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구 박사의 다양성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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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야. 만지지 마’
어느 임대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한 아이가 층 버튼을 누르려 하자 엄마가 이렇게 말하며 아이의 손을 거두었단다. 어느 신문 기사(서울신문, 2018)에 나온 얘기다. 아파트가 도시인들의 주요 주거 형태가 되면서 아파트의 입주나 거주 현황에 따라, 아파트의 브랜드와 크기에 따라 서열이 매겨진다는 것은 공공연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실제 기사를 통해 사실을 접하니 기막힐 노릇이다. 몇 가지 사례를 더 들어보자.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일반 아파트에 사는 아이가 임대 아파트에 사는 아이에게 임대에 산다고 소문을 내고 놀리면서, 아이들은 물론이고 그 부모들까지도 한바탕 큰 싸움이 벌어진 일도 있었다.
한편 지방의 한 초등학교는 신입생 예비소집 때 임대 아파트에 사는 학생과 분양 아파트에 사는 학생을 따로 분류했다가 학부모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거주 형태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의 국가 인권위법 개정안을 발의하는 현실에까지 이르렀다.
서울 강북의 한 아파트 단지의 출입구는 두 개다. 분양 주민이 주로 다니는 정문과 임대 주민만 다니는 통로로 나뉘어 있다. 분양 주민들이 스스로 돈을 모아서 분양동과 임대동 사이에 철제 펜스를 설치하면서 임대 주민들의 차량은 정문을 이용할 수 없도록 했다. 이 아파트 관리소 관계자는 ‘정문을 개방하면 임대 아파트 방문 차량이 분양 주민들이 이용하는 주차장에 주차할 수 있고 통행량이 많아 안전사고의 위험도 커진다’고 설명했단다.
이런 어이없는 현상에 대해 어느 부동산 전문가는 임대 아파트 공급에 제약이 있다 보니 지원 대상을 저소득층으로 제한할 수밖에 없고 이는 ‘임대 주민=저소득층’이란 공식을 낳게 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서구 국가들처럼 임대 아파트 공급을 더 확대해 중산층까지 포섭하면 인식이 점차 개선될 것이라고 하는 등 여러 전문가가 나름의 해법을 내놓고 있다.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소위 ‘신(新)주택 계급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필자는 이 현상을 또 하나의 다양성 문제로 본다. 잘못되고 편협한 공동체 의식이 만들어낸 다양성 문제 말이다. 사실상 우리의 공동체는 협력하는 공동체였다. 그래서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오늘과 같은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우리의 공동체는 정의의 공동체였다. 독재와 불의에 맞서 싸워 새로운 정치 사회를 이룩했다. 그래서 우리의 공동체 의식은 미덕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공동체 의식은 조금씩 변질되어 가는 느낌이다. 개인의 이기로 인하여 다양성은 천천히 무시되고, 개인의 욕심들이 모여 집단 이기주의로 무장하고 그럴싸한 논리로 자신들의 이익을 주장한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거나 배려할 만한 여유가 없다.
각 사례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 전반에 흐르는 집단 이기주의와 획일주의 그리고 비인간화가 드러난다. 우리의 공동체에서 마치 사이비 공동체와 같은 모습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명석한 전문가가 좋은 해법을 내놓아도 신(新)주택 계급사회와 같은 파생되는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결국 복잡한 사회 속에서 그런 부정적인 신조어는 계속 나타날 것이고 문제의 악순환은 지속될 것이다.
이제 다양성 존중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각기 다른 모습의 사람들이 서로 돕고 발전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비록 시간이 걸리고 더디 가더라도 다양성을 생각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성장과 번영만을 위한 기차에서 잠시 내려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세계 경제 순위가 10위권에 들어서려는 대한민국이지만 아직도 주변에는 하루 세끼를 걱정해야 하는 노인과 아이들이 있다. 이들을 살피려는 포용의 마음이 하나둘씩 생기면,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저마다의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배우고 성장한다. 그러면 신(新)주택 계급사회와 같은 파생되는 문제들은 자연히 사라지지 않을까? 이것이 바로 다양성과 포용의 생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