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소리엘 Sep 18. 2016

꿈꾸는 자유주의자

<썰전>, <노유진의 정치카페>의 유시민 작가를 보며...

지식소매상으로 돌아온 유시민 작가


 TV를 잘 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매주 항상 챙겨보는 방송 프로그램이 생겼다. 바로 JTBC의 <썰전>이다. 최근에는 조금 뜸해졌지만 (2부로 넘어갔기에) 올봄까지 출퇴근 길마다 항상 듣던 팟캐스트가 있다. <노유진의 정치카페>가 바로 그것이다. 두 컨텐츠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지식소매상'을 자처하는 유시민 작가(이하 유시민)이다.

<썰전> 시즌2에서 전원책 변호사와 함께 고정출연 중

 유시민은 어떤 사람일까.

 16,17대 국회의원, 참여정부 보건복지부 前장관, 국민참여당과 통합진보당의 前 대표.

 '거꾸로 읽는 세계사', '후불제 민주주의' 등 많은 책을 낸 저술가이자, 그 유명한 <항소이유서>의 저자.


 유독 적에게 냉소적이며 밉살맞은 말투로 대했기에, 현역 시절 꼬투리도 많이 잡히던 이 애증의 정치인은 요즘 들어 미디어를 통한 '시사 논쟁 컨텐츠'를 통해 많은 사람들(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다시금 친숙해지고 있다.

 유시민이야 워낙 토론 분야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기에, 컨텐츠를 구성하고 기획하는 이들은 오히려 다른 고민이 생겼을 것이다. 매주 그와의 지속적인 논쟁을 통해 소위 말하는 '장사가 되는 컨텐츠'를 만들어갈 적절한 매칭 파트너를 구하는 일이 그것이다. <썰전>에서는 전원책 변호사(이하 전원책)가, <정치카페>에서는 진중권 교수(이하 진중권)가 그 중책을 담당하고 있다.


 전원책이나 진중권 역시 오랜 시사토론 프로그램 역사에서 꾸준히 등장해 온 쟁쟁한 논객들이다. 하지만 방송을 볼 때마다, 혹은 팟캐스트를 들을 때마다 유시민이 그들에게 한 수 접고 토론에 임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나는 이것이 유시민 만이 가지는 두 가지 이질적인 특징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타인의 의도를 넘겨짚지 않으려는 유시민의 결벽증스러운 태도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가 대표하는 '리버럴'이라는 성향이다.  어쩌면 이 둘은 크게 보면 하나의 특징일지도 모르겠다.


행동에 대해서 평가하고 진정성에 대해서는 평가하지 말라


 유시민이 몇 년 전 서울대 강연에서 했던 말이다. 그는 그 이후에도 수차례 '진정성이란 없다'는 말을 하곤 했다. 흔히 진정성이라는 단어로 포장되는 '타인의 의도'란 논쟁 혹은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유시민  <서울대 강연>은 총 youtube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으나, 1부만 링크를 본문에 담는다.

 유시민은 논쟁 중에 자주 등장할 법한 '의도 싸움'에 대해 강박증 수준으로 경원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그의 특징은 <썰전>보다는 <노유진의 정치카페>에서 더 잘 드러나는데, 이는 토론에서 그의 상대 역을 맡은 전원책과 진중권의 정치적 입장 차이에 기인한다. 사회적 현안에 대해 주로 유시민과 반대 입장을 취하게 되는 '보수' 전원책과의 논쟁보다는, 같은 당적(정의당)을 지녀 대부분 현안에 대해 같은 입장을 지닌 진중권과의 논쟁에서 그의 성향이 더 여실히 드러나게 된다.


 팟캐스트의 진행은 보통 이렇게 전개된다. 진중권이나 노회찬 대표가 박근혜 정부나 여당의 실태에 대해서 이런저런 비판을 한다. 한창 서로 맞장구를 치고 있는데, 유시민 혼자 조용하게 듣고만 있는 경우가 더러 생긴다. 보통 진중권이나 노 대표가 여당 정치인들의 잘못한 점을 지적하면서 그들의 의도를 넘겨짚거나, 현상 몇몇을 유쾌한 풍자를 통해 그 행동과 당사자를 함께 비판하려 할 때이다. 그럴 때마다 여지없이, 한 숨 고른 유시민의 비판이 시작된다. 시작은 늘 반 농담조라서 듣는 이의 간담을 더욱 서늘하게 하곤 한다.


  "아니. 그건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ㅁㅁ씨가 진심으로 나라를 생각하고 한 건지 우리가 어떻게 알아요? (농담조) 여당이 선거에서 이긴 과반의 힘으로 OO를 자신들 입장대로 추진할 힘을 얻는 게 민주주의고, 시장 논리 아니에요? 그걸 흉보면 안 되죠. 다만, 이 의견을 개진하는 방식에서 그들이 원칙을 어겼다는 거에 있어요."

 으레 이런 식이다. 의도에 대해서는 외려 상대방 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옹호를 한다. 입장이나 상황에 대해서도 객관적이고자 노력하고, 간혹 너무 시장 지향적이지 않을까 싶을 때도 있다. 그러한 점들을 다 인정하면서도 그 와중에 잘못된 톱니바퀴 하나를 찾지 않으면 못 견디는 그런 사람처럼 보인다. 물론, 톱니바퀴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통렬하게 비판하지만 말이다.


 팟캐스트에서 한 말은 아니지만, 예컨대 아래 기사와 같은 식이다. 국정 교과서 논란에 관련하여 박근혜 대통력의 정치적 의도가 불순한 것이 아니라, 그 방식에 있어서 토론을 기피하고 시장 논리에 반하는 행동 방식을 비판한다. 물론 그 특유의 냉소적인 유머는 이러한 첨예한 구조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유 전 장관은 “박근혜 대통령이 총선을 겨냥하거나 정치적인 의도를 갖고 국정화를 추진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면서도 “(박 대통령) 자신이 갖고 있던 현대사에 대한 인식이 옳다고 생각해 (국정화를 진행)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진짜 위험하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이 참모나 측근들에게 현대사 기술의 문제점을 들었을 순 있지만 의심을 해봐야 하고 반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과 대화도 하고, 의견도 들어봐야 했다”며 “현직 대통령이나 교육부 장관, 여당 대표 모두 토론을 기피하고 있는데 이는 굉장히 비겁한 행동”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유시민 전 장관은 “짐은 곧 국가란 식으로 우리나라가 ‘입헌공주제(박근혜 정부를 입헌군주제에 빗댄)’가 아니지 않냐”며 “이런 (박근혜 대통령의) 태도가 문제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한겨레신문, `15.11.16>
JTBC 밤샘토론 - 교과서 국정화 관련 발언

 유시민이 토론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중요한 현안을 한 방의 날카로운 풍자로 단순하게 파악하려는 것을 최대한 지양하고자 노력한다. 짧은 문장의 비유는 때론 긴 문장의 논리보다 직관적인 힘을 지닐 때가 있다. 인터넷 논객으로도 이름을 떨쳤던 진중권은 이러한 면에서 탁월한 모습을 보인다. 다만 그 비유가 가진 단순화의 힘이 강해져서, 논리와 현상을 왜곡할 수도 있다는 위험성이 늘 함께한다. 단순화의 첨병에는 늘 '의도 싸움'이 함께 한다. 

 '히틀러가 유대인 수백만 명을 학살할 때, 그에게 진정성이 있었을 수도 있잖아?' 이런 식의 의문을 항시 품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는 '진정성이 있었다면 악행이 용서되고, 발제의 의도가 불순하다면 좋은 의견도 사장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 논리적 귀결은 '진정성이란 없다'가 된다.


 명백히 드러난 명분(타인이 점치는 발화자의 의도와는 별개의), 그 행동에 따른 효과, 그리고 그를 도출한 논리 구조에 관련된 게임에서 그는 언제나 탑이었다. 직관적으로 타인을 설득할 수 있는 의도 싸움이 시작되는 순간, 손쉽게 진흙탕 같은 프레임 싸움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소위 '운동권'이 지니는 '진정성'이란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그의 경험에서 직감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후술 하겠지만 때로 이것은 그의 큰 단점이 되기도 했다.


진짜 리버럴리스트


유시민은 자신을 리버럴리스트라고 지칭한다. 한국 사회에서 익숙한 '진보', '보수'와는 다른 이 생소한 개념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리버럴은 무엇보다 국가 또는 사회의 선택보다 개인의 선택을 우선 존중합니다.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실질적으로 침해하지 않는 한 국가나 사회가 그 개인의 선택을 규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시장경제를 경제적 기본질서로, 복수정당제를 기초로 한 대의민주주의를 정치적 기본질서로 인정하는 것은 이것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보장하고 존중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리버럴은 이러한 원리를 구현하기 위해 이를 침해하는 법률, 제도, 관습, 이데올로기와 싸웁니다.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지키느냐는 구체적 현실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저는 리버럴로서 당원에게 아무 권한도 주지 않는 정당체제와 싸웁니다. 국가상징물 앞에서 주권자인 국민으로 하여금 공개적인 충성 서약을 하게 하는 국민의례에 반대합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기 원합니다. 성차별을 제도화한 호주제 역시 폐지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파업권을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으로 인정하며 이를 부당하게 제약하는 노동관계법을 개정해야 하며, 그런 전제 위에서 불법파업을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를 인정하며 대체복무제를 도입하는 데 찬성합니다. (중략) 
 리버럴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정착된 곳에서는 보수적입니다.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진보적입니다. 지켜야 하는 것보다 고칠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리버럴은 자유지상주의자와는 다릅니다. 자유방임이 언제 어디서나 최선의 결과를 가져온다고 믿지 않으며 시장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모든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다만 국가가 불가피하게 개인의 선택을 규제하고 개입하는 경우에도 그 수단이 최대한 시장친화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서울대저널 인터뷰, 57호>
03년 4월 재보선 당선 직후 국회 본회의장에  첫 등원한 유시민. 복장으로 많은 논란이 되었다.


 노무현 前 대통령은 정치에 대한 참여 열망이 강하며, 교육을 받은 엘리트 도시 중산층을 '깨어 있는 시민'이라고 지칭했다. 참여정부 시대의 '깨시민'을 우리는 리버럴이라고 불러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깨시민 리버럴의 중심에는 유시민이 있었다.


 깨어 있는 시민(즉, 리버럴) 단일 다수파의 꿈. 친노 정치인들은 많든 적든 이 꿈을 공유하는 그룹이었다. 2003년 열린 우리당과 2010년 국민참여당은 둘 다 ‘참여의 문턱 낮추기’를 상징하는 이름을 내걸었다. 그것이 정치 혁신과 집권의 열쇠라는 확신이 있었다. (중략)
 하지만 참여에는 두 가지 경로가 있다. 첫째, 각성한 시민의 자발적 참여다. 리버럴이 선호하는 경로다. 둘째, 정치적 리더십의 조직과 동원이다. 리버럴은, 그리고 친노 엘리트는 이를 구태정치로 본다. 정치인 유시민이 본인의 사명으로 내걸었던 정당 개혁의 핵심 내용도 조직과 동원을 척결하고 자발적 참여로 움직이는 정당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현실정치에서의 마지막 프로젝트로 2011년 당시 참여당과 민주노동당의 합당을 추진할 때에도 ‘당원 중심의 민주적 정당 문화’를 통합 명분으로 내걸었다.
<시사인, 좌절된 유시민의 '리버럴 정치', `13.03.06>

 리버럴에게 시민들의 정치 참여의 경로 중 하나인 '정치 리더의 조직과 동원'은 구태 정치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유시민은 국회의원 시절 '지역구에 얼굴도 안 내미는 정치인'이라며 욕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였다.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 - 리버럴은 전자에 더 치중했을까.



  어쩌면 그는 그가 지닌 빼어난 논리성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아직도 나는 유시민이 온 국민을 상대로 논쟁을 펼쳐도 전혀 밀리지 않고 자신의 논리를 구축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확신한다. 그것은 그가 고집불통 이여서가 아니라, 그만큼이나 유연하고도 단단한 논리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내공은 그만큼이나 탁월하다. 하지만 탁월한 논리가 사람을 설득하는 요소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대다수의 국민은 '고학력 도시 중산층'과는 다르게 일상적으로 정치에 관심을 두기 어렵다. 위의 기사에서 천관율 기자가 후술 하듯,  ‘정치적 관심’ 역시 사회적으로 불균등하게 나눠가지게 되는 자원에 불과하다.


 어쩌면 정치인의 논리를 유권자들이 100% 이해를 하는지 여부는 부차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완전한 이해보다는, 정치인의 '진심'에 대한 신뢰와 그에 대해 느끼는 동질감이 설득에 더 중요한 요인일지도 모른다. 정치는 부자나 대학 교수 같은 이부터 저학력의 노동자까지도 모두 동일한 한 표를 지니고, 그 상황에서 얼마나 많은 표를 획득할 수 있느냐의 게임이다. 모든 이가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 의사 결정하지 않는 바에야, 논리적 설복은 자칫 잘못하면 '그래 너 잘났다' 그 이상이 되기 어렵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사람들이 크게 의지하곤 하는 '정치인의 진심'은 유시민이 그토록 멀리 하려는 '진정성'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명징한 논리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았을까. 그는 뛰어난 사고능력과 이를 표현할 역량을 지녔지만, 본인이 말하는 바를 이해할 노력도 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한 정치인으로서의 고민이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재선의원 경력과 1년이 넘는 장관 경력, 그리고 두 번의 당 대표를 한 이에 대해서 감히 이렇게 평가를 내려 본다. 유시민에 대해 쓰면서 그의 의도나 생각을 넘겨짚게 되는 졸문이다.

youtube - 유시민 <한국 정치가 망한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현실 정치에서 떠나 작가로서 훨훨 날아가는 그의 모습이 보기 좋다.

 현상 안에서 노력을 많이 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현상 밖에서 분석을 하는 것은 가히 거장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를 향한 팬심을 담아 이 졸문을 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기대하는 게 싫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