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도 모르게 변해가는 나의 모습들

by 이종덕

아버지처럼 안 하려고 했는데 저절로 그대로 따라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아버지를 뵈러 가면 거실 탁자 위에 쓰메끼리, 이쑤시개, 안티프라민 등 온갖 잡동사니가 들어있는 바구니가 떡 버티고 있었지요.

뭔가가 자꾸 없어지고 찾는데 진을 빼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한 곳에 모아놓고 손 닿는 가까운 곳에 두어서 편리하게 사용을 하시는 것이지요.

이건 장인어른도 똑같았습니다.

어느 결엔가 식탁 한 귀퉁이에 아버지의 바구니와 비슷한 나무박스가 자릴 잡았고 내용물도 비슷하게 채워져 있습니다.

이만오천 원 주고 이쁜 깡통을 하나 샀습니다.

여기에 다 때려 넣고 뚜껑을 닫아버리니 덜 영감스럽습니다.


이제 은퇴를 한지도 꽤 되었고 백수의 삶에도 완전히 적응되어 편안해졌습니다.

하지만 퇴직을 하고 한동안은 시간이 많아졌음에도, 할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허둥대고 불안정했습니다.

이 시간에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건가? 하는 마음이 자꾸 들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나를 힘들게 했지요.


새로운 루틴을 만드려고 노력도 해 보았고 책도 일부러 두꺼운 책을 사서 시간을 때우며 읽기도 했습니다.

생두를 사다가 프라이팬에 볶아 주방용 돌절구에 빻아 커피를 내려먹는 비효율적인 일을 하면서도 최고의 커피를 먹기 위한 노력이라고 합리화했습니다.

아파트 뒷산에 있는 골프 연습장에 가서 매일같이 스윙을 하며 땀을 빼기도 했습니다.

다 쓸데없는 짓이었고 생각이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슬비에 천천히 옷이 젖듯이 내 모습과 행동은 천천히 느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지금이 아주 편안합니다. 마음껏 게으름 피우고 하고 싶은 일만 하는 지금이 좋습니다.

누가 봐도 영감인데 영감처럼 사는 거지요.

결국은 내가 좋아하는 커피도 간편한 캡슐과 침출커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도 맛만 좋습니다.


자 이제 기원에 바둑 두러 갑니다.

누가 뭐래도 부라보 마이 라이프입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술의 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