만만치가 않습니다. 세게 후려치면 절대로 안되고 살살 금만갈 정도로 톡톡 충격을 주며 정성을 들여야 모양대로 잘까지고 먹을 것도 많지요.

대게나 블루크랩의 껍질을 까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살살 정성을 쏟아야 먹음직스러운 속살이 쏙 빠지지요. 고생해서 살을 발라놓으면 마누라나 딸내미가 홀랑 집어먹어서 짜증이 나긴 하지만... 하여튼 소리를 지르면 더 큰소리가 되돌아 오고 어설프게 대들었다가는 큰 낭패를 볼 수가 있으니 나이들 수록 마누라는 살살 달래는 게 최고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