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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규 May 24. 2024

[6일째][5월23일] 세이노의 가르침

제가 다니는 출판사에서는 요즘 과거에 나왔던 어떤 도서를 재발행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때 꽤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에 있었던 책입니다. 이름값 때문에 지금도 간간히 팔리고는 있지만 영광의 시절과 비교하면 겨우 풀칠할 수준입니다. 게다가 표지 디자인은 동일 서적과 경쟁하기 민망할 정도로 오래되었고 본문 내용은 옛날 번역체라서 제대로 읽히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이 생각을 회사에서 말할 수는 없어요) 다른 경쟁 출판사에서는 자신들의 도서를 완전판, 재번역판, 리커버판 등 여러가지 형태로 재출간하고 있기 때문에 저희라고 못할 것은 없었습니다. 


어제는 점심시간에 직원들끼리 짧게 회의를 하면서 새 표지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저는 “세이노의 가르침이라고 아세요? 그 책의 표지가 간결하면서 인상적인데 저희가 참고해도 좋을 것 같아요.“ 라고 말했습니다. 직원 중에 한 사람은 그 책을 알지만 읽지 않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책을 아예 모른다고 했습니다. 아니, 작년 베스트셀러에 그렇게 오래 있던 책인데 출판사 사람이 그것도 모르냐고 핀잔 섞인 농담을 하고 싶지만, 저의 상사이기 때문에 그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책이 뭔지 간단하게 설명을 해줬습니다.


세이노라는 이름은 어떤 사람의 필명인데 Say No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세이노는 55년생이고 자수성가해서 수천억대의 자산가인 사람인 것 말고는 정확하게 본인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전부터 신문 칼럼을 꾸준히 연재해서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알음알음 유명해진 사람인데,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 형태로 낸 개인출판한 도서가 크게 성공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이노의 책을 악용하는 사람이 생기자, 그것을 목격하고 크게 분노해 자신의 책을 절판 시켰습니다. 시간이 흘러 한 인쇄소 사장이 세이노의 책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싶다며 머리를 숙이고 찾아옵니다. 한번도 아니고 여러번 오는 통에 세이노는 하는 수 없이 조건을 겁니다. ‘책을 내주는 대신에 수익금이 절대로 없게 할 것’ 그래서 그 책은 세이노의 가르침이란 이름으로 정식으로 출간이 됩니다. 세이노의 가르침은 그가 원한대로 제작원가 거의 그대로의 금액인 7200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습니다. 웬만한 사전을 후려치는 두께임에도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 때문에 세이노의 가르침은 일찌감치 독서광들의 눈에 띄어 출간하자마자 베스트셀러에 오르게 됩니다. 세이노의 가르침은 보통의 자기계발서와는 다르게 공무원과 일을 할 때 어떻게 해야하는지, 일을 할 때 허드렛 일부터 하라는 얘기 등, 굉장히 현실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세이노 특유의 호통 치는 어투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만히 있는데 괜히 혼나는 기분을 들게 하면서, 선배 어른이 해주는 쓴소리처럼 신랄하게 읽히는 맛이 있습니다(이것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알고 있는 이야기라서 그대로 제 상사에게 들려 주었습니다. 상사는 이야기를 듣더니 자기도 읽고 싶다면서, 이따가 사러 가야겠다고 하셨습니다. 어쩌다 보니 책을 영업한 꼴이 되버렸습니다. 저희 책을 더 팔아햐 하는데 남의 책을 팔아주게 됐네요. 하하. 그런데 말입니다. 갑자기 저도 읽고 싶어졌습니다. 사실은 저도 그 책을 다 읽지는 않고 반 정도 읽다가 방치를 해둔 상태입니다. 이 참에 다시 꺼내 읽어 봐야겠습니다. 책이란 적절한 때에 읽힐 때가 있다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인 듯 합니다.


- 200자 원고지: 8.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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