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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소리엘 May 23. 2016

어린 커플

그리고 나 하나로도 숨 가쁜 나 

 오랜만에 학교에 들렀던 5월의 어느 날. 천천히 교정이라도 구경하려고 했건만, 가는 날이 장날인지라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후드티에 청바지, 뿔테 안경이라는 똑같은 복장의 공대생들끼리 점심 먹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고 설레 하던 새내기는 어느새 사회인이 되었다. 아무런 준비도 안된 채 어른이 되어버린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새내기의 기분으로 어수룩해하던 찰나였다.

 의외로 비 오는 교정은 운치가 있어서 이곳저곳 둘러보았다. 나름 학교를 일찍 하산한지라, 연락해 만날 친구들은 몇 있었다. 고시를 공부하는 친구, 대학원을 다니는 친구, 그리고 회사를 다니는 나. 서로 다른 길을 걸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벌써부터 다른 세상을 살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했던 우리는 서로의 여러 표정을 알고 있었다. 심술궂은 표정부터 미친 듯이 신나서 웃는 표정까지. 울기 직전의 머뭇거림부터 더듬으며 화를 내는 장면까지 말이다. 내 앞의 친구들은 이제는 그렇게 격렬한 표정을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다. 마치 세상을 이제야 좀 알겠다는 듯 연신 공허한 사회 돌아가는 이야기들을 공기처럼 내뱉는다. 펑. 펑.


 앞으로 우리는 얼마나 더 서로에게 감정적이 될 수 있을까.


 서로를 위한 격려 반, 덕담 반. 그리고 덤으로 주는 다음 약속에 대한 기약. 우리의 대화는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앞으로도 그럴 지도 모른다. 높은 확률로.

 학교에서 내려가기 위해 비를 피하며 버스를 기다리는데, 커플 한 쌍이 내 뒤에 줄을 섰다. 여드름이 아직 안 가신 피부, 촌스러운 구레나룻, 어설픈 화장, 그리고 세상 따위 관심 없는 것처럼 보이는 앳된 눈망울. 키가 작은 여학생이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남자친구에게 질문한다.

: 배고프지 않아?

무뚝뚝한 경상도 어투의 남학생은 답변이 짧았다.

: 너 배고프구나.
: 아닌데.
: 배 안고프다.
: 뭐 먹으러 갈래?
: ...왜 물어본 거야?
: 그냥?

귀여운 여학생은 배시시 웃었고, 촌스런 남학생은 후드티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냈다.

: 딱히 먹고 싶은 거 있어?
: 아무 데나 가자. 생각하기 싫어.
: 일단 나가야겠네 그럼.

저 멀리 버스가 오기 시작했고, 여학생은 빗내음 가득하게 말했다.

: 너랑 있으면 아무 생각 없어서 좋다.
: 다행이네. 그건.


문득 정말로, 아무 생각 없고 싶었다. 과거로 돌아가 세상 따위 별거냐며, 내 세상에 너 하나만 있어도 된다고 호기롭게 말하던 나로 돌아가고 싶어 졌다. 펑. 펑. 의미 없는 소리만 내뱉고 싶기 싫었다.

가을방학 - 이브나
식은 커피 같은 나의 고백에 몇 차례 버스를 보낸 뒤.
넌 내게 이렇게 말했지.
"넌 절대 결단코 수 백날이 지나도, 너 밖에 모르는 바보는 안될 거야.
 행복함에 눈물범벅이 될 지라도, 너 하나로 숨 막힐 바보는 안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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