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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소리엘 May 23. 2017

김광석 이야기

위로가 필요한 날 듣고 싶은 목소리

골목골목 언저리마다 동네 형처럼.


 나는 김광석을 잘 알지 못한다. 그가 영원한 가객(歌客)이 되어버린 1996년, 나는 10살도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나의 18번은 김건모의 <핑계>와 패닉의 <왼손잡이>였다.) 나와 그의 삶이 서로 스쳤던 시기는 고작해봐야 9년. 그럼에도 나는 김광석과 그의 노래와 좋아한다. 언젠가 친구가 이런 질문을 했었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듣고 싶은 앨범을 골라보라고. 저울 한 편에 밴드 Oasis와 함께 김광석을 얼마나 저울질했던가. 시간이 흘러, 가끔 그 때 그 질문이 생각날때면 다시 고민해본다. 이제는 다섯에 서넛은 김광석 앨범을 고르지 않을까 싶다.


 어릴 적부터 삶의 귀퉁이마다 김광석 노래를 얼핏 얼핏 들었으리라. 그는 유명한 가수였으니까. 그래도 내가 처음으로 김광석의 노래를 '제대로 듣게' 된 건 2004년 겨울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방학, 하라는 공부보다는 <신해철의 고스트네이션>으로 새벽을 지새는 일이 더 많던 시절이었다. 그날따라 마왕 신해철은 줄창 포크송을 선곡했다. 마왕은 그 특유의 귀찮은 듯한 말투로 친절하게 아티스트의 이름을 읊어주었다. 그 곳엔 밥 딜런이 있었고 피트 시거가 있었고 안치환이 있었다. 그리고 마침 김광석도

 라디오 소리는 새벽이 평소보다 선명하게 들리곤 한다. 하지만 그 날 이어폰을 통해 전해들은 김광석의 노래는 얼마나 투박하고 애절하던지. 날이 선 목소리와 대비되는 유달리 또렷한 발음. 강렬한 첫 만남의 기억은 '그대 보내고 멀리'라는 작은 읊조림으로 시작되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김광석

 노래가 끝나고 어찌나 여운이 남던지. "아, 공연에 가야겠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더랬다. 후에 인터넷을 통해 그의 비보를 뒤늦게 접하고는 얼마나 안타깝던지. 그도 그럴것이 8년이나 늦은 절절함이었다.

영화 <공동경비구역JSA> 中


 가끔 멜랑꼴리한 기분 탓에, 때로는 또래보다 어른인 척하고 싶어서. 그 날 이후, 귀에 꽂고 걷던 음악 목록 한 켠에는 늘 김광석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 날 이후로, 인생 골목골목 언저리마다 동네 형처럼 김광석의 목소리가 등장하곤 했다.

 실연 아닌 실연을 당하고 '사랑했지만'을 들으며 걷던 대학로 골목. 친구의 입대 전날 목 놓아 '이등병의 편지'를 불러 젖히던 노래방. 후임에게 억지로 코드 몇 개를 배워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를 기타로 뚱땅대던 내무실. 술에 취해 어깨동무한 채 '서른 즈음에'를 부르던 가로등 아래.

거리에서, 김광석


이 사람 노래가 내 마음을 읽습니다

 

 그는 나와 다른 시간을 걸었음에도, 지금의 내 마음을 어쩜 이리도 쥐락펴락하는지. 김광석이 내게 어떤 사람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모법답안을 베끼는 마음으로 '그 사람 노래가 내 마음을 읽는다'라고 수줍게 답하지 않을까.

네이버 지식인, 우문현답

 고백하자면, 복학생이 된 후 한동안 김광석을 멀리하던 때가 있었다. 낭만보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급하던 시절, 나는 어설픈 위로보다 논쟁과 해결방안이 중하다 여기며 그에 집착하고 있었다. 20대 초반까지 김광석에게 위로받던 기억은 마음 한 켠에 감춰둔 채, 나는 어느새 나의 언어와 행동에서 따스한 구석을 닦아내려 애쓰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의자 위에서 씨름하고 냉철하고 이성적인 나를 만들고자 노력하던 시절이었다. 그 때문에 모호하고 말랑한 나의 부분을 배척하며 젠 체 하던 서글픈 시절이기도 했다.


 김광석을 다시 찾은 건, 한 선배의 추천으로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난 새벽이었다. 책 속의 조르바는 내게 거친 말투로 으르렁댄다. "수백 권의 책을 읽고, 수천 번의 탁상공론으로 너만의 상아탑을 쌓는 것이 너의 행복이냐"라고. 나아가 그것이 너가 바라는 삶이냐고 독촉한다. 나는 왜 그 질문을 마주하자마자 다시 김광석을 찾았을까.

 오랜시간 떠돌던 동생을 맞아준 김광석의 목소리는, 여전히 터질 듯 말 듯 떨리고 있었다. 울음을 참는 듯한, 그리고 마치 나 대신 터트려 울 것만 같은 그 목소리에 서른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그의 노래를 찾는다. 위로를 받으며 살고 있다.

서른 즈음에, 김광석


행복하세요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는 문턱에서 직면하는 문제들은, 그 이전과는 또 다른 문법으로 삶을 지치게 한다. 백이면 백 족족 소위 '현실의 문제'라는 것에 발 하나쯤 걸치고들 있으니, 회피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뭐 하나 결정하고, 마음 다잡아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건 왜 이리 아프고 아린지.

 김광석 목소리를 들으며 울고 웃던 날들도, 외려 애써 무시하려 애쓰던 날들도. 노래를 들을 때마다 철없던 어린 옛 시절들이 노래의 배경처럼 아련히 떠오르곤 한다. 이제는 '내 마음을 읽는 그의 노래'가 아니라 '그의 노래에 힘내고 애쓰던 나의 과거'가 지금의 삶을 지탱해주기도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행복하세요."

그는 공연을 마칠 때마다 이렇게 인사했다고 한다.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김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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