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화이 : 괴물을 삼킨 아이, 2013>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자기 내면의 폭력적인 모습들과 조우하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폭력적인 모습을 누르고 참아낸다. 가끔 그 또 다른 자아를 꺼낸다 할 지라도 이성이라는 놈이 최악의 결정만은 끝까지 꾹꾹 눌러내기 마련이다. (그것이 잘 안 되는 사람들을 우리는 ‘사이코패스’ 혹은 ‘살인자’ , ‘범죄자’ 로 부르고 규정짓는다. 그리고 영화는 화이와 다섯 명의 범죄자 아빠를 통해 인간 내면의 ‘악’을 조명한다.
영화 속 화이는 괴물의 위협을 받는다. 이 괴물은 자기 내면의 악을 상징하는 듯하다. 이 괴물이 본인임을 자각하는 순간 인간은 괴물, 다시 말하자면 악인으로 거듭나고 이 괴물을 억누르고 살아가면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 (어떤 측면에서는 ‘양심’ 혹은 ‘죄책감’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 괴물의 포악함이나 크기는 ‘환경’ 이 결정한다. 영화 속 이 환경은 다섯 명의 ‘아빠’ 가 결정한다. 화이도 아빠들이 아니었다면 화이 내면의 괴물이 흉포해지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이 영화의 부제인 "괴물을 삼킨 아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어령 선생께서는 당신의 글을 통해 한국인의 특별한 언어 사용 중 하나로 '먹는다'라는 말을 꼽았다. 한국인은 무엇이든 먹는 것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마음 '먹기'에 달렸다." 라던가, 겁도 '집어먹는다'고 이야기한다는 식이다. 심지어는 어떤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때 '먹기'에 이어 '소화시킨다'고 표현한다고 기록했다. 나는 여기서 영화의 부제와 연관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먹고 나면 우리는 삼키고, 그것을 소화시킨다. 이것을 한국인의 특별한 언어 사용의 예에 접목시킨다면, 앞에서 언급했던 '화이'를 괴롭히던 '괴물'은 화이에게로 '흡수'되고 '화이'의 하나의 '인격'이 된다. 단순히 괴물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괴물 그 자체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아빠들’ 일까? 잘못 어울리게 된 나쁜 어른들이나, 아빠와 아빠 친구들이 아니라 ‘아빠들’ 일까?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즉, 아이의 행동이 어른들이 하는 행동의 축소판이란 뜻이다. 그중에서도 아이가 가장 존경하고 의지하고, 따라 하고자 하는 존재가 ‘아빠’이다. 아이가 아빠의 모든 것을 따라 하고 아빠의 삶을 똑같이 이어가지는 않지만 아이에게 아빠는 모방의 대상이고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화이는 어릴 적부터 아빠들의 범죄를 보고 자랐을 것이다. 그들을 존경하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그들의 행동에서 무언가 배운 것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사격이나 운전 실력 등등.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화이가 아빠들의 잔혹성과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것들을 학습했다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그것이 괴물의 영향인 듯 표현되지만 본인이 보기에는 아빠들이 화이 내면의 괴물을 키운 것으로 보인다. ‘화이’ 가 ‘why’와 비슷한 발음이라며 화이 이름 자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죠?”라는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는 감독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아마 화이가 범죄자 아빠들이 아니라 일반적 가정에서 살았다면 화이의 비극도 없었고, 그렇게 살 필요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감독의 의도가 어느 정도 이해되는 듯하다.
P.S. 또 다른 화이의 포스터 속 ‘뿌리’의 이미지 역시 아빠들이 화이에게 준 부정적인 영향이 화이의 성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상징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듯 보인다.
전체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