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는 어디서 올까
사회생활을 하는 친구들끼리 만나면 으레 하는 인사치레가 있다. 잘 살아? 회사는 잘 다니고? 뭐? 힘들다고? 뭐가 가장 힘든데? 다니는 회사의 힘든 점을 토로하는 순간은, 그렇게 꽤나 잦고 자연스럽게 찾아온다. 답변은 저마다 처한 상황에 따라 다양하다. 나 역시도 바로 직전에 직면한 현안에 따라 각기 다른 스트레스를 토로하곤 한다. 잦은 야근과 이른 출근, 다양한 경상 업무, 퇴근 후에도 울리는 스마트폰, 사람과의 어려운 관계 등등. 다만, 질문을 바꾸어 업무에서 느끼는 스트레스로 한정하여 질문한다면 한결 명확하게 답변할 수 있다.
날 힘들게 하는 건 '업무의 회색지대'라고 말이다.
회사도 사람 사는 곳일지니 스트레스가 없을 것이라는 간 큰 배짱을 가진 적, 추호도 없다. (물론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다행인지 아닌지 스트레스의 대다수는 업무의 곁가지보다는 큰 줄기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중 상당수는 '누군가가 일을 잘 하지 못한 상황'에서 발생한다. 일을 잘 못하는 것이 나라면? 당연히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거짓말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물론 산재해 있다.) 남이 일을 잘 못하면? 그 역시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하는 법인데, 정말 박자 안 맞아서 못 해 먹겠다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닌 것이다.
일을 잘하고 못하는 건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우선 '일'을 정의할 필요가 있겠다. '대기업에서의 회사 업무(=일)'를 조악하게 정의해보면 아래와 같다.
"①여럿이 서로 협력하여 ②각자에게 주어진 업무를 완수하고 ③그에 대한 평가와 보상을 받는 것."
당신의 업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②에 대해 답한다. 조직과 분과에 따른 업무 영역은 대개 명확한 편이고, 그에 속한 개개인에게는 명시된 R&R이 존재한다. 회사 역시 한 개인이 업무를 훌륭히 수행했는지의 여부를 ②에 기초하여 가늠한다. 결과물의 퀄리티는 훌륭한지, 기한은 제대로 준수하였는지 등의 지표를 활용하여 말이다. 업무를 하다 보면 - 어쩌면 당연하게도 - 누군가가 자신의 업무(②)를 미쳐 완수하지 못하는 경우를 마주하곤 한다. 나 역시 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능력, 태도, 상황의 조합에 따라 미진한 업무는 발생하기 일쑤다.
물론 이런 상황을 마주하는 것은 매우 스트레스-풀하다. 다만, 그럼에도 상대적으로 대수로운 문제는 아닐지 모른다. 협의의 업무역량에 속하는 ② 부분은 회사가 구성원에게 부여하는 인센티브(③)와 직결된다. 인사고과나 연봉협상과 같은 개인의 이익과 맞닿아 있는 부분에서 사람은 노력을 하기 마련이다. 혹은 그마저 포기하고 자연스레 도태되거나 은둔하는 삶을 선택하기고 한다. 자신의 성과가 결과로써 돌아오는 영역, ②는 그렇기에 각자 자신의 과거를 책임지게 된다. 어느 방향이건 회사는 서서히 ②를 잘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남도록 유도한다.
개개인이 책임지지 못할 비정형의 스트레스는 대개 협업(①)에서 발생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는 무리 없이 수행하지만, 협력에는 배타적인 사람들은 다른 의미로 스트레스를 야기한다. 대기업 업무의 9할 이상은 매우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기에 다른 부문의 담당자와의 협력은 필수적이다. 거대한 업무를 유의미한 방식으로 파편화하여 분배하기 위해 회사는 조직도와 R&R을 활용한다. 연구개발은 A조직이, 마케팅은 B조직이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협력에는 늘 중간지대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어느 조직도 나서서 할 필요 없는 일, 어느 담당자의 업무 영역에도 속하지 않는 일. 공공재의 비극과 님비가 가득한 그곳이야 말로 회색지대(Gray Zone)이라 부를 수 있겠다. 회사의 수많은 희비극이 여기서 탄생한다. 바야흐로 드라마의 장이 여기에 있다.
사람이 사람과 부대끼며 관계를 맺을 때마다 늘 중간지대는 발생한다. 책임의 회색지대가 없는 인간관계가 어디에 있을까. 친구를 만날 때 약속 장소를 정하는 것, 데이트를 할 때 미리 영화 티켓을 끊어오는 것, 함께 여행을 갈 때 지도를 찾는 것 등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업무'가 특정인에게 부과된 책임의 영역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저 앞의 사람을 좋아하기에, 그와의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더 즐거운 순간들을 보내기 위해 우리는 명시되지 않은 회색지대를 자신의 '태도'로 채워 넣을 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공백을 자신의 태도를 들이밀어 극복한다. 때때로 그러한 방식은 상대방으로부터 유의미한 변화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모둠살이에 필요한 이러한 지혜는 예로부터 여러 명칭으로 불려 왔다. 예의, 배려, 팀워크, 리더십 등의 이름을 가진 채 칭송받아 마땅한 어떤 성역을 만든 것이다.
덕택에, 우리는 그러한 방식을 통해 관계에서 원하는 것을 얻는 데 익숙하다. 회사에서의 협업 역시 이러한 문법을 충실히 따른다. 업무의 중간지대를 이어나가기 위해 우리는 개인의 노력으로 타인의 노력을 갈구한다. '선임님, 이 자료 검토 좀 부탁드립니다.' '과장님, 다음에 제가 도와드릴 테니 이런 것좀 알아봐 주세요.' '에이, 형. 다 프로젝트 좋자고 하는 건데 부탁 좀 할게요.' 회사는 ②를 인센티브를 통해 관리하지만 광의의 업무 영역인 협업(①)에 대해서는 손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질문이 남을 수 밖에 없다. 개개인이 관계 맺어가며 관습적으로 터득한 낭만적인 방법론을 거대한 조직에도 그저 적용할 수 밖에 없는지 말이다.
혹자는 '협업'마저 R&R에 명시하면 해결되지 않겠냐고 말한다. 하지만 빠르게 변화하고 뒤바뀌는 세상 속에서 조직의 구조를 통해 이를 대응하는 것은 늘 반박자 이상 느릴 것이다. 그리고 시스템이 상황을 따라오지 못하는 그 순간에도,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가 '자신의 태도'를 아교 삼아 간극을 메꾸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 눈 돌려 부정하며, 시스템을 신봉하는 것은 애써 바보인 척하는 것과 같다.
'자신의 태도'로 협업을 이끌어 내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와 보상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빙빙 돌아 돌아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였다. R&R이나 조직도의 프레임으로 재단하기 어려운 부분이라면, 정성적이어도 좋을 것이다. 사람들은 정말로 약삭빠르고 영리하다. 동등한 조건의 옆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손익계산서를 금세 작성할 만큼 말이다. ②에만 만족하는 수많은 사람들만으로는 거대한 업무는 돌아가지 않기에 누군가 ①을 떠맡아야 한다. 그놈의 로오얄티, 허엉그리 정신만으로는 바보 소리를 들어가며 ①의 업보를 짊어질 이는 흔치 않다. 그렇기에 리더는 진지하게 '협업의 유인'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만족도의 문제와 협업에의 고취는 모두가 손잡고 등산한다거나, 사가(社歌)를 부른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다 함께 술 마시며 으쌰 으쌰 한다고 생기는 건 더더욱 아니다. 한 해의 불만사항을 말하라며 설문조사를 돌리고 연말까지 며칠 이상 남은 휴가를 쓰라고 종용하는 건 더더욱 아니고 말이다. 아. 쫌.