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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소리엘 Mar 06. 2017

상품기획자가 바라본 다른 직군

제조업종 상품기획 업무 3년 차의 시야

 어느새 곧 경칩이다. 추워서 움츠렸던 1,2월과는 다르게 정말로 한 해가 시작되는 기분을 느끼게 되는 시기이다. 수많은 취준생 후배들로부터 연락이 오기 시작하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연락이 오는 사람들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지원할 회사와 직종을 명확히 결정한 채 방법론과 가능성을 다찌는 이들에서 아직 자신이 무엇을 하고픈지 그림조차 그리지 못하는 사람들까지. 특히 후자에 가까운 친구들은 이런 질문을 하곤 한다. 

"XX업종의 마케팅 직군은 뭐하는 곳이에요?" "ㅁㅁ회사의 PM은 어떤 일을 하나요? 


 이러한 질문을 받은 현직자의 대답은, 어떤 경우에도 객관적이기 어렵다. 답변자의 시야와 편견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내 Status에서 마주하는 시선을 통해서만 답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대기업, B2C 제조업, 상품기획 직군, 경력 3년 차'가 현재 나의 Status이다.


'상품기획'직군은 그 이름처럼 '상품개발 프로세스'를 법전 삼아 일을 하는 조직이다. 따라서 마주하고 협업하는 부문 역시 상품개발에 관련된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3년여의 시간 동안 내가 담당하는 상품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경영층이 참여하는 회의체 관리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내게는 묘한 능력이 생긴 것 같다. 처음 보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회의실에 들어서는 순간 어느 직군의 사람인지 예측할 수 있는 쓸모없는 능력 말이다. 특정 직군의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말단 실무부터 책임감 막중한 부문장까지 엇비슷한 공통점을 지닌다. 더불어, 서로 다른 직군에 대한 편견도 비슷하게 자라난다. 나의 그들에 대한 편견을 묘사하며, 내가 느낀 대기업 직군별 특성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상품기획이 바라보는 디자인(Design)

 "여러분. 5년 후, 10년 후를 생각하셔야 해요."

 딱 붙는 슈트에 녹색 스카프, 젤을 멋들어지게 바른 머리, 빡빡 밀은 스킨헤드 등등. 보수적인 대한민국 대기업 문화에선 절대로 통용되지 않을 것 같은 드레스코드로 회의실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이계(異界)에서 온 외계인들, 바로 디자이너들이다.

 바야흐로 디자인의 시대. 아름답지 않은 상품은 주목받지도 팔리지도 않는 현실 속에서, 회사가 디자인 부문에 부여하는 압박은 상당하다고 한다. 그런 대내외적인 압박을 견뎌내서일까, 회의에서의 그들의 태도는 도도하다. 

 상품이 출시되는 시점은 늘 지금보다 먼 미래이기에, 디자이너들이 바라보는 디자인 트렌드는 늘 머나먼 이야기다. 현실에 뿌리내리고 사는 우리 머글들에게는 그 예언이 좀 버거울 따름이다. 차라리 디자인 용어가 좀 덜 모호했으면 좋으련만. 'Modern 하면서 Ellegance 한 Line'이라거나 'Wide 함을 가미한 Simplicity에 충실한 Button'이라던가... 회의록 쓰기도 곤혹스러운 용어의 나열들이 반복된다.

 향후 10년 후의 디자인 트렌드를 설명하기 위해, 예술 감각 없는 지구인들에게 지구어(語)로 번역해 설명해야 하는 디자이너들. 오늘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상품기획이 바라보는 국내영업(Domestic Sales)

 "아니, 그 가격이면 사람들이 사겠냐고요?"

 소비자, 소비자, 그리고 시장, 시장. 영업직군이 말하는 문장에는 늘 소비자와 시장이다.

 미리 말하지만, 개발 관련 회의체에 참여하는 영업직군 사람 치고 '실제 고객을 상대하는 영업맨'은 극히 드물다. 거대한 영업 조직에서 판매를 담당하는 부문과 상품개발에 영향을 주는 부문은 별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업 사람들에게는 특유의 자존심이 묻어난다. 누가 뭐래도 회사에 돈을 벌어주는 것은 영업이니까 말이다.

 사람다운 정이 넘쳐흐르는 사람들. 금방이라도 형, 동생 할 것만 같은 영업 마인드는 회의 중에도 그들의 온몸에서 새어 나온다. 시장의 정확하고 생생한 니즈를 상품에 반영하기 위해 영업 부문은 개발 프로세스에 참여한다. 

 물론 그 시장 니즈라는 게 난해한 경우는 드물다. "보다 싼 가격, 월등히 우수한 상품"의 동어반복이다. 이해하기 어려우면 "2000원어치 같은 콩나무 시루 1000원"을 생각하면 되겠다.


상품기획이 바라보는 해외영업(Foriegn Sales)

 "방금 발언은 중국시장을 잘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이신 것 같네요."

  소위 취준생들이 바라보는 '엘리트 회사원'의 이미지는 해외영업 부문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샤프하고 단정한 정장, 덤으로 깔끔한 안경, 화려한 외국어 실력, Buyer들과 주고받는 영어 이메일...

 같은 영업이라지만, 국내영업과 해외영업은 극명한 차이가 나타난다. 바로 해외영업이 담당하는 시장은 국내를 제외한 전 글로벌 시장이라는 점. 얼핏 볼 땐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여기는 대한민국이기에 회의에 참석하는 재무 담당도, 마케팅 담당도, 디자이너도, 심지어 해외영업 담당자도 한국인일 확률이 높다는 게 문제이다. 한국시장에 대한 논의가 될 때는 너도 나도 사공이 되어 시장 전문가인 양 나서지만, 중동 시장이나 터키 시장에 대해 논의할 때는 모두가 해외영업의 말을 경청한다. 어느 누가 남아공 시장의 Key Factor를 잘 알겠는가? 물론 해외영업 담당자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들 역시 그 시장을 모른다는 점은, 그들이 이메일과 해외전화에 업무의 90%를 천착하게 만드는 동인이 된다. 그렇게 열심히 연구하고 소통한 끝에 그들은 글로벌 시장의 니즈를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  

"Cheaper prices, Better Product." 진실은 늘 멀리 있지 않다.


상품기획이 바라보는 연구개발(Develope)

 "검토 결과, 해당 요청사항은 개발이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첨부 파일 열어주세요."

 청바지, 자유로운 복장, 회의체에 어울리지 않는 어눌한 말투, 가끔 나오는 공대 부심. 

 캠퍼스에서 봤던 공대생들은 Engineer, Developer가 되어 회사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차이라면 공대생 때보다 그들은 조금 더 조용해졌다는 점이다.

 디자이너들처럼 외계어를 사용하지도 않고, 영업처럼 은근한 자부심이 드러나지도 않는다. 공대생에 대한 오랜 편견처럼, 그들은 애초에 문장력을 장점으로 가지던 부류의 사람들은 아니다. 디자이너는 아름다움에 대해 책임을 지고, 영업은 판매에 대해 책임을 진다면, 그들은 상품의 개발을 책임지고 있다. 그렇기에 초기 컨셉을 제안할 때는 말을 아끼는 편이다. 프로젝트 초기에 영업, 디자인, 마케팅 등에서 프로젝트에 대한 꿈꾸는 듯한 제안을 청산유수처럼 쏟아낼 때, 그들은 묵묵히 그 가능성을 점검하고 조심스레 개발이 어려울 것 같다고 거절할 계획까지 마치곤 한다.

 때때로, 그들이 열의에 넘치게 제안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엔지니어가 좋아할 만한 신기술, 차세대 기술, 하이 테크놀로지의 탑재를 주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소비자가 잘 인지하지도 못하거나, 지불 의향이 없는 기술인 경우가 태반이기에 그들의 열정과 실패의 기록은 오늘도 회의록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상품기획이 바라보는 마케팅(Marketing)

 "결국 저희는 사진 찍기 좋은 내용물이 필요해요"

상품개발 프로세스에서 가장 고문관 취급을 받는 조직은 어디일까. 센스 충만한 마케팅 부문은 의외로 개발 프로세스에서 고문관 취급을 받곤 한다. 실제 개발에는 크게 관여하지도 책임지지도 않지만, 그렇기에 가장 상식을 벗어난 꿈과 목표를 요구하는 집단이 바로 마케팅이기 때문이다.

 적절한 포지셔닝, 경쟁사 대비 우수한 스펙, 기존 모델 대비 저렴한 가격 등을 이룩한 상품은 사실 매우 개발하기 어려운, 훌륭한 상품이다. 다만, 마케팅 부문이 그에 만족하지 못할 뿐이다. '적절한 상품'은 마케팅에게 모욕이라도 되는 석 마냥, 그들은 Killing Item이 상품 어딘가에 포함되길 집착한다. 아름다운 셀카 1장을 찍기 위해 수천 개 각도로 사진을 찍는 SNS 스타처럼 말이다. 

 물론 아무리 SNS 스타일지라도 오프라인 친구들이 그를 좋아할지는 다른 문제다. 마치 개발 프로세스에서 마케팅 부문처럼 말이다.


상품기획이 바라보는 재경(Finance)

 "안돼요."

 아름다운 디자인, 번쩍번쩍한 신기술, 킬링 아이템도 좋다. 이걸 보다 값싸게 만들 수 있으면 더더욱 좋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꿈의 상품을 만드는 것은 한없이 불가능하다. 회사의 절대 갑 1위. 재경 부문이 있기에.

 회의체에 계산기만 들고 오는 경우가 허다한, 다크서클 가득한 재경 담당자들은 프로젝트의 수익성을 책임지는 부문이다. 재경 담당자들에게는 담당하는 상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경탄스러운 구성력을 지녔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수익률만으로 프로젝트를 바라보도록 요구받는다. 영업이 제안한 목표 판매량을 달성하면 개당 몇 %의 수익률로, 몇 년 만에 투자비를 회수할 수 있는가로 그들의 야근은 빡빡하게 구성되어 있다.

 물론, 자신의 월급을 소중히 여기는 직장인들은 재경을 무시하거나 비꼬아선 안된다. 그들의 계산이 모이고 모여 내 월급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아 재경 느님. 충성 충성 충성.


상품기획이 바라보는 품질(Quality Assuarance)

 "표준대로 해주세요."

 재경과는 또 다른 종류의 갑으로는 품질 부문을 들 수 있겠다. 재경이 '수익성'이라는 불문율로 프로젝트를 재단하는 자본주의의 첨병이라면, 품질은 '사내 품질 기준'을 법전 삼아 재판을 일삼는 꼬장꼬장한 시어머니 판결관이다.

 품질의 오류가 생기기 않는 것이 그들의 가장 큰 미덕이기에, 그들은 누구보다도 보수적으로 프로젝트를 바라본다. 경쟁사 최초로 적용하는 신기술 같은 것은 그들에게 좋은 먹잇감이다. 신기술이기에 품질 부분에서 Claim이 생길 여지는 무궁무진하기에, 그들은 보다 가혹한 기준을 만들어 신기술 2.0을 옛날 기술 1.2 정도로 떨어뜨리는 데 성공하곤 한다. 차라리 이럴 거면 그냥 기존 물건을 팔면 되지, 왜 새로운 물건을 투자비 들여 개발하는지 의심이 되는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모두의 눈총을 받아가며 극한 상황에서의 품질 상태를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그들의 외로운 싸움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상품기획이 바라보는 선행전략(Strategy)

 "여기까지 이미 경영층 보고 드린 사항이고, 개별 프로젝트 내에서 방법론을 찾아주셔야죠"

 이렇게 프로젝트 담당 실무들끼리 설왕설래, 고성방가를 통해 겨우 이룩해놓은 일말의 균형 상태를, 모래성처럼 부수는 존재들이 있다. 큰 그림을 그려가며 전체적인 전략을 짜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라인업 전략, 디자인 전략, 출시 전략 등의 큰 전략은 그간 개별 프로젝트에서 쌓아 올린 방향성의 근간을 흔들곤 한다.

 `15년에 출시하기로 하고 개발된 상품이 `17년까지로 연장된다거나, 애써 좋은 디자인을 개발했더니 상위 모델까지만 그 디자인 Theme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던지. 프로젝트의 대전제가 흔들리는 순간 그에 맞춰 프로젝트별 부문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기민하게 재조정하는 후속작업을 필요로 한다.

 대붕의 뜻을 어찌 참새가 알겠냐마는, 대붕께서도 참새 일을 신경 안 쓰는 게 문제 아닌 문제다. 넓고 높고 큰 그림을 그리다 보면, 개별 프로젝트의 근간 같은 자잘한 현안은 프로젝트 단에서 스스로 해결하기를 바라시곤 한다. 그렇다. 큰 그림이 바뀌면 어시(Assistant)들은 열심히 밑그림과 색조 작업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레전설 명짤 소환 (Project Manger를 기획자로, QA를 품질부문으로, Support를 재경부문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회사가 어떤 '상품'을 만드느냐에 따라 상품개발 프로세스의 기간은 상이하다. 샴푸보다는 휴대폰이, 휴대폰보다는 자동차가 시장에 나오는 데 오랜 기간이 걸리는 식이다. (내가 담당하는 상품군 역시 프로젝트 킥오프 이후 3년 이상의 시간이 지나야 시장에 선을 보이게 된다.) 

 이런 긴 시간 동안 무수한 회의체를 통과해 나가며 상품개발 프로세스는 진행된다. 어떤 회의체에는 실무들끼리만 모여 진행하기도 하지만, 그 현안의 크기에 따라 팀장급, 심지어는 한 직군(Function)의 대표들이 참여하는 경우도 더러 생기게 된다. 

 그러한 무수한 의사결정과 현안 협의를 통해서만이 훌륭한 상품을 시장에 전달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화려하고 높은 의사결정들 아래에는 직무별 담당 실무들의 탁상공론, 고성방가, 전화, 스케줄링, 데이터 편집, 밤샘 업무 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뿌듯함을 느끼는 때도 역시 상품이 출시되고, 좋은 평가를 받을 때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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