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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육헌 Apr 12. 2017

나만 아니면 되는 사람들의 사회

모두가 손해를 보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판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

보통 주말에는 서울 어딘가에서 맛난 저녁을 먹고, 강남역에서 신분당선을 타고 수지 집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최근 몇 달 간은 토요일 저녁의 신분당선이 참 시끌벅적해서 싫었다. 그놈의 태극기 집회 때문이다. 돌돌 말아쥔 태극기를 품에 꽂고는, 그게 무슨 고성방가 면허라도 되는양 남들 들으라는 듯 정치 얘기를 해대시는데 그게 얼마나 민폐고 진상이었는지.


다행히도 오늘은 서울에서 빠르게 일정을 마치게 되어 편안한 마음으로 신분당선에 올랐는데, 이번에는 또 저쪽 노약자석 앞에서 무슨 시비가 붙은 모양인지 할아버지가 쩌렁쩌렁 고함을 친다. 그런데 그 상황이 가관인게, 노약자석에 꼬마 여자아이를 왜 앉혔냐며 그 옆에 앉은 할머니를 버럭버럭 나무랐던거다. 여자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분이 황급히 여자아이를 데리고 빠져나갔다. 여자아이와 아무 관계가 없었지만 옆에 앉았다는 이유로 애꿎은 피해자가 되어버린 할머니는 1) 노'약'자석에 꼬마 아이를 앉히는 것이 뭐가 잘못된 것이며 2) 대뜸 공공장소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왜 큰 소리를 질러대는건지 모르겠으니 본인과 꼬마아이에게 사과를 하라고 조목조목 대차게 따져주셨다. 감사하게도 할머니가 나서주신 덕분에, 주변 노약자석에 서있던 사람들도 합세하여 상황이 빠르게 종결되기는 했다. 목소리만 큰 진상들이 으레 그렇듯, 할아버지는 뭐라뭐라 얼버무리며 욕지거리만 내뱉더니 이내 다른 칸으로 도망쳐버렸다.  


최근 내게 토요일의 신분당선이 너무나 짜증스러운 경험이라 유독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대중교통에서건 공공장소에서건 어디서건, 최소한의 공중도덕도 시민의식도 탑재하지 못한 사람들이 점점 빠르게 늘어가는 기분이다. 일말의 배려도 없이 공공장소에서 쩌렁쩌렁 큰 소리로 떠들어대거나, 텅 빈 자리를 두고 굳이 핑크색으로 표시된 임산부 배려석에 턱턱 앉아버리거나, 이어폰도 없이 볼륨을 높여 음악을 듣고 또 동영상을 보는 이들과 같은 지하철을 타고 가는 것은 너무나 지치는 일인거다.


나만 아니면 돼


어느 철지난 예능 프로그램에서 '나만 아니면 돼'를 외치며 복불복 게임을 하던 개그맨들이 떠오른다. 찾아보니 이미 여러 언론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한 것 같긴 하다만, 그놈의 '나만 아니면 돼'가 슬프게도 우리네 시대상을 참 잘도 반영한 대사였구나 싶다. 지하철 한 쪽에는 '나만 피해를 안 보면 그만'이라며 너무나도 천연덕스럽게 또 때로는 무지한 채로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반대쪽에도 역시 '나만 그러지 않으면 돼' 하는 마음으로 그 민폐로부터 조용히 눈과 귀를 돌리는 것으로 안도하는 사람들이 있었을테다. 그렇게 나만 아니면 되는 사람들이 벌이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은, 내가 탄 지하철 뿐만 아니라 그 밖 여기저기에서도 마치 암세포처럼 그 판을 키우고 있었던게 아닐까.


공교롭게도 오늘 아침의 글쓰기 모임에서도 각자 속한 회사를 배경으로 요런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는데, 심지어 나는 나만 아니면 되지 하는 쪽 편을 슥 들었던 것도 같다 흑. '나만 아니면 돼' 라며 못본 체 시선 돌리는 대신에, 대차게 진상에 맞선 오늘의 신분당선 할머니와 또 옆에서 함께 거들어준 주변 사람들 덕분에 그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 균열이 생겼고 판이 흔들렸다. 다음에는 나 역시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봐야지 하고 반성을 해본다. 비록 나는 쫄보새끼지만...


*2017년 4월 9일 토요일,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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