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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구 Aug 12. 2023

무엇이 우리를 방해하는가?

체스터턴의 ‘정통’을 읽고       이종구 박사의 다양성 칼럼

표지출처: https://www.amazon.com/Orthodoxy-G-K-Chesterton


연일 대중 매체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뉴스를 보면서 오늘의 현대인들은 참으로 불행한 일도 많이 겪는다는 생각을 늘 한다. 사람들은 불행한 일- 사고를 당해 죽었다거나 억울한 일로 자살했다거나 심각한 병에 걸리는 등- 을 보고 안타까워하면서도 내가 아닌 소수의 사람이 겪는 일로 간주한다. 자기 자신은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안도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잘 모르는 진정으로 불행한 일이 있다. 제도나 시스템 또는 울타리라고 말하는 사회 안에 우리가 갇혀있다는 사실이다. 그 불행은 대부분 인간이 모르는 사이에 젖어 들기 때문에 수동적이지만 자발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적 집단이 동조하여 성취한 결과가 이론이 되고, 그것이 곧 시스템이나 제도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흔히 ‘사회적 동물’이라는 이유로, 합법적이라는 이유로 아무런 불평 없이 받아들이고 찬양하기도 한다. 더욱 큰 문제는 그러한 제도들이 이데올로기라는 가면을 쓰고 인간 사이를 넘나들면서 편을 갈라놓고, 서로가 옳다고 논쟁하다가 싸움이 일어나고, 급기야 민족의 싸움이나 국가의 싸움으로 번지게 된다.      


이렇듯 인간들은 여러 사조를 만들어 그것이 진리인 양 서로 싸우면서 점점 미치광이로 변해간다고 체스터턴은 경고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들의 정신세계는 점점 피폐해지고 피로해지면서 결국 보이는 세계만을 지향하는 것이 최고인 양 살아가게 된다. 즉 과학주의와 유물론이 두드러지면서 자본주의는 그렇게 인간을 합법적이지만 사회적으로는 불행하게 만들어 간다.      


이러한 세계가 바로 스캇 펙 박사가 지옥으로 표현한 ‘아말감 시스템’과 매우 유사한 환경이다. 그는 아말감 시스템이라는 거대 기업 안에서 기계처럼 생활하는 불쌍한 영혼들을 결국 쓰레기통 바닥에 사는 쓰레기로 비유한다.1 그리고 오늘의 자본주의 세계가 그렇게 변해간다.      


더 불행한 것은 우리가 그 세계를 합법적으로 인지하고 따라야 한다는 당위성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다고 생각하는 오류다. 즉 우리의 생활은 제도를 따라가는 일에 익숙해져 있고 또한 자신의 책임과 운명도 제도에 맡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비합법적이라고 생각하고 불편해하며 심지어 범죄인이 될 것이라는 불안감마저 든다. 에리히 프롬은 이렇게 인간들이 책임을 갖는 고통을 피하고자 매일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시도한다고 말했다.2 이것은 자신의 운명을 다른 존재에 양도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크나큰 실수이다.      


체스터턴이 말한 미치광이가 바로 그럴듯한 논리를 만들어 사람들을 무의식적으로 합법적으로 따르게 만드는 사람 즉 이론가나 정치가나 선동가들을 말한다. 문제는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 또한 결국 미치광이가 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그것의 논리적인 완벽함에 감탄하고 한편으로는 정신적으로 위축이 되면서 점점 미치광이가 된다.      


그래서 체스터턴은 사람이 지니고 있는 신성(神性)으로 회복할 것을 주문한다. 그것은 사람이 단순한 논리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 외에 커다란 세계를 볼 수 있는 위대한 인지 능력으로의 회복, 다차원의 세계를 걷게 될 것이라는 자신감의 회복으로 말이다. 그의 책, ‘정통’에서 이렇게 설득한다. 

스스로 꾸며낸 작은 음모를 늘 상영하는 작고 번지르르한 극장을 벗어나서 낯선 자들로 가득한 길거리에서 자유로운 하늘 아래 있는 당신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오.’     


사람은 엄마의 배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인격체가 되고 신의 경지는 아니지만 신과 유사한 정신세계를 갖고 태어난다. 비록 태어난 후 바로 울타리 안에서 길들여지는 불행한 현실이지만 사람의 신성은 생각하는 것보다 넓고 깊다. 우리에게는 신이 부여한 자유의지가 있고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영원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 즉 어린아이들이 동화의 세계에서 느끼는 신비의 세계와 끝없이 펼치는 상상의 유토피아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과 권리가 있다. 그런데 왜 우리의 삶을 현실 세계를 빙자한 울타리로 제한해야만 하는가? 체스터턴은 이렇게 말한다. 

신은 우리에게 이미 만들어진 그림을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각자의 색채를 찾아서 그릴 수 있는 팔레트의 물감들을 주시고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자유를 부여했다.’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Gilbert Keith Chesterton)                                                출처: 네이버 카페 인생교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교육제도는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드러낸다. 그것은 질서를 유지하고 효율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목적으로 개인의 호기심을 시간과 공간 안에 최대한 차단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효율은 무엇인가? 최소한의 시간으로 인간 생활에 최대 이익을 주는 현실적인 이론이나 과학적인 결과물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 생활을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하려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문명의 진화를 과학의 발달로 추켜세우고 장려한다. 우리의 교육제도는 신이 주신 물감으로 이미 스케치 된 그림을 받아 선생님의 지시로 색칠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스케치 선에서 벗어나거나 정해진 색이 아닌 색으로 또는 정해진 굵기로 칠하지 않으면 곧바로 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그러면서 어릴 적 만났던 요정들의 세계와 백마를 탄 공주는 서서히 잊혀가고 그리움조차도 남지 않게 된다.     


굳이 동화의 세계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 주변에 둘러싸고 있는 많은 시스템의 근간(根幹)에 ‘각자에게 주어진 물감으로 자기만의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현실로 펼치고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세상’ 이런 세상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참고문헌

1.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 스캇 펙, 포이에마

2. “아직도 가야 할 길”, 스캇 펙, 율리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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