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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구 Jun 25. 2019

다양성의 삶은 선입견과 편견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이종구 박사의 다양성 칼럼

네덜란드의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였던 얀 그레스호프(Jan Greshoff)는 ‘좋은 책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확신하는 어떤 것을 빼앗아간다’고 말했다. 우리는 무언가를 채우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무언가를 포기해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현재의 욕망과 과거의 소중한 경험들 그리고 미래의 희망사항에 대한 관념으로 가득 차있고, 그것이 오랜 시간을 거쳐 견고해 지면서 선입견과 편견으로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사회적 견지에서도 선입견과 편견은 사람의 정체성이 특정한 사회적 그룹에 소속되었다는 인식에 기반 한다는 사회정체성(Social Identity) 이론으로도 잘 설명된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신이 속한 그룹의 특징이나 성격을 더 좋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고 그것을 ‘그룹 내 편견(In-group Bias)’이라고 한다. 그룹 내 편견은 사회적으로 어떤 그룹이 우위에 있거나 그룹 간에 멤버의 이동이 어려울 때 주로 강하게 일어난다. 예를 들어 인구통계학적 특징들, 인종이나 민족, 성, 세대, 출신 등에 해당하는 그룹은 그 속성이 고정이고 불변하기 때문에 그룹 내 편견이 강하게 일어난다. 그러니 우리 민족과 같이 단일한 민족성의 배경과 집단문화나 공동체 의식이 강한 사람들의 그룹 내 편견은 매우 심할 수밖에 없다.


비즈니스를 하면서 필자가 경험한 그룹 내 편견의 예를 들어 보자. 예전 지사장으로 근무했던 기업은 특정 IT분야에 최고의 기술력과 소프트웨어 제품으로 유명하던 글로벌 기업이었다. 주로 국내 대기업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엘리트 엔지니어들을 상대로 영업을 했는데, 그들에게 제품의 탁월한 기술과 우수한 점을 소개하면 흔히 듣

그림  이연우

는 말이 있다. 우리가 소개한 기술은 본인들이 이미 검토했던 내용이란다. 그래서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더 이상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사실상 아이디어를 제품화하는 것이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디테일한 과정이 필요하다. 제품화가 되어야만 결국 완성체라고 볼 수 있다는 의미다. 어떤 기능의 제품을 설계할 때, 아이디어는 수백 가지가 나올 수 있지만 제품화 과정을 거치게 되면 현실적으로 잘해야 하나의 제품이 완성된다. 그것도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말이다.


결국 그 고객사는 자신만의 기술로 제품화를 하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그 사이에 다른 경쟁 기업이 우리의 제품을 채택하여 시장을 선점하면서 그들은 많은 손실을 입게 되었다. 결국 뒤늦게 필자 회사의 소프트웨어를 구매했다.


비즈니스를 하면서 이처럼 고객들이 엘리트 의식과 획일성, 편견때문에 실패하는 경우를 가끔씩 본다. 자신의 아이디어에 감탄하면서 자만심에 가까운 자부심으로 고집스럽게 노력하지만 결국 경쟁력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 근본에는 대개 두터운 선입견과 편견이 자리 잡고 있어 새로운 영역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 그에게 새로운 영역을 수용하기 위한 포기란 있을 수 없고 때로는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한다. 그러니 횡포에 가까운 요구 사항을 하청업체나 공급회사에 강요하는 일이 성행하면서, 우리 기업 사회에서 이른바 ‘갑을 관계’라는 문화까지 파생한 것이다.


신학자 샘 킨(Sam Keen)은 그의 저서 ‘춤추는 신(to a Dancing God)’에서 성숙한 깨달음이란 개인적 경험의 잔재인 선입견과 편견을 이해하고 보완할 때만 가능해진다고 했다. 스캇 펙 박사는 자기 훈육은 자기 확장의 과정이고 이 과정에서 포기의 고통이란 죽음의 고통이지만 옛 것의 죽음은 새 것의 탄생에 이른다고 말했다. 우리가 새롭고 더 좋은 생각과 이론들을 발전시킨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옛 생각들이 죽어야 함을 의미한다.


결국 다른 사람이나 다른 문화 그리고 다른 이론 등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은 자신의 선입견이나 편견과 싸워야 하고 때로는 자기의 생각마저 포기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나의 소중했던 것들을 포기하는 고통을 견디면서 또 다른 소중한 어떤 것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바로 ‘다양성의 삶’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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